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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땅에서 죽을 것인가밀알은 하나님의 땅으로(요12:20-26; 사8:8-10)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6.26 22:01
▲ 나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다. ⓒGetty Image

1.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너무나 잘 아는 유명한 말씀이죠. 자기희생? 자기 부정? 자기 포기? 고난? 십자가? 그런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간혹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 더 큰 행복을 위해 눈앞의 작은 행복을 포기한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 고생하면 나중에 행복해진다.’

그런데 이런 식의 말씀 이해는 오해에 가깝습니다. 그런 말에서는, 내가 포기하는 행복도 나의 것이고, 그 포기를 통해서 얻는 행복도 나의 것입니다. 사실 그런 포기와 그런 고난은 누구라도 합니다. 왜요? 나중에 얻게 되는 것이 내 것이니까요. 내 이익, 내 욕심, 내 소망, 내 목표를 위해서는 누구라도 고난을 감수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얼마든지 듣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포기는 ‘더 큰 내 것’을 위한 ‘작은 내 것’의 포기가 아닙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밀알이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했는데, 그 열매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열매는 내 열매가 아닙니다. ‘밀알이 썩으면, 죽으면, 그 밀알이 더 커진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말하는 포기는 ‘나를 위한 나의 포기’가 아닙니다. ‘너를 위한 나의 포기’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밀알은 죽습니다. 죽고 끝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죽은 밀알은 그렇게 예수님처럼 화려하게 부활하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내가 화려하게 부활하는 것’을 은근히 꿈꿉니다. ‘많이 맺힌 열매가 내 열매가 되어서 내 곡간에 쌓이는 것’을 은근히 꿈꿉니다. 아니요. 정확하게 말씀드립니다만, 밀알이 죽으면 그 밀알은 죽습니다. 열매가 많이 맺히게 되는데, 그 열매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열매가 아닙니다. 내 곡간에 들어오는 열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수확하시고, 하나님의 곡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열매들입니다. 그 열매를 내가 가지려고 지금 죽는다? 잠시잠깐 고난당한다? 잘못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은 절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비유를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십니다. 23절에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하십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이 뭡니까? 십자가 처형 뒤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서 면류관 쓰고 거들먹거리시는 게 예수님의 영광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자체가 영광입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그 십자가의 영광을 표현하는 우리 인간의 표현법일 뿐입니다. 교리적인 종교적인 고백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중에 자기가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시려고 잠깐 고난을 감수하고 죽으셨나요? 전혀요. 절대요. 정확하게 말하면, 팩트만 말하면,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아무 영광도 없이 그저 죽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그 죽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얻은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겉으로 볼 때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맺어진 수많은 열매는 예수님 자신의 열매가 아니라, 그 죽음을 가지고, 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수확하신, 거두어들인 이 땅의 수많은 영혼들입니다. 구원받은 새로운 영혼들이 태어났고, 그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씨앗들이 됩니다. 그런 거룩한 죽음과 새로운 탄생의 끝없는 연쇄작용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써 맺어진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열매를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신 것이죠. 하나님의 열매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삶 자체를 놓고 보면,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그 삶이 끝났습니다. 이후에 어떤 열매도 맺지 못했습니다.

2.

27절에서 예수님 고뇌하셔요. ‘마음이 괴롭다’ 하셔요.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고민하셔요. 왜요? 내가 죽는데, ‘나’라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데, 그 열매가 아무리 엄청난 열매가 맺힌다고 해도, 나는 죽고 끝나기 때문이죠. 내가 무슨 대단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가 내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냥 죽어버리는 거니까요. 예수님도 그 사실을 잘 아시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고뇌하셨던 겁니다.

그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예수님 자신이 가르쳐 주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도 마음 아프고 고민되었다는 겁니다. 열매가 많이 맺힌다지만, 열매는 열매고, 그건 하나님거고, 정작 나는 죽는데 고민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그 모습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인간으로서, 부족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당연한 고민과 번민을 하나님도 잘 아신다는 겁니다. 이해하신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그 길로 죽음으로 인도할 수밖에 없는 그 애틋함, 우리는 그 마음으로 위로받습니다.

3.

하지만 위로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희망을 약속하십니다. 25절 말씀에서 아리송하게 말씀하셨지만, 요지는 이겁니다.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이순신 장군이 이 말씀을 어디서 들었는지, 그대로 따라 했어요. ‘생즉사 사즉생,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정신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냥 전쟁터에서 병사들 사기를 높여주는 멋진 말로 사용했을 뿐이에요.

이순신 장군의 말뜻은 뭐죠? ‘살고 싶다고 뒷걸음질 치면 결국엔 죽는다’는 겁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산다’는 거죠. ‘우리 다 살고 싶으니까 죽어라 하고 싸워서 이기고 결국엔 살자’는 거죠.

예수님 말씀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거꾸로입니다. 살고 죽는 이야기가 이 땅에서의 살고 죽는 차원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삶과 죽음을 말씀하신 겁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붙들고 놓지 못하면, 그 삶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렇게 이 땅에서만 살다가 죽을 뿐이다. 이 땅에서 살고 죽는 그저 그런 똑같은 삶일 뿐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만 사는 그런 삶을 미워하고, 이 땅을 초월한 하나님의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죽는 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다른 세상에서의 삶을 위해 죽어라.’

25절을 자세히 봅시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어버린다’ 했고, 이 세상에서의 목숨을 미워하면 ‘보존한다’고 했습니다. ‘죽는다’, ‘산다’라고 하지 않고, ‘잃어버린다’, ‘보존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생명은 이 목숨은 어차피 죽습니다. 내가 영원히 사는 것 아닙니다.

구원받으면 나중에 죽어서 영혼이 하늘나라 가는 거 아닙니까? 아니요. 구원은 그런 식으로 ‘나’라고 하는 존재가 계속 연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생명이 끝나고 나서 내 존재가, 내 생명의 가치가, 내 생명의 의미가 사라져버리는가? 아니면 내 존재가 내 가치가 내 의미가 내 삶이 계속 보존되는가? 하는 겁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내 삶이 내 삶으로만 끝나느냐 아니면 내 삶이 영원하신 분인 하나님과 연결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육신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이 그렇게 육신으로만 끝날 것이냐?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의 삶과 연관되고, 하나님의 삶과 마침내 하나 될 것이냐? 하는 것이죠. 그 소망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23절에서 자기 자신의 죽음을 두고 ‘인자가 영광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해서 영광스러워진다. 영광을 받는다 하시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 오직 유일한 영광이신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그런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담은 죽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죽음이 되었을 때, 그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나눴던 말씀 기억하시죠? ‘나를 위한 나의 포기’가 아닙니다. 내가 더 잘 살기 위해서 잠시 잠깐 내가 죽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온전히 나는 죽어버리는 겁니다. 나는 부활하지도 않고, 내 죽음의 결과를 내가 누릴 수도 없어요. 밀알은 그냥 죽습니다. 죽고 끝납니다. 그러나 그 열매가 누구의 열매냐 하는 것이 그 죽음의 의미를 결정해 줍니다. 그 열매가 하나님의 열매가 되었을 때, 그 밀알은 영광을 받게 되는 거죠. 새로운 차원 하나님의 차원에서 그 죽음이 영광 받는 겁니다.

4.

이사야의 말씀을 같이 읽었습니다. 세상의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 머리 좋은 사람들, 약삭빠른 사람들, 요령 좋은 사람들, 형통하는 사람들, 잘나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전쟁준비를 합니다. 자기가 이기려고요. 전략을 세웁니다. 자기가 이기려고요. 계획을 말합니다. 자기가 이기려고요. 자기가 이기고, 자기가 승리하고, 자기가 행복해지려고, 자기 목적을 이루고, 자기 꿈을 실현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런 노력들 가운데에는 잠깐의 자기희생도 있고, 잠깐의 자기포기도 있고, 전략적인 고난의 감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목적은 자기의 성공이고 자기 자신만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고백하는 우리들은, 그런 음모, 그런 모의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필 뿐입니다. 나에게 무엇이 돌아오는가를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께 무엇이 돌려지는가를 고민합니다. 그렇게 존재의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로 초점을 맞춥니다. 살아가는 모든 걸음걸음들이 하나님께 맞춰져 있습니다.

내가 이기기 위해 전략을 세우고 계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열매를 위해 그렇게 삽니다. 모든 삶을 하나님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마침내 죽음까지도 하나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게 ‘밀알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말의 참된 의미입니다.

5.

그래서 이제 우리는 새로운 단어에 집중해 봅시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맞나요? 아닙니다. 원래 말씀과 조금 다릅니다. 제가 단어 하나를 일부러 빼고 말했어요. 뭘까요? 다시 말해보겠습니다. 예. ‘땅’이라는 말입니다.

밀알은 그냥 죽는 게 아니라, 땅에 떨어져 죽습니다. 죽은 그 땅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이제 그 열매가 내 열매가 아닌 것도 알고, 하나님의 열매인 것도 알았습니다. 내가 살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죽는 시늉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더 필요한 고민은 내가 어느 땅에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금 나의 삶의 자리가 어디냐? 하는 겁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입니다.

살기는 내 맘대로 살고, 죽을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땅을 찾아서 간다? 그럴 수 없습니다. 마지막 죽음이라는 순간에만 영웅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멋지게 탁! 죽는다? 예수님 십자가처럼? 그런 것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순간의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평생을 통해 실천하며 사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마지막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명확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생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삶의 자리, 그 땅에서 평생을 그리스도로서 살아가신 것, 그런 겁니다. 죽음이라는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자기가 딛고 있는 땅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 하루하루 죽어가는 그 모습인 것입니다.

내가 죽는 자리는, 지금 내가 사는 자리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죽는 순간들이니까요. 나라고 하는 밀알이 어느 땅에 떨어져 죽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지금 내가 어느 땅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땅이지만, 세리가 탐욕스런 마음을 가지고 살 때는 그 땅이 더러운 땅이었지만,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는 똑같은 그 땅이 거룩한 땅이 됩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맞서 반역하며 밟던 땅은 신성모독의 땅이지만, 주님을 만나 회개한 후 선교의 열정으로 그 땅을 밟았을 때는 거룩한 땅이 됩니다. 사람이 바뀌면 땅이 바뀝니다. 내가 선 땅을 바꾸려면,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6.

몇 주 동안 종교개혁, 신앙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개혁은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 자리를 바꾸는 일입니다. 내가 선 자리를 바꾸는 것은, 서 있는 내가 바뀌는 방법뿐입니다.

우리는 회개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회개라는 말의 본 뜻은 ‘방향전환’이라는 말입니다. 잘못한 일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 자체를 바꾼다는 것입니다. 개혁도 똑같습니다. 특별한 행위를 하고, 특출난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웅적으로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죽어가는, 그 삶의 자리를 바꾸는 겁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내 마음을 바꾸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우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땅에 심기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땅에서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의 땅에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열매를 맺는 죽음을 죽을 수 있습니다.

시편 85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솟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주시니, 우리의 땅은 열매를 맺는다.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

아멘.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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