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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른후트 300주년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헤른후트에서 온 편지 (5)
홍명희 선교사 | 승인 2022.07.01 15:14
▲ 생일을 맞아 한 걸음에 달려와준 ‘샌드라’(사진 가운데)와 민매라 일본 선교사님(사진 제일 오른쪽)과 필자(사진 제일 왼쪽) ⓒ홍명희

300년 전 가톨릭의 종교적 핍박을 피해, 살길을 찾으러 ‘헤른후트’라는 허허벌판에 온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너그러운 믿음의 동지, 진젠도르프 백작을 만나고 첫 집을 짓기 위해 큰 나무 하나를 찍을 때만 해도 헤른후트가 이렇게 찬란한 믿음의 산지로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한 집 두 집 짓다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까지 짓게 되었고, 이미 헤른후트는 진젠도르프가 살아 있을 때도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그들의 신앙생활을 보고 가는 곳이 되었다.

그러는 중에 3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많은 것이 변했겠지만, 여전히 곳곳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궁금해 하면서 찾아온다. 내가 이곳에서 첫 한국 사람으로 산 지 5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이곳에 있어서 가끔 찾아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번에 300주년 행사를 치르면서, 나를 기쁘게 해준 만남이 있었다.

먼저 ‘샌드라’다. 샌드라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왔다. 그녀의 조상은 수리남에서 노예로 네덜란드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1667년부터 수리남은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고, 몇몇 건강한 노예들이 네덜란드에 도착하였다. 헤른후트 선교사들은 이런 노예제도에 맞서는 방법으로 그들을 노예로 사서 복음을 전했다.

그녀는 그들의 조상을 닮아 검은 피부에 곱슬머리이다. 우리는 코로나시기를 지내면서 한 신학 세미나에서 화상으로 얼굴을 서로 보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나를 금방 알아보고 예배 뒤에 찾아왔다. 나는 내가 늘 머무는 정원으로 잠시 초대했고, 우리는 함께 기도했다.

그녀는 아직도 신학 공부 중이다. 목사안수를 받으면 60세가 넘고, 은퇴까지 얼마 남지 않을 걸 알지만, 포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네덜란드에 흩어져있는 수리남의 후예들 교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깨를 얹고 함께 기도하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더운 여름 대낮이었지만 산들바람이 우리 어깨 위로 지나가는 듯했다. 주님의 축복이 머물렀었다.

1735년 헤른후트에서는 ‘크리스토프 라리쉬’라는 선교사가 두 명의 모라비안 형제들을 데리고 수리남으로 파송되었다. 그는 곧 열대야성 기후와 수많은 어려움을 겪고 죽음에 이르러서 남은 형제들이 돌아왔다. 그러나 1738년에 다시 수리남 선교에 두 번째 파송을 하게 되고, 그곳은 곧 형제 교회가 세워지기에 이른다. 그곳에서 몇몇 가정들은 암스테르담으로 보내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샌드라는 그 후예이다.

나 또한 캐나다의 게일 목사가 복음의 무지였던 한국 땅을 밟아 교회를 세운 곳에, 우리 엄마가 출석하게 되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이며 교회에서 자라다시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여기 헤른후트에서 한국 선교사로 있다가 샌드라를 만난 것이다. 우리는 선교사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이고, 그 선교사의 열매로 서로 다른 민족이 만나 헤른후트 땅에서 함께 기도하고 있으니 우리의 만남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헤른후트 300주년 소식을 여러 사람들에게 미리 알렸다. 17일이 생일인데, 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국 사람이 함께 있으면 덜 외로울 텐데 하는 얕은 생각만 했다. 그런데 프라하에서 일본 사람들을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님 부부가 다른 일을 제쳐두고 한걸음에 달려와 주셨다. 한 2년여만의 만남이었는데 반가움으로 가득했다.

정원에서 커피와 다과를 하고 있었는데, 저녁 7시가 가까워지자 기념행사에 온 세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미국에서 왔다는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일본어로 인사를 했다. 우리가 일본 사람인 줄 알고 유창한 일본어로 대화를 하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그분은 바로 진젠도르프 딸의 직계 후손으로 일본 선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진젠도르프 가의 사람이라는 감탄을 자아냈다.

드디어 7시가 되자, 온 세계 사람들과 함께 나무를 베던 장소로 이동을 했다. 끝도 없는 행렬을 따라 걸어가면서, 우리는 숲에서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드높이 찬양했다. 300여 년을 지켜주신 하나님, 헤른후트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늘 있는 이곳에 모두가 모였으니 축복하소서.

어제는 전야제로 애찬식을 나누었다. 전세계에서 오신 손님들 소개만 하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빵과 찻잔이 모두에게 나누어지는 동안 조금의 소란도 없었다. 우리는 소개하는 모든 내용을 들으면서 내 잔에 채워지는 차를 마시면서 건포도가 들어간 빵 하나를 받아먹었다.

▲ 앙겔라 할머니(사진 오른쪽)와 주기도문을 한국 춤으로 표현했다. ⓒ홍명희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주기도문을 한국 춤으로 표현하겠다고 주최 측의 허락을 미리 받아두었다. 이 춤을 준비하면서, 올해 팔순의 앙겔라 할머니를 초대했다. 한복을 차려 입은 할머니는 생전 처음 교회의 단상에 서신다고 하셨다. 평생 교회의 안내 일을 하고 의자와 방석을 치우던 분이셨다. 그분에게는 오늘이 처음 데뷔하는 날이라, 너무나 긴장하고 계셨다. 나는 그분에게 돌아서서 용기를 주며 힘껏 웃으면서 즐겁게 하자고 하였다.

주기도문의 아름다운 선율 아래 분홍색 두루마기를 입은 할머니와 힘껏 춤을 추었다. 마지막 ‘아멘’에서는 우리 둘이 손을 모았다가, 노래가 끝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힘껏 안아주었다. 너무나 놀라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셨다. 혼자 출 때보다 훨씬 감동이 두 배로 컸다. 한 수리남 여성은 애찬의 예식 가운데에서 혼자 오래도록 기립박수를 쳤다. 나는 300주년에 멀리서 온 친구들도 만났지만, 가까이에 있는 앙겔라 할머니를 새롭게 만났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잊을 수 없는 선물을 하게 되어 기쁘다.

애찬의 예식은 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아쉬운 것은 그 당시에 세족식이 교회 내에서 이루어졌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이렇게 세월이 가면서 잊힌 의식들도 있고, 새롭게 갱신되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변하니, 변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 300년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갈 것일까…. 그 누구도 알 수는 없지만, 진젠도르프 백작이 그랬듯이 늘 변함이 없으신 주님, 어린양이신 그분을 모시는 삶에 초점을 맞추며 사는 것이 중심이 되는 것. 거기에 오늘도 내 삶을 조절한다.

홍명희 선교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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