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국대전》

조선의 건국은 고려 말에 이성계라는 고려의 귀족과 정도전을 필두로 하는 신흥 사대부 계층을 통해 이루어졌다. 고려 말 우왕 시기 신흥 사대부를 대표하는 정도전은 몽골제국의 쇠퇴를 예측하고 신흥 명나라가 중국의 패권을 차지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려 왕실과 귀족들은 몽골 왕실에 기대 있었기 때문에 정도전은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었다. 정도전은 토지개혁이 새로운 체제를 위한 필수적 조건임을 간파하고 모든 토지를 재분배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그는 과전법(科田法)을 주장하였고 이는 개혁 사대부와 이성계의 지지를 포함하여 농민들의 전국적 지지를 얻게 되었다.

조선의 토지제도 균열

조선의 건국 세력이 고려왕조와 유혈 충돌 없이 국가를 세우게 된 것은 이성계의 막강한 군사력도 있었고 무엇보다 토지개혁을 통한 백성들의 지지를 얻은 것이 주효했다고 추측된다. 조선은 모든 토지를 하늘에 속한 것으로 보았고 왕조는 이를 백성들에게 하늘의 뜻을 받들어 용도에 맞게 경작권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게 과전법의 취지인 셈이다.

조선의 체제 성립은 고려의 불교를 타파하는 유교 국가 수립, 안정적 신분제와 사회제도를 수립하는데 집중하였다. 태조부터 《경국대전》이 완성되는 성종 때까지가 조선의 건국기라 할 수 있다. 건국 시기가 지나면 건국 세력과 신흥사대부의 정치 투쟁의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조광조의 죽음은 신흥 사림세력이 건국 훈구세력이 격돌한 사건이었다. 조광조의 죽음 이후에도 사림파는 조광조를 유교적 순교자로 격상하여 구세력과 투쟁을 벌여 명종 대에 이르면 훈구세력이 몰락하고 신흥 사림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동시에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여 붕당의 시초를 이루게 된다.

토지 사유제를 억제하던 조선의 과전법은 명종 시대에 이르러 균열을 일으킨다. 인구가 증가하며 신규 토지의 공급이 필요해지자 조선 정부는 하천이나 해안 신규 토지생산 증가를 위해서 개간 토지의 사유화와 세습을 허용하게 된다. 이를테면 민간 개발이 허용된 셈이었다.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는 개간은 왕족이나 지역의 토호 세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대규모 사업이었으나 이권이 막대하였기에 서해안 지역에 개간이 이루어지는 곳이 많았다.

황해도 해안도 보를 쌓고 흙을 메워 개간한 토지들이 생겨났다. 황해도 해안에서 자라는 갈대로 갓이나 바구니 등 공산품을 만들던 토착민들은 개간된 토지가 사유화됨으로써 토지에서 축출되어 생업이 막막해졌고 이들은 관청에서 항의를 시도해보지만 수용되지 않자 반란 세력으로 전환하였다. 이들의 지도자가 그 유명한 ‘임꺽정’이다.

붕당정치의 불안정과 2백년 가까이 유지하여 오던 토지제도에 균열이 일어나자 조선의 국가 제도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다음 왕 선조가 즉위하자 붕당의 갈등은 고조되었고 경제적 탐욕을 제어할 마땅한 대안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내부적 혼란은 국제 정세에 대한 판단에 미흡하게 대처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전란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전쟁 후 즉위한 광해는 외교적으로는 신흥 강국 청과 전통 동맹국 명나라와 등거리 실용 외교를 펼쳐 국제적 안정을 꾀하는 한편 대동법을 실시하여 세제를 투명하게 개혁하려 하였다. 다양한 물품으로 납세하던 것을 미곡으로 단일한 납세를 하게 하여 세제 개혁을 실시하여 과도한 납세가 이루어지는 것을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대동법은 가구 당 매겨지던 납세를 토지당 세금으로 전환하여 토지 산물에 근거한 세금으로 전환하여 세제의 합리화를 꾀하였으나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들은 대동법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백성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측면에서 대동법에 찬성한 관료들과 양반의 이익을 대표하여 반대한 보수세력의 긴 논쟁이 지속되어 16세기 말에 시작한 대동법은 17세기 말에 가서야 전국적으로 실시될 수 있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가 축출되고 친명파 사대주의 세력인 인조 정권이 수립되어 강력한 반청 대외정책으로 전환하자 명나라와 전쟁을 하던 청나라는 명과의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공하니 이것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 묘사된 것처럼 조선의 정치세력은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였고 다음 대인 효종 때에 북벌론을 내세우며 청과 일전을 준비하지만 조선의 관료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 외에는 북벌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사실만을 보여준다.

실학자들의 등장

다음 세기인 17세기 전 세계가 계몽주의 흐름 속에서 근대화의 과정에 들어서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선각자들이 출현하였고 그들은 실학자라고 불렸다. 공허한 성리학의 담론 체계에서 벗어나 실용 학문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실학이라 불렀다. 실학의 출현은 조선의 사회적 개혁의 전환점이 되었다.

서양의 계몽주의자들처럼 한국의 계몽주의자인 실학자들은 처음 안목의 세계적 확대에 관심이 많았다. 실학자들은 청나라에 도착한 서양의 서적과 문물을 통해 세계적 조류에 눈을 뜨게 되었다. 동서양의 다양한 지식을 모아 백과사전적 서적들이 실학 초기에 다양하게 출간되었다. 조선에 천주교가 정식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천주교는 실학자 내에 논쟁을 일으켰다. 본질적으로 유학자인 실학자들은 천주교를 도입하는 것을 꺼렸고 다수의 실학자들이 천주교를 비판하는 입장에 동참하는 저술을 남겼다. 다만 성호 이익과 같은 극소수의 인물이 천주교가 유교에 뒤지지 않는 윤리와 교훈을 담고 있다고 밝혔을 뿐이다.

병자호란 후에 시작된 실학의 축적된 학문적 역량은 17세기 중반이 되면서 탁월한 연구 성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유형원과 정약용의 저술은 주목할만한 조선의 개혁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었다.

개혁 군주인 정조는 실학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국가 전반의 개혁에 착수하려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몰락한 북인 세력에 대해 보수적 노론과 소론이 관료 집단을 형성하던 것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남인 특히 청년 실학자들을 중용하였다.

정조는 체제공의 감독과 정약용의 시공으로 화성을 건축하였다. 군사적 방어에 최적화된 이 화성은 인구 20만 이상을 수용 가능한 신도시로서 내전 대비와 수도 이전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보였다. 정치적 희생양이었던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으로 이장하고 정기적 방문과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정조의 정치 개혁 의지는 분명해 보였다.

정약용의 스승인 이익은 노비제의 해악을 지적한 인물로 정조 시대 개혁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정약용은 문학을 비롯하여 역사, 지리, 법률, 행정 및 총체적 국가 개혁의 청사진을 그려내었다. 그것은 신분제를 혁파하고 근대적 국가로의 전환 그리고 민족 역사의 회복을 포함하고 있었다.

실학자들의 토지제도 개혁 주장

그중에는 토지제도 개혁에 대한 논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호 이익은 소농의 폐단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한 가구에 1,500평 정도의 농지를 항구적으로 경작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한전제(限田制)를 주장하였다. 유형원은 공전제(公田制)를 주장하였다. 공전제는 토지를 완전 국유화하여 농민들에게 국가가 할당한 토지를 경작하게 하는 일종의 국영 농장제도였다. 이 토지는 사유화할 수 없게 매수와 매각을 금지하여 토지 할당을 공정하게 유지하자는 주장이었다.

정약용의 여전제(閭田制)는 토지를 가구에게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여(閭)라는 40-50 정도의 가구를 한 단위로 묶어 이들에게 토지를 공동 경작, 공동 분배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현대적 방식으로는 협동조합의 토지 공유제와 같은 체제로 러시아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인들이 설립한 키부츠와 유사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토지개혁의 공통적 핵심은 양반 관료와 지역 토호의 토지 수탈로부터 농민을 보호하고 농민의 경작권을 보호하려는 것이 핵심적 요소였다. 그러나 이미 토지 사유화가 일상화되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 이러한 국가 중심의 또는 여전제와 같은 사회적 공동체에 기반한 토지개혁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정약용도 자신의 여전제를 포기하고 후기에 정전제(井田制)로 전환하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였다.

여전제의 중요한 특징은 동시대의 개혁가들이 국유화 중심의 토지개혁을 주장할 때 사회적 공동체를 단위로 하는 것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 제도는 구약성서의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토지 분배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구약에서 각 지파에게 토지를 할당하여 준 것처럼 여(閭)라는 기초 공동체를 경제 행위의 사회적 단위로 구상하였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정약용은 1791년 신해교난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정조의 권유로 천주교를 배교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는 천주교의 영향이 남아있었다. 성리학에서 진리를 의미하는 도(道)라는 철학적 용어 대신에 하늘(天)을 사용하자고 주장하여 유교 철학의 근본을 개혁하려는 것은 인격적 진리인 하늘을 소환하여 공자 시대의 초기 유교로 회귀라는 형식을 띠고 있으나 천주교의 하느님이라는 더 인격적인 진리의 주체에 대한 인식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여전제 역시 기독교와 연관성을 가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종현(전 관동대 교수)  cuch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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