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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세우신 교회, 성(聖)에서 속(俗)으로 가는 공동체(대상 17:3-14; 골 2:11-19; 마 17:1-13)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7월10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7.07 23:16

1. 기독교 신앙의 네 가지 계시 모델

21세기 복음주의 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영국 북아일랜드의 성공회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신학이란 무엇인가?』(복있는사람, 2014)에서 기독교 신학의 ‘계시 모델’ 네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교리로서의 계시 모델’입니다. 이것은 보수주의, 복음주의, 가톨릭의 신 스콜라 학파의 입장입니다. 물론 수정 보완을 거쳤지만,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모델입니다.

그 교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십자가상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을 통해 하나님의 의(義)와 사랑이 계시 되고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통해서만 계시가 행해지는 것으로 믿고, 오늘날에도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계시가 일어나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기초 위에서 교회의 교리·의례·조직·제도가 성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현존으로서의 계시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나’와 너’의 관계론을 펼친 유대 철학자 마틴 부버의 ‘대화적 인격주의’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모델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일방적인 정보 차원의 명제적, 교리적 계시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성의 측면까지 나가야 한다고 보는 모델입니다. 이것은 딱딱한 계시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 19세기 문화개신교의 문을 열었던 ‘슐라이어마허의 경험으로서의 계시 모델’입니다. 근대 해석학의 아버지이기도 한 슐라이어마허는 “경험이 되지 않으면 종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절대 의존의 감정(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자에 대한 감정적 경험을 뜻하는 것입니다. 둘째 계시 모델인 하나님의 현존과 인격성을 경험과 감정의 차원으로 육화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오순절 신앙체험 등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의 차원이며, 우리 교단의 성풍회 역시 이 관점에 놓여 있습니다. 신학과 과학과의 대화를 추구하는 맥그래스는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계시 모델을 자신의 과학적 방법론에 적용합니다. 감정의 경험뿐 아니라, 과학적이고 이성적 경험까지 나가야 하겠죠?

넷째, ‘판넨베르그의 역사로서의 계시 모델’입니다. 역사와 부활을 강조하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계시란 역사를 떠나서는 설명될 수 없고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역사의 맨 끝자락에서 계시가 완성된다고 봅니다. 이간 이성의 보편성과 공적 학문으로서 조직신학을 추구했던 판넨베르크가 이렇게 계시의 피날레를 완성합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성, 신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 경험, 그리고 역사 등으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조직신학에서는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나누기도 합니다. 일반 계시는 로마서의 선언 처럼(롬 1:20), 하나님의 계시가 자연과 같은 비언어적인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특별 계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말씀하셨던 창세기를 비롯한(창 15:4) 많은 구절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음성이나 기록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혹은 대행자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특별 계시로 봅니다.

또한 ‘시대적 계시와 근원적 계시’로 나눕니다. 시대적 계시는 일정한 시대를 위한 계시이고, 근원적 계시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늘 작용하는 원천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의미하는 계시입니다.

사실 계시(revelation)는 어원적으로 ‘나타남’, 또는 ‘드러남’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신의 계시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일차적으로는 시대적 계시겠지요? 근원적 계시는 인간의 해석학적 상황 때문에 시대적 계시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특별 계시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만남을 기초로 신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 경험을 지닌 이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시 체험을 우리는 성(聖), 거룩함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 공동체를 거룩한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거룩함, 곧 성(聖)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곧 속(俗)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서 말씀은 성에서 속으로 가는 것이 제대로 된 교회 공동체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소개합니다. 또한 구약 말씀은 거룩함을 인간이 만드는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집을 세우실 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서신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별됨, 곧 거룩성을 의미하는 할례에 관해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할례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되는 것, 곧 죽어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니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장사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에서 속으로, 영광에서 고난으로 가는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2.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앞서 ‘경험으로서의 계시 모델’을 언급했었죠? 좀 더 구체적으로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는 계시 모델은 기독교 신앙에서는 체험신앙, 혹은 신비체험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성령강림절기가 체험을 강조하는데,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1-4)

▲ 변화산 체험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명의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 위에 올라가셨습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하얘졌습니다. 또한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베드로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신비체험의 황홀경에 빠져 절대 의존의 감정이 표현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에,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는데, 초막절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출애굽을 기념하고 다가올 구원의 날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초막절의 의미를 알고 말한 것이겠죠? 지난주 맥추감사절 때, 이스라엘의 3대 절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칠칠절은 맥추감사주일이고, 초막절은 장막절로 불리며, 영어로는 텐트(Tent)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변화 산상에서 텐트 치고 주님의 구원을 맛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세 본문 말씀의 주제에 비춰보면, 현실 안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복음서는 이 장면에서 베드로가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해설을 덧붙입니다(막 9:6; 눅 9:33). 아무튼 베드로는 이 상태가 좋았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황홀경에 빠진 상태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신비체험입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말씀을 볼까요?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5-8)

신비체험은 ‘보이는 것’만이 아니죠? ‘소리’로도 체험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말씀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의 말’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앞부분으로 가볼까요? 마태복음 16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의 그 유명한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물론 베드로는 이 고백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을 겪고 죽을 것이며,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마 16:21)하십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에 실망하여 만류하죠? 그러다가 책망을 듣습니다(마 16:22-23).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고 죽는 것보다 변화산의 그 황홀한 체험이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는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Listen to Him!”

물론 신비체험은 황홀한 것입니다. 특별히 보는 것도 그렇지요? 그러나 오늘 베드로가 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사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아합왕의 탄압과 우상 숭배에서 이스라엘 민중을 위로한 선지자입니다. 그들과 이야기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들의 사상을 이어받았다는 상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체험은 황홀경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민중을 위하여 고난을 겪고 죽기 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예비 작업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아셨습니다. 따라서 신비체험을 했던 산에서 내려옵니다. 곧 성(聖)에서 속(俗)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마 17:9-13)

그렇습니다. 참된 성의 체험은 고난 받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그랬고, 예수께서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지금 교회 공동체가 그러해야 합니다.

3. 신비주의

중세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당시 신도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소를 사랑하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소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죠? 이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소를 바라보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려고 한다. 소를 사랑하듯 하나님을 사랑하려 한다. 우유와 치즈와 당신이 필요한 것을 얻기 때문에 당신은 소를 사랑한다. 하나님을 외적인 부유함이나 내적인 위로 때문에 사랑하려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옳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필요한 욕구를 사랑하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소개됩니다. 먼저 고대 그리스철학에서는 ‘다자(多者)의 일자(一者)를 향한 연합’이라는 철학적 신비주의(플라톤과 플로티노스)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그리스도를 향한 연합’이라는 성서적 신비주의도 있습니다. 특히 ‘순교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요시하는 초대교회 순교 시대의 신비주의도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 등이 그 예입니다. 이후 교부 시대로 오면, ‘초월적 일자와의 연합’인 오리건의 신비주의도 있고, ‘금욕과 지식을 통한 연합’인 수도원 신비주의도 있습니다. 라틴 시대로 넘어오면, ‘순결을 통한 일자와의 연합’인 라틴 교부의 신비주의가 있고, ‘영혼의 상승을 통한 신 인식’인 어거스틴의 신비주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크하르트의 ‘신성을 향한 돌파와 무화(無化)’인 신비주의가 있습니다.

여기서 에크하르트의 무화를 통한 부정의 길(via negativa)은 영혼의 불꽃을 접촉점으로 신성과 연합, 일치를 향한 긍정의 신학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많은 개신교인은 소를 보듯이 하나님을 봅니다. 무화를 통한 채움의 길이 아니라, 채움을 통해 무(無, nothing, 정말 아무것도 아님)로 돌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망은 채울 수 없기 때문이며 욕망을 채우고자 할 때 우리의 영혼은 허무의 바다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욕망으로 인해 허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우리 안에 ‘영혼의 불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영혼의 불꽃은 순수한 빛이지, 검붉게 타오르는 횃불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흔히 종교적 광신주의와 거룩함을 빙자한 영적 탐심이 발하는 불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신대 명예 교수인 김경재 교수는 영혼의 불꽃에 관해 각각 불교, 기독교의 측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성의 근원적 본래성 그것을 진리자성(眞理自性)이라고 부르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고 부르건, 혹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부르건, 진실로 맘과 영혼이 가난해 짐으로서 그 참모습을 회복하고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도 이렇게 말합니다.

“무심(無心, empty nothingness)이란 그 어떤 애착이나 슬픔이나 명예나 비방이나 악에도 움직여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는 미풍에 전혀 흔들림이 없는 장대한 산과도 같습니다. 아무것에도 영향받지 않는 무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영혼의 불꽃’을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진실로 마음과 영혼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거짓된 욕망을 채우거나 성스러움의 환상 속에만 갇혀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살고, 바로 나 자신이 삽니다. 따라서 구약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이 거룩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4.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올라오게 한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이스라엘 무리와 더불어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사사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고”(대상 17:3-6)

다윗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은 명실상부 정치와 경제,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향목 집에 머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정치와 종교 이데올로기로 이용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그 유명한 다윗 계약입니다.

“또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대상 17:7-8)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을 축복하십니다. 대적을 멸하고, 이름을 드높여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곳을 정해주시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어 정착하여 살도록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들을 심고 그들이 그곳에 거주하면서 다시는 옮겨가지 아니하게 하며 악한 사람들에게 전과 같이 그들을 해치지 못 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또 네 모든 대적으로 네게 복종하게 하리라.”(대상 17:9-10a)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하여금 다윗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때 다윗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시겠다고 합니다.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한 왕조를 세울지라. 네 생명의 연한이 차서 네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인자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아니할 것이며 내가 영원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대상 17:10b-14)

이렇게 하나님의 집을 짓거나, 거룩한 하나님의 성스러움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성스러움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끄실 때 산 위에서 거룩 체험을 하는 것이며, 또한 그곳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산 아래, 곧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바울은 손으로 하는 구약의 할례는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5.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12)

그리스도의 할례는 무엇이죠? 썩어질 육체의 정욕과 옛사람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는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생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다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이렇게 중생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나아가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시킵니다. 십자가가 저 불의한 세력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3-15)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나가야 할 길입니다. 성(聖)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속(俗)으로 향해 가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 안식일이라는 형식적인 율법주의로 거룩함을 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꾸며낸 겸손으로 겸손한 체하는 이들과 거짓된 우상과 소와 같은 맘몬 신, 그리고 헛된 천사 숭배가 거룩함의 본질이 아닙니다. 말씀을 볼까요? 개역개정이 조금 어려워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문제나 명절 지키는 일이나 초생달 축제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아무에게도 비난을 사지 마십시오. 이런 것은 장차 올 것의 상징에 지나지 않고 그 본체는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은 겸손한 체하거나 천사를 숭배하는 자들에게 속아서 여러분이 받을 상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들은 보이는 것에만 정신을 팔고 세속적인 생각으로 헛된 교만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가 아닙니다. 몸 전체는 각 마디와 힘줄을 통하여 영양(營養)을 받으며 서로 연결되어 하느님의 계획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골 2:16-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머리 되시는 주님을 따라 거룩한 산에서 내려와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할례로 썩어질 육체의 정욕과 옛사람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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