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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면성령의 은사와 지금의 교회(고린도전서 12:8-11)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7.10 00:35
▲ 「Mosaic of the Holy Spirit as a Dove at the Musee Pasteur」 (Paris. 19 c.) ⓒGetty Image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이번 주일은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입니다. 보통 성령에 관해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생각할 때, 두 본문이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마음과 관련된 항목들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보여지는 행위에 관한 항목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성령 받았다’라고 말할 때는 오늘 본문이 인용되곤 합니다.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오늘 본문으로 종교적 열광주의에 관한 말씀을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과도한 열광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한국 교회는 상당히 많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과도한 열광주의에 대한 경고는 지금 시대에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를 지나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성령 받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면, 오늘 본문을 떠올리게 됩니다. 또 성령이 주신다는 여러 가지 은사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에는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생각해보며, 우리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

고린도교회는 최소한 4개의 파벌로 나뉘어서 서로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이런 분파 싸움을 멈추기 위해 사도 바울이 적은 편지입니다. 이들이 파벌을 나눴던 기준 중에는 성령의 은사에 관련된 부분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나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 중에서도 방언을 언급하지만, 14장에서 또다시 방언과 예언에 관한 이야기를 추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방언과 예언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방언은 지금 시대에도 존재하고 있고, 예언도 소위 점쟁이라 불리는 이들이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행해졌던 방언과 예언은 무엇인지를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지금 사용하는 의미의 방언이 등장하는 것은 고린도전서뿐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의 다른 책에서 방언이라는 말은 우리말 의미 그대로 ‘사투리’나 ‘다른 지역의 언어’를 뜻합니다. 그 예로 마가복음에 방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한다’라고 하십니다. 이때 ‘새 방언’은 지금 저희가 생각하는 방언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새로운 언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에서 나타난 방언도 각 나라 사람들의 언어를 뜻합니다. 그리고 방언이라는 단어가 또 나오는 곳이 요한계시록인데,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냥 각 나라의 말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나마 저희가 조금 생각해볼만 한 것은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현재 교회들에서 말하는 방언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현재 교회에서 사용되는 방언의 의미를 가진 단어는 오직 고린도전서에만 나옵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의미하며, 사도 바울은 이를 천사의 말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이런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성령의 은사라고만 말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초대교회 전체에서 통용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고 사도 바울의 편지 중에서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만 방언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는 점을 보면, 방언이라는 은사는 고린도교회에서만 성행했거나, 소수의 교회에서만 성행했던 것으로도 보입니다.

방언과 다르게 예언은 구약적인 의미, 히브리어 ‘나바’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달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언을 ‘미래를 미리 고지한다’라는 의미로 더 많이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예언을 뜻하는 헬라어 ‘프로페튜오’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고, 신약성경에는 예언이 전부 ‘프로페튜오’로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적인 의미, 히브리어적인 의미로 예언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예언을 말할 때, 예언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은 미래 예지가 아닙니다. 사람의 허물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예언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법이라고 보면 될 듯합니다.

예언과 방언 중에 고린도교회에서 문제가 된 것은 방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14장에서 다른 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보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즉, 방언을 하는 몇몇 사람들이 방언을 성령의 은사라고 강조하면서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성령을 강조해왔던 지금의 교회들에서도 이루어졌던 모습입니다.

성령의 은사

고린도교회에 속해 있던 일부 파벌이 집중했던 부분은 자신들이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하였던 방언이었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하나의 능력이라 강조하면서 방언하지 못하는 이들을 무시했고,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행동이 고린도교회의 신앙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면 좋았겠지만, 그 결과는 교회의 분열이었습니다. 고린도전후서 어디를 보아도 방언으로 인해 교회가 좋은 교회로 성장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로 인해서 항상 고뇌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12장에 적어놓았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오직 한 가지만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을 보면 성령의 은사로 여러 가지가 나열되어 있는데,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의 분별, 방언, 방언 통역의 은사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과거 한국 교회 안에서도 강조되었던 은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은 8절과 9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 중에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지혜를 얻는 것, 말씀의 지식을 얻는 것도 성령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간혹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신학교에 있는 교수들은 교회의 신앙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이야기하시는 목회자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도 성령의 은사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신학교 교수님들이나 신학자들은 성령 받은 분들이십니다.

더 나아가 9절에서는 성령으로 믿음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성령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우리 중에 믿음이 성령의 은사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믿음은 우리가 열심히 신앙 생활하면서 깊어지고 굳어지는 것이지, 믿음을 성령의 은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서신 여러 곳에서 우리가 믿게 되는 것은 성령으로 인함이라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 보면,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성령의 능력이 있기에 복음이 전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복음이 전해지고 믿게 된 것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교회들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던 성령의 은사 중에서 일부분만을 강조해왔습니다. 심지어 방언은 사도 바울이 경계하라고 말했던 은사입니다. 그런 방언이 교회 안에서 강조되면서 이것이 신앙의 기초라고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은사들, 믿음이나 말씀을 통한 지혜나 지식은 무시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방언의 성경적 근거는 결국 고린도전서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이런 방언을 경계시키고 있음에도, 지금까지의 교회는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의 형태를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에 연결해왔고, 서로 다른 방언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분명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지금의 교회

저는 방언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방언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 형태일 것이고 그 분이 성령을 통해 받은 은사일 것입니다.

교회가 방언이라는 것을 시작하고 강조한 것은 1800년대 후반부터라고 전해집니다. 그 이전까지 방언은 오히려 다른 종교들, 특히 사교에서 유행하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당시 교회들이 방언에, 또한 치유에 집중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행위들이 사람을 흥분시키고 열광시키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교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면서 환상에 빠지는 체험을 전합니다. 이러한 체험들은 사람들에게 괴이한 느낌을 주고, 그 괴이한 느낌을 받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누군가 이런 환상을 보는 것을 본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되길 원하게 되고 그들도 이런 주문을 읊조리게 됩니다.

치유 행위는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아실 겁니다. 목회자가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파헤쳐서 말씀을 전하는 일보다, 강단 앞에서 아픈 사람을 단번에 치유하는 일이 성도들을 모으기에 더욱 효과적이라는 점은 누구나 다 알 겁니다.

그런데 교회가 추구해왔던 이런 은사가 지금 시대에 남겨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코로나 이전부터 조금씩 바뀌어오고 있었지만, 코로나 시대를 경계로 성령을 강조하던 교회들, 교회의 부흥을 이야기하면서 부흥회를 여는 교회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방언을 강조하는 교회의 모습, 아픈 사람을 안수나 안찰로 치유한다는 교회는 이제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은 이런 모습을 사교 집단과 똑같이 봅니다. 광신 집단이라고 말합니다. 과거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왔던 은사와 행동들은 이젠 무지성적이고 비합리적 행위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이기에 우리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성경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 전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들에게는 방언이 필요하기에 방언을 주셨고, 어떤 이들은 믿음이 필요하기에 믿음을 주셨고, 어떤 이들은 지혜를 전하라고 지혜를 주셨습니다. 방언 못 하기에 잘못된 것도 아니고, 방언을 한다고 잘못되지도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은사는 교회가, 또한 성도님들이 유익하게 되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오직 우리가 하나 되고 잘 되도록 이끄십니다. 분열을 만드는 것은 말씀 전체가 아니라 한 가지만 강조해왔던 우리의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판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교회에 독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는 성령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을 간구하시고, 그 성령으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성령을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시대에 교회가 무너져간다고 말하지만, 참된 성령을 간구하는 우리의 모임을 바라보시며, 성령께서 다시 교회를 바르게 일으켜 세우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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