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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블루스: 옥동의 유산“우리들의 블루스 - 이 시끄러운 세상에 푸릉이라는 판타지” 2022 NCCK신학위 <사건과 신학> 6월호 ⑴
이민형(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 | 승인 2022.07.12 23:40
▲ ‘우리들의 블루스’의 ‘옥동’ ⓒ화면 갈무리

노희경 작가의 세상 읽기가 모두 녹아들어간 듯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누군가에게 벅찬 감동을 준만큼 누군가에게는 실망감을 주기도 했고, 누군가에게는 큰 깨달음을 얻게 한 만큼,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마음이 들게도 한 작품이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이야기에는 호소력이 있었고 그만큼의 설득력도 있었다. 다루고 싶은 주제가 무척이나 많았지만, 이 글에서는 단 한 가지의 주제를 중심으로 단 한 명의 등장인물만을 살펴보려 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흔히들 성서에 기록된 구절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 출처는 모호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구절이라고도 하고, 마하트마 간디가 인용한 명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 출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작 이 구절을 마주한 사람은 그것의 실천가능성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번번이 실패하는 자신을 앞에 두고, 잘못한 사람으로부터 잘못을 분리해 낼 수 있는 지혜를 탐구하다보면, 결국 간디조차도 실행에 옮긴 적이 없다는 이 격언은 그저 멋진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그래서일까? C. S. 루이스는 이 구절을 적용함에 있어 범위를 매우 제한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그는 『순전한 기독교』의 “용서” 장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에 있어서만큼은 잘못과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구분하여 대한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르는 잘못이 안타까울지라도 자신을 적절하게 벌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그의 주장은 일면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노골적이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렇게 자신의 잘못을, 아니 잘못을 저지르는 자신을 끊임없이 용납하고 묵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심리적 장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마저 없다면 사람에 따라서는 잘못을 저지르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거나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혐오하는 마음에 자신을 외딴 곳으로 밀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때로 그런 사람을 만난다. 자신이 지은 잘못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그런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미친년이 어떵 미안한 걸 알어. 니 어멍은 미친년이라. 미치지 않고서야 저는 바당 들어가기 무서워 딸년 시켜 죽이고 그래도 살라고 아무나 붙어먹고 자식이 처맞는 걸 보고도 멀뚱멀뚱. 개가 물어뜯을 년. 너 나 죽으면 장례도 치르지 말라. 울지도 말라. 너 누나, 아방 있는 바당에 던져 불라.”

옥동의 저 격한 대사를 듣는 순간 앞서 말한 격언과 C. S. 루이스의 해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녀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옥동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등장하는 제주 노인이다. 그녀는 비슷한 연배의 춘희와 시장에서 채소 등을 팔며 생활한다. 시장 입구에는 옷가지며 생필품 등을 떼다 파는 동석이 좌판을 깔아놓고 장사를 한다. 옥동과 동석은 모자지간이다. 하지만 옥동은 동석에게 좀처럼 말을 건네지 않고, 동석은 그런 옥동을 미움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다. 간혹 둘 사이에 말이라도 오갈새면 동석의 거친 대거리로 마무리가 되는 그런 사이다.

이 둘의 사정은 드라마가 마무리가 될 때까지 묘사된 바가 거의 없어 바라보는 이들은 마냥 안타깝게 이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나마 드라마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동석의 대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렸을 적 아버지와 누이가 죽었고, 그 이후 어머니는 친구네 가정에서 첩살이를 시작했으며,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해 ‘작은 어멍’으로 부르며 자랐고, ‘큰 어멍’의 자식들은 동석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괴롭혔다는 것.

그래서 동석의 마음에는 모가 났고,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풀어지지 않은 채 지금까지 그녀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는 것쯤이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왜 지금껏, 그러니까 옥동이 말기암 판정을 받고 삶을 마감할 날이 멀지 않은 오늘까지도 둘 사이의 앙금을 풀려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굳이 하나를 덧붙이자면, 나이 먹고도 응석받이처럼 구는 아들의 상처를 엄마인 옥동은 왜 품으려 하지 않았나하는 마음까지 든다.

그런데 마지막 회의 한 장면을 가득 메운 옥동의 저 대사는 왜 그녀가 지금껏 그리 살 수밖에 없었는지, 왜 아들의 언저리를 배회할 뿐 마음까지 만져주지 못했는지를 그 어떤 서사보다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자신을 미워하기도 지쳐 체념한 듯 사는 사람이며, 그래서 자신이 상처 준 아들에게는 차마 미안하다는 말조차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에게 화해와 회복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개념일 뿐이다.

기실 노희경 작가의 작품에는 늘 이런 사람들이 등장해 왔다. 사람이나 상황, 사회적 분위기나 편견 등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음에도 상처 받은 자신을 안아주기보다는 자신이 타인에게 준 상처만을 생각하며 자신을 내치려는 사람들 말이다. 이들을 그저 마음이 아픈 사람들로 뭉뚱그릴 수도 있겠지만, 외부로부터 받은 상처를 고통스러워하는 이들과 그 상처를 고스란히 자신에게 전가시켜 자신을 포용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결코 같은 모습일 수 없다. 노희경 작가의 세심한 사람 읽기는 결국 옥동이라는 인물로 귀결되었고, 그녀의 자기혐오가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지는 아들과 화해조차 마무리하지 못한 채 삶을 마치는 옥동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 옥동에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을 전해주었다면, 그것을 적어도 자신에게는 실천할 수 있다는 지혜를 전해주었다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옥동은 조금 더 일찍 동석에게 한글을 가르쳐달라 할 수 있었고, 한 상에서 된장찌개를 나눌 수 있었지 않았을까? 이제는 자기혐오의 속박에서 벗어난 옥동의 육체를 끌어안고 흐느끼는 동석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달리 방법이 없었던 그녀의 삶이 너무나도 안타까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반면교사가 되어 동석은 자신의 과거를 싫어할지언정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 옥동이 동석에게 남긴 유산은 C. S. 루이스가 깨달은 바와 별반 다르지 않는 그 지혜, 즉 자신을 포용하는 그 마음일 테다. 결국 그 마음이 씨앗이 되어 어머니와 하루 반나절의 시간도 보내게 되었고, 된장찌개를 끓여달라고 응석도 부릴 수 있었으니, 부모보다 나은 자식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민형(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  kncc@kn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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