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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주의자들의 중공공산당에서 활약북간도, 동만특위의 반민생단 투쟁 (5)
이이소 | 승인 2022.07.16 00:40
▲ 8.1길돈폭동에서 체포된 가족 분 안위를 염려하는 주제조(朱济朝), 고계필(高桂必) 가족들. ⓒ《동아일보》 1930년 9월 19일자 2면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중공공산당 가입과 투쟁 활동

중공만주성위는 한편으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당원으로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주도와 기획으로 연변 조선인들을 투쟁과 혁명에의 길로 궐기시키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들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을 검증하고 시험하기 위해, 연변조선인들을 계급투쟁의 선봉자로 훈련시키며 혁명에의 열정을 고무시키기 위해 5.1절 시위, “5.30폭동”과 “길돈폭동”을 기획하였다.

1930년 1월 중공만주성위는 연변지구 당조직을 회복하기 위하여 조선인공산당원 왕경을 연변에 파견하였다. 2월에 왕경은 화룡현 달라자에서 중공연변특별지부위원회를 건립하고 서기가 되었다. 연변특별지부는 석건평, 달라자, 남양평, 동량사, 대감자 등 5개 지부를 설치하고 각 현들에 기층조직을 세웠다. 1930년 4월 9일에 중공만주성위는 동북지구 전체 조선족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혁명에 적극 참가할 것을 호소하고 “5.1투쟁행동위원회”를 조직하여 “홍5월투쟁”방안을 제정하였다.

5월 1일에 용정의 400여명 수공업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하고 친일학교를 제외한 모든 조선인학교들이 동맹휴학을 하고 항일시위에 나섰다. 화룡현, 연길현, 왕청현 등지의 수백 명 농민들도 중공공산당의 지도하에 5.1절국제노동절기념모임과 항일시위를 감행하였다. 5월 1일 이후 조선인들의 시위행진이 전 연변에 파급되었다. 화룡현 약수동에서는 600여명의 농민들이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돈화와 액목의 1,500여명의 농민들도 항일집회를 가진 후 친일지주를 처단하고 고리대 계약서와 장부를 불살라버렸다. 이어 토지혁명투쟁을 전개하였다. 농민들이 선전대와 특무대를 조직하여 소작계약문서와 고리대장부를 불태워버렸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1930년 5월에 연변지구의 공산청년회원이 700여명, 농민회원이 3,000여 명이 증가하였다.(1)

조선인 노동자들과 농민의 참여로 5.1절 시위와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중국연변특별지부는 5월 30일을 기회로 대규모 무장폭동을 조직하여 반제반봉건투쟁의 새 역사를 쓰기로 작정하였다. “5.30폭동”은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3일간 전개되었는데 주요 공격대상은 일본영사관 및 그 산하기구와 친일조직 등이었다. 5월 29일  일제 측의 통계에 의하면 폭동으로 지주 가옥 19채, 총독부 보조학당 5개소, 조선인거류민회 사무실 2개소가 불에 탔고 교량 4개, 발전소 1개가 파괴 되였으며 전화선 10여개 곳이 끊어졌으며 이로 인한 손실은 17,500여 엔에 달하였다.

“홍5월투쟁”후 중공연변특별지부는 연변의 농민과 노동자들의 혁명운동을 가 일층 심화시키기 위해 여세를 몰아 8월 1일에 “길돈폭동”을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중순에 중공연변당부에서 파견한 박윤서와 중공만주성위에서 파견한 순시원이 모아산에서 간부연석회의를 열고 “8.1길돈폭동” 총지휘부를 내왔는데 중공길돈임시당부의 책임자 마천목을 총지휘로 임명하고 산하에 행동위원회와 각 지역의 폭동대대를 조직하였다.

8월 1일 새벽에 각 지역의 폭동대원들은 일제히 맡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우선 액목대대의 파괴대가 철교를 파괴하고 전선주를 넘어뜨리고 전화선을 끊어놓아 길림으로부터 교하, 돈화로부터 신참까지의 교통과 전화연결을 차단하여 폭동은 거칠 것이 없이 진행되었다. 돈화대대의 폭동대원을 비롯해서 여러 그룹의 폭동대원들은 병영을 습격하고 무기고에 뛰어들어 총과 탄약을 포획하고 병영에 불을 질렀다. 육군 제7퇀 병영에 들어가서 사격전을 벌이기도 하고 남황니허공안국 제3분주소를 습격하여 경찰에게 부상을 입혔다. 액목습격대는 육군 제7연대 8중대 병영을 습격하여 보총과 탄약을 포획하였으며 15일에는 재차 제8중대 병영을 습격하였다.

“8.1길돈폭동”은 무력폭동의 열풍을 불러일으켜서 혁명의 열기가 도시와 농촌을 휩쓸었다. 8월 3일에 안도현 대전자에서 중공임시당지부가 설립되었다. 당지부는 농민들을 격동시켜 폭동을 일으켰는데 대전자공안국을 습격하여 보총 13자루와 탄알 수백 발을 노획하여 이를 기초로 무장폭동대를 조직하였다.

8월 28일 연길현 수신향의 150여 명의 농민폭동대와 군경들 간에 싸움이 붙게 되자 남구, 오도하, 비암, 구암평 등지의 농민들이 농민폭동대열에 동참하여 대열이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9월 7일에 연길현 세린하, 청지하의 300여 명의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삼도구 충신장의 300여 명의 농민들도 폭동을 일으켰고 이어 안도현 홍도자, 화룡현 회경가, 왕청현, 훈춘현의 농민들도 선후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공공산당의 이입삼의 좌경노선을 따라 폭동으로 반제반봉건혁명의 거센 물결 속에 뛰어 들어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염원하면서 엄청난 고난과 희생을 당하였다. “홍5월투쟁”을 하는 동안에 조선공산주의자들 190여 명이 희생되거나 부상당하였고 3,168명이 체포되어 그중에서 22명이 사형을 당하였다.

“8.1길돈폭동” 후에는 일제와 중국군벌들의 조선인에 탄압이 대폭 강화되어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지역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당국의 통계에 의하면 1930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중국당국에 체포된 사람이 1,412명인데 그중 98명이 희생되었거나 부상을 당하였고 일본 측에 체포되었거나 살해된 조선인은 883명에 달하였다. “1국1당”의 원칙으로 선택의 기로에선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사상성과 열정을 인정받기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투쟁과 폭동에 참여하여 1,000여 명이 넘는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그들의 중공공산당 가입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서기 주동교와 대리 서기 유건장이 체포되면서 와해되었던 연변지구의 중공동만구위는 재건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간부들의 역량으로 조선청년학생들과 노동자와 농민들을 직접 인솔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제고(提高)되었다.

북간도, 동북지구 중공공산당조직의 확장과 중공동만특위 결성

1930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M.L파, 화요파 그리고 서상파가 차례로 해산선언을 하고 중공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공공산당의 일원으로 공산주의 선봉으로서 “홍5월투쟁”과 “8.1길돈폭동”을 통하여 열정과 희생정신, 조직력과 지도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장사폭동 실패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중국공산당 중앙위가 제6기 3중전회에서 이입삼의 좌경노선(2)을 비판, 시정하자 중공만주성위도 5월 투쟁과 8월 폭동의 좌경노선을 비판하고 시정하였다.

1930년의 투쟁과 폭동과정에서 조선공산당원이 중공공산당에 가입함으로서 연변지구의 중공공산당 조직이 순식간에 발전하며 조직이 확장되었다. 1930년 8월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요여원의 주최로 동만 제1차 당원대표대회가 모여 중공연화중심현위(3)를 만들었다. 서기는 왕경, 조직부장에는 마준, 선전부장에는 한별, 군사부장에는 박윤서가 임명되었다. 두 달 사이에 670명의 새 당원이 가입하였는데 그 중 660명이 조선인이었다.

1930년 10월에 중공동만특위가 중공연화중심현위를 토대로 하여 만들어졌다. 서기에는 요여원, 군위서기에는 양림이 임명되었다. 동만특위는 결성이후 각 현위의 공산당 조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동월에 중공왕청현위가 만들어졌다. 훈춘에는 중공공산당 훈춘지부가 1928년에 이미 조직되었으므로 8월에 중공연화중심현위의 지시를 받은 김성도가 중공훈춘구위를  건립하였다.

1931년 8월 중공연화중심현위가 취소되고 중공연길현위와 중공화룡현위로 개편되었다. 중공연길현위의 서기직은 김성도가, 군사부장은 김명균이 맡았다. 중공화룡현위의 서기직은 채수항이 군사부장은 방상범이 청년부장은 전혁이 맡았다. 중공안도현위를 1931년 3월에 세웠으나 외부 세력에 의해 파괴되었고 중공돈화현위도 31년 2월에 당원들 대부분이 지방당국에 체포되어 와해되었다.

중공동만특위는 4개월 사이에 산하에 6개 현위와 19개 구위를 설치하여 조직체계를 확립하며 당원들을 대대적으로 확보하였다. 1930년 봄에 전 동북지구의 중공당원 수는 200여 명뿐이었으나 1931년 3월에 이르러 1,190명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그 중 연변지구의 연길, 화룡, 훈춘, 안도, 왕청 5개현의 당원이 636명으로서 전 동북지구 중공당원 총수의 54.1%를 차지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조선인당원이 96.5%나 되었다. 당시 동만특위의 조선인 당원 중 현 이상의 간부가 18명, 구이상의 간부가 41명인데 그중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소련에서 전투를 지휘한 경험의 군사간부가 9명이었다. 그리고 각급 당 간부 가운데 조선인 여성간부가 14명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5개 현 및 산하 각 구에 농민협회가 있었는데 그 회원 수가 무려 2만 5,000여 명에 달하였다.

조선공산당원들의 가입으로 전화위복을 한 중공만주성위는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은 갈라놓을 수 없다. 만주혁명의 폭발은 우선 조선의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일제의 멸망을 더욱 빨리 촉진하게 될 것이다. … 만주에 있는 140만 조선이민들은 이미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는바 이것은 조선혁명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으로 된다. … 만주당이 조선식민지혁명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소련을 옹호하고 중국혁명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인바 이것은 지금 만주당의 주요한 임무의 하나이다.”(4)고 표명하고 31년 2월, 동만특위 내에 “조선국내공작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미주

(1)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저, 『연변조선족사 상권』 (연변인민출판사, 2011), 186.

(2) 이입삼노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대규모 도시폭동을 조장하는 도시 중심의 혁명 전략을 말한다. “홍5월투쟁”과 “8.1길돈폭동”은 이입삼 노선에 근거한 도시폭동으로 많은 조선인들을 희생과 죽음으로 몰아갔다.

(3) 중공연화중심현위는 연길현과 화룡현을 하나로 묶어서 두 현의 공산당의 조직을 결성, 지도, 감독하는 상부기관으로 만들어졌다.

(4)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상권』 (연변인민출판사, 2009),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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