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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창조 이야기, 그럼에도 같은 선율에덴의 기억 ⑴
박종현(전 관동대 교수) | 승인 2022.07.17 14:25
▲ Lucas Cranach, 「Adam and Eve」 (1530) ⓒWikipedia

한 처음 이야기

구약성경의 첫 이야기는 세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조성되는 세계의 이야기와 네 강의 발원지에서 시작되는 에덴동산 이야기이다. 이 두 이야기는 대부분 문화에 흔히 있는 기원 설화와 비슷하다. 대부분의 고대 부족들은 세계의 기원 설화와 국가 형성된 후에는 국가의 기원 설화가 있다. 이 기원 설화들은 고대 부족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탐구한 이야기들이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세계와 인간의 기원을 이야기를 통해 그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

창세기 1장부터 2장 3절까지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생명 세계에 관한 것이다. 후에 서양의 기독교 세계는 생명이라는 것에서 전환하여 존재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사유하고 탐구함으로써 추상적이고 때로는 기계적인 세계관을 조성하였다. 반면 성경의 원래 이야기의 전개는 영이신 하느님이 하늘과 땅과 바다를 구분하고 거기에 생명이 소성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고 식물과 동물과 사람을 만드셨다는 이야기이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그의 주저 『철학』(1·2·3 [아카넷, 2019])에서 철학의 근본 과제를 세계의 구성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사유와 언어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가를 철학의 근본 과제로 보았다. 그런데 2020년 신예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열린책들, 2017)에서 인간은 사유와 언어로 세계를 최종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18세기 임마누엘 칸트가 적시한 것처럼 인간은 인식의 대상으로서 사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고 다만 인간의 고유한 인식의 형식에 따라 대상을 제한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이후 지성의 탐구 결과였다.

최근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이러한 세계 인식에 대해서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쌤앤파커스, 2018)라는 저술을 통해서 과학적으로도 실재에 대한 접근의 제한성을 지적하였다. 영국의 신실재론자를 포함하여 21세기 인식론은 실재에 대한 인식의 제한성을 고백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20세기 초 유럽의 칼 바르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신인식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숨어계신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인간은 하느님을 수동적으로 알아 갈 수 있다고 하였다. 반면 보수적인 미국의 복음주의는 상식철학에 근거하여 인간의 상식으로 진리를 인식하고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인간의 지식의 한계 안에서 언어로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생산하거나 가공하는 자이다.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모든 우주의 통치자 왕이신 하느님뿐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위임한다.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차지하고 바다와 공중과 땅위의 생명을 다스리도록 위임받았다. 인간은 신성한 세계를 위임받아 신성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하도록 위임받았고 땅을 정복하는 것은 인간에게 위임된 영역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태초의 기원을 언어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요한복음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요한복음의 서막은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고 그 로고스를 통해 만물이 만들어졌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언어로 만물을 창조하고 생명과 질서를 부여하는 창조주의 능력을 국가와 종교 제도 그리고 인간의 제도로 환유하려는 시도가 오랫동안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치근에 와서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보이지 않은 하느님의 위엄을 인간의 제도가 위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권위의 오용을 반드시 일으켜 기독교 문명의 배타적이고 독선적 구조를 만들어 내는 부작용을 일으켰다. 국가이든 종교 제도이든 그의 언어가 갖는 지배력의 근거를 하느님의 창조에서 끌어내는 것은 하느님만이 만물에 생명을 주시고 만물을 일으키신다는 창세기 1장의 의도를 왜곡하고 벗어나는 행위이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 19로 인한 생태계의 경고가 현존하는 인류 세계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지난 3세기 동안 진행된 세계체제는 자본주의, 기술문명을 형식적 민주주의와 결합하여 기후위기라는 인류 멸종의 위기로 다가 왔다.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의 결합은 화폐 이윤을 위해서 하늘과 땅과 바다를 오염하고 파괴하였다. 이윤 극대화를 위한 저가의 생산 비용을 위해서 제1세계, 개발도상국, 제3 세계로 구분된 하청 구조는 현대문명이 자연을 착취할 뿐 아니라 인간 또한 착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 문명은 스스로 가장 선진화된 문명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기독교 문명의 담론에 내장된 은밀한 구조는 하느님의 자리에 인간 권력, 자본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은 창조된 세계의 신성함을 보여준다. 그 신성함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에게 위임된 의무이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저변에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은폐하고 그 창조주의 왕위에 올라간 인간을 보여준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세계는 생명의 세계이고 또 안식 즉 평화의 세계이다. 2022년을 평화의 시대라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코로나가 잦아들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라시아 세력과 서방 세력의 패권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범인류적 위기라는 기후 위기 속에서 막 전염병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지금 대립으로 나아가는 서방의 미국과 유럽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모두 복음주의, 가톨릭과 루터파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라는 기독교 전통을 가진 국가들이다.

에덴

요한복음의 영원한 로고스라는 신학적 주제는 공관복음서의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기독론보다 훨씬 후대의 기록임을 보여준다. 신학적 주제로서 로고스는 공관복음서의 주제들보다 더 추상적이고 더 신학화되어 있기에 사상적으로 더 세련되어 보인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가 2-3장의 이야기보다 후대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온 우주의 창조 그리고 태초라는 고도로 철학화된 시간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창세기 1장은 국가 권력이 강화되고 언어로 권력의 지배가 가능하게 된 시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명이 후대로 올수록 권력은 직접적 무력에 의존하던 것이 사상과 언어에 의한 지배 질서로 이행하여 왔기 때문이다. 창세기 기자는 군주들의 권력이 언어적 지배로 확립되던 시기에 만물의 질서와 생명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는 체제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성을 선언하는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2장 4절부터 두 번째 태초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1장의 이야기처럼 조직적으로 세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태초와 우주라는 인간의 사유할 수 있는 가장 넓고 긴 시간의 범주를 창조의 범위로 선택한 1장과 달리 2-3장은 중동의 한 지역을 상정한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 나무와 풀이 자라기 전에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셨다. 이 축축해진 땅의 흙으로 하느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해가 떠오르는 방향인 동쪽에 에덴동산을 일구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에덴에는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가득 자랐다. 동산의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심겨 있었다. 에덴은 네 강의 발원지이다. 그 강의 이름은 비손, 기혼, 티그리스, 그리고 네 번째 강의 이름이 유프라테스 강이다.

미국의 유명한 디스커버리 채널은 네 강의 발원지인 에덴을 찾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바 있다. 네 강의 발원지인 이곳은 이란과 튀르키예(옛 ‘터키’의 현재 명칭) 국경으로 티그리스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올라가면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하여야 한다. 그 영상에는 많은 만년설로 덮인 산들을 지나고 지나 아담한 분지에 에덴이라는 여겨지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현재 동산은 아니었다. 이미 현대식 아파트가 들어선 이란의 지방 소도시였다.

창세기 1장의 이야기처럼 에덴동산 이야기에서도 하느님은 사람에게 에덴을 돌보는 일을 시키신다. 그리고 동일하게 사람에게 동산의 나무의 열매들을 먹도록 허락하신다. 1장과 다른 이야기는 여기부터 시작된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되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으면 사람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배필을 만들기로 하신다. 그에 앞서 사람은 하느님이 만드신 들의 짐승과 공중의 새들의 이름을 붙인다. 여기서 언어는 만물을 창조하거나 지배하는 능력이 아니라. 만물을 지시하는 본래적 기능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느님은 남자가 깊이 잠들게 하고, 그 사이에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여자를 만드셨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으므로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창세기 2-3장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의 손으로 에덴동산을 일구셨고 젖은 흙으로 남자를 만드셨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다. 1장에서 말씀으로 만드신 것과 달리 손으로 만드셨다.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이 금지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수치심을 느껴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입었을 때도 하느님은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남자와 여자에게 입히셨다.

박종현(전 관동대 교수)  cuch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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