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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주체, 새로운 질서 새로운 시대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며(로마서 6:3~11)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2.07.27 00:00

모든 성서본문은 그 맥락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의미를 맥락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본문말씀을 마주하면서 그 점을 더더욱 실감합니다. 특히 자신의 생각을 한 통의 편지로 쭉 써내려간 로마서의 성격상 그 전후맥락은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말씀만으로 한정해서는 그 뜻을 충분히 헤아리기 어렵기에, 새삼 환기하는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죄의 보편성과 동시에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죄에 굴레에 매여 있고 따라서 죽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나 동시에 그 굴레를 벗고 다시 살아나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를 어떤 맥락에서 말한 것일까요?

이 이야기는 사도 바울이 바라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 아니 인간 삶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에 매여 있는 현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예수님과는 다른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죄인 취급받는 사람들을 보고 거꾸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라 선언하지 않습니까? 이에 반해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와전시켜 버린 걸까요? 죄와 구원을 강조하는 교리가 사실상 바울에게서 비롯되었고, 교회가 그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사람들을 속박해해 온 역사와 현실을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의 해방의 복음을 왜곡시킨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사람들이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도록 하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한 것은, 따라서 모든 사람은 죄의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죄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병 주고 약 주고’ 한 셈일까요? 아닙니다. 아닌 죄인을 죄인이라 선언해놓고 죄인의 굴레를 벗을 수 있다고 강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정말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죄인이라 선언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실제로 죄의 통치를 받고 있으며 죄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 하면 법률적 의미에서 범죄자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죄인’은 법률적인 의미의 죄인은 분명히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어찌할 도리 없이 매여 있는 현실을 두고 모든 사람이 죄의 통치를 받고 있으며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유를 누리고 싶지만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입니다.

과연 우리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정말 자유롭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습니까?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뭔가 어떤 구실이 있어 선한 의지를 펼치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봉착합니다. 바로 바울이 말한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현실을 두고 한 말입니다.

몇 주 전에도 언급했지만,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죄와 책임의 차원을 네 가지로 나누기도 했습니다. 법적 죄, 정치적 죄, 도덕적 죄, 그리고 형이상학적 죄와 그 책임입니다. 인간이 여러 차원에서 어떤 잘못을 범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동시에 그에 대해 책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통찰입니다. 인간 삶의 실존을 깊이 통찰한 결과라고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대 삶의 조건 가운데서 인간이 죄에 매인 현실을 심각하게 느꼈습니다.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느낀 사연이 무엇이었을까요?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 두 가지 차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1세기 중엽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서 변두리 인생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전할 당시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지 로마에서 시민권도 없이 살아간 이들 대부분은 육체노동을 하며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함께 한 이방인들 역시 당시 사회에서는 주변적인 부류였습니다. 실제 노예 신분이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죄의 통치를 받고 있고 그 죄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요지부동한 것처럼 보이는 로마제국, 인간의 제국 그 질서 안에서 겪고 있는 현실이 바로 죄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요 죄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에게서 ‘죄의 노예’란 곧 ‘죄의 세력’에 붙잡힌 상태입니다(6:6~7). 바울이 문제시하고 있는 죄가 마음이나 개인적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체제의 문제라는 것을 말합니다.

죄의 현실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한편의 문제는 당대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입니다. 예수님 당시와 사도 바울 당시 객관적 조건이 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유대사회’라는 조건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점에서는 다르지 않지만 예수님의 삶을 직접 공유했던 사람들과 그 이후 세대는 주체적 조건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과 직접 삶을 공유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유훈을 환기하고 그것을 따르는 것으로 바른 길에 있으며 구원을 누리는 생명의 길에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 God Orders Noah to Leave the Ark, Cappella Palatina di Palermo, from Art in the Christian Tradition, a project of the Vanderbilt Divinity Library, Nashville, Tenn.

반면 그 이후 세대는, 훌륭한 삶을 살았지만 바로 그 삶 때문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분의 그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지 않고서는 예수의 길을 따르기 쉽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고심한 대목입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구원의 의미를 지닌 사건이라는 것을 납득시켜야 했습니다. 특별히 죽음의 의미를 납득시켜야만 했습니다. 이로부터 죄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을 역설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6:8) 죄의 보편성과 구원의 보편성을 함축하는 말씀은 바로 그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핵심이자 사실상 결론에 이르기 위해 사도 바울은 먼저 세례의 의미를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입문의식으로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현실을 반증합니다. 당대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연합하는 것으로서 세례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죽음의 일치입니다.

고난을 함께 한다는 의미, 곧 고난의 연대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바울은 훨씬 심각합니다. 죽음의 일치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이른바 대속론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 대속론의 논리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말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이 대목은 그 개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에 이른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죽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 의미는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일치하여야 한다면, 그 죽음의 의미를 헤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세상의 부조리, 세상의 죄성을 온전하게 드러내 보여준 사건입니다. 온전하게 사랑의 삶을 사셨던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음에 이른 사건은 정반대로 그와 완전히 대비되는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냅니다. 십자가가 온전한 삶을 사셨던 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라면, 오히려 그 사건은 세상 자체, 그 세상 가운데 한 몫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죽음을 뜻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삶의 체제와 그 체제 안에서의 삶이 허망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무고한 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상의 삶은 죽음과 다르지 않은 삶입니다. 그 삶의 허망함, 그 삶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진실을 드러낸 십자가 사건은 그 삶의 파탄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하나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이미 죽음과 같은 삶을 청산하는 것을 뜻합니다. 불교적 용어로 말하면 멸집(滅執), 곧 자신의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르고 그 삶의 질서를 형성해가는 것을 뜻합니다.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 생명을 살리는 삶을 따르는 것이요 그 삶을 보장하는 세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개벽이요 진정한 혁명이며, 그것이 곧 부활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이 말씀은 그 진실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죽음과 부활의 역동적인 양면 관계를 말하면서 동시에 미묘한 긴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6:10~11)

죽음은 과거요, 부활은 현재입니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언급한 대목은 더욱 극적입니다. “단번에 죽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단박에 끝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철저하고 근본적인 실현을 뜻합니다. 한 순간에 삶과 죽음의 의미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에 부활의 생명은 지속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부활 생명과의 일치는 지속되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단절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바로 지금 지속되는 삶의 여정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역설하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을 뜻하는지 다시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리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인간 삶을 실로 진솔하고 깊이 있게, 역동적으로 파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정한 생명의 길에 접어들었지만, 그것은 다시는 죄의 세력에 매이지 않으려는 부단한 삶의 지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대 사람들이 매여 있는 삶의 현실 가운데서 생동감 있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분별하고 진정한 삶의 길을 역설한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성서를 읽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오늘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죄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달아 그 죽음의 길을 청산하고 진정한 삶의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전지전능한 물신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갈아 넣어 이윤을 위한 상품으로 재탄생시키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일상의 삶에서는 연대와 공존보다는 능력에 따른 경쟁과 효율을 신봉하게 만들고,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봉사해야 할 국가의 공공성마저도 공공연하게 무력화시킵니다.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작업 환경에서 20년 넘게 숙련공으로 일하면서도 최저임금을 넘길까 말까하는 수준의 급여를 받고 산 노동자들이 고공에 올라 스스로를 가두며 “이대로 살 수 없지 않습니까?”를 외쳐야 하는 현실입니다. 이 숨 막히는 질서를 끝내지 않고는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생명의 길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숨 막히는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대열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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