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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세우신 교회, 믿음으로 대동세상(大同世上)을 여는 공동체(사 47:1-11 히 11:1-12 마 20:1-16)성령강림 후 아홉째 주일(8월7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8.05 00:39

1. 천국은 포도원 집 주인과 같으니!

무더위와 함께 불같은 성령강림절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 후 일곱째주일 말씀부터 영생, 곧 천국에 관한 말씀이 이어지는데, 계속해서 오늘 세 본문 말씀도 역시 하나님 나라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대동세상(大同世上)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동세상은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뜻합니다. 세 본문 말씀은 믿음으로 이러한 함께 어울리는 평등 세상을 만들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며 영생은 거기서 시작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은 대동세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과 그 주인의 마음 씀씀이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늘 구원과 더불어 심판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따라서 구약의 말씀은 대동세상과 반대되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모습을 통하여 심판받는 세상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있습니다. 믿음으로 평등공동체를 이루어 대동세상을 여느냐, 아니면 교만하여 차별과 혐오의 불의한 세상을 만드느냐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대동세상의 길, 곧 영생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갔으며 불의한 이들은 혐오와 차별로 그 대동세상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따라서 서신서 말씀은 믿음에 관해 소개합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는 믿음으로 대동세상을 여는 공동체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 천국은 마치 포도원 집주인과 같으니!

오늘 말씀은 천국을,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으로 비유합니다. 천국을 ‘장소’가 아니라, 집주인이라는 ‘사람’으로 비유한 것이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집주인의 ‘마음 씀씀이’입니다. 그 마음 씀씀이가 바로 천국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 집주인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육 시와 제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하고, 제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마 20:1-7)

포도원 집주인은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 오후 12시, 3시, 그리고 일과가 끝나가는 오후 5시에도 장터에 있는 사람을 품꾼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품삯은 늦게 온 사람들부터 지급하는데, 처음 온 사람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로마의 은전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을 주게 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 20:8-12)

그러자 먼저 온 자들이 더 받을 줄 알았는데, 같은 한 데나리온을 받자, 집주인을 원망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처음 계약한 내용을 들려주며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같이 주는 것이 자기 뜻이라고 말합니다.

“주인이 그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3-16)

물론 이것은 일찍 와서 열심히, 그리고 많은 일을 한 사람이 더 많이 받는 공로주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인 차원에서 보면, 일자리가 없는 사람을 구하며,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한 데나리온을 주어 평등 세상을 추구하는 말씀입니다. 대동세상의 시작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 시작을 코로나 위기 때 맛보았습니다. 바로 기본소득(시민소득이라는 말이 좀 더 부드럽게 들립니다만)입니다. 물론 소득주도성장도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포도원 집주인의 마음을 반영한 정책이었습니다. 대동세상의 공정한 경제로 가는 길은 기본소득과 소득주도성장인 것입니다.

2. 대동세상의 공정한 경제로 가는 길 1: 기본소득(시민소득)

지금은 조금 논의가 시들해졌지만, 다가올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로봇 시대에는 기본소득이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증강현실, 가상현실 등의 첨단 기술 등을 통해 세상은 새로운 플랫폼과 차원으로 변할 것입니다. 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대다수 사람은 변화된 세상을 따라잡지 못해 도태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소득주도성장과 기본소득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대동세상을 여는 가장 기본적인 대안입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짓말: 과도한 열풍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북바이북, 2017)은 이렇게 대안을 제시합니다.

“4차 산업혁명이 한 사람이 백만 명을 먹여 살리는 세상을 초래한다면, 그 한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보다, 그런 미래를 막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현재와 같이 아무런 비판 없이 공격적으로 기술이 개발되는 상황에서 일자리가 없어지는 속도는 너무 빠르고, 새로운 기술들은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과 광범위한 영향력을 갖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제 2의 스티브 잡스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통제, 견인, 선도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이다.”

기본소득의 원래 의미는 ‘정치 공동체가 심사와 노동 요구 없이 모든 개인에게 주기적으로 무조건 지급하는 현금’, 혹은 ‘자격 심사 없이 모든 사람에게, 개인 단위로, 노동 요구 없이 무조건 전달되는 정기적인 현금 지급’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러한 측면에서, 한 데나리온씩을 계약하고, 품꾼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평하는 일꾼들을 뒤로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두에게 현금을 지급한 포도원 주인의 이러한 기본소득 정책이 바로 천국이라고 오늘 복음서 말씀은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루치 일당을 공정하게 나누어 주는 것은 바로 구약의 만나와 메추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 바로 천국이라고 합니다. 영생의 문입니다. 이렇게 경제적인 위기 없이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대동세상이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3. 대동세상의 공정한 경제로 가는 길 2: 소득주도성장

▲ 소득주도성장에 관한 내용(국민 여론은 2018년 조사)

서울사회경제연구소가 출판한 『공정한 경제로 가는 길』(한울아카데미, 2018)은 2018년 5월 창립 25주년을 기념한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을 책으로 묶은 것입니다. 「소득주도성장론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이라는 논문에서 주상영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경제의 현실과 발전 단계를 감안할 때, 소득주도성장론을 장기침체 예방을 위한 구조적 총수요 확대 전략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앞에서 일본의 예를 들었지만, 인구의 정체·감소가 총수요 감소 요인으로 작용할 것임에 틀림없다. 저성장 시대에 돌입할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득주도성장은 장기침체 예방을 위한 성장 방어 전략이 되어야 한다.”

소득주도성장론은 ‘가계소득 증대를 통해 소비와 투자를 촉진시켜 경제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경제성장이론입니다. ‘임금주도성장론’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수출·대기업 중심의 성장론(‘임금을 낮추고 기업의 이윤을 높임으로써 투자와 수출을 촉진해 경제 성장을 하자’)과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소득 주도 성장론의 핵심은 임금을 중심으로 가계소득을 늘리면 소비증가와 투자 확대가 이어져 경제 성장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저임금 인상이 그 정책의 일환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제노동기구(ILO)가 2010년경부터 제안한 성장 이론입니다. 소득 불평등에 주목한 성장 담론이죠.

2012년에 나온 「임금주도성장: 개념과 이론, 정책」 보고서에서 국제노동기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업)이익이 주도하는 성장 체제가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임금주도성장은 신자유주의의 이익주도성장을 대체할 수 있는 성장론이다.”

놀라운 것은 보수 성향의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소득주도성장론을 거들고 있습니다. 2014년 12월 9일 발표한 보고서 「소득 불평등이 경제성장에 끼치는 영향」에서 OECD는 이렇게 말합니다. “소득 불평등 해소가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소득 불평등이 심각할수록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성장률이 떨어진다. 소득 불평등이 단일 변수로는 성장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이다.”

최고 임금과 최저임금의 차이가 너무 큽니다. 소득 불평등이죠? 포도원 주인이 보면 기가 막힐 일입니다. 2016년 6월,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이러한 불공평을 지적하면서 한국식 ‘살찐 고양이법’을 발의했습니다. 이 법안은 2013년 스위스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기업 내 최고임금을 최저임금의 12배로 제한하는 법안입니다. 스위스는 국민투표에 부쳐졌지만 결과는 부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영진이 퇴직 때, 거액의 보너스를 받지 못하게 하는 법안이 함께 발의돼 가결됐습니다. 2015년 유럽연합 역시 은행 임원의 보너스가 급여의 2배를 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2012년 프랑스는 공기업의 최고 임금이 최저임금의 20배를 넘을 수 없도록 법으로 못을 박았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근래 경영자들의 도덕적 해이와 소득 양극화가 그만큼 심각해졌음을 보여줍니다.

▲ 살찐 고양이법 내용과 찬반

아무튼 심상정 의원의 법안은 지금도 국회에서 처리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법안의 핵심 내용을 보면, ‘최고임금법’은 민간기업 임원의 임금을 최저 임금의 30배 이내로 제한하고, ‘공공기관운영에 관한 법률(공운법)’ 개정안으로 공공기관 임원 임금을 최저임금의 10배 이내로 제한한다 등입니다. 한 마디로 “고양이의 살을 빼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의된 이후 아직 국회에서 잠을 자고 있는 살찐 고양이법! 법안 통과 여부도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과연 뚱뚱한 고양이가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먹이를 함께 나누는 대동세상이 올까요?

이러한 살찐 고양이법과 동시에 저임금 근로자의 소득을 끌어올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소득주도 성장입니다. 2014년 4월 IMF의 조너선 오스트리 박사(IMF 조사국 부국장)도 「재분배와 불평등, 성장」이라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유층에 소득이 집중되는 현상은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경제 성장도 가로막고 있다. 정부의 재분배 정책이 성장 잠재력을 훼손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불평등 축소를 위한 재분배 정책은 고성장과 더 긴 성장 지속력을 가져온다.” 2016년 4월에 오스트리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수요가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경제 성장을 위해) 소득 재분배, 임금 상승 등 수요를 진작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사실 주류 경제학은, 불평등은 성장의 촉매제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불평등’이 ‘경쟁’을 유발하고, 경쟁 심화가 ‘성장’을 자극한다는 논리입니다. 지금도 그렇죠? 보수 언론과 여당, 재벌 대기업은 불평등에 기초한 이러한 논리를 폅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불평등이 심해지자, 기업이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사줄 소비자(수요)가 없어 저성장 기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코로나 위기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에너지 위기, 식량 위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보다 더 심각하죠? 당시 오스트리 박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소득층은 고소득층보다 소득 대비 소비 비율이 높다. 소득이나 부를 고소득층에서 저소득층으로 재분배하면 전체적으로 수요를 진작할 수 있다.”

외환위기 때 구제금융 실행 계획을 진두지휘해 우리에게는 ‘저승사자’라고 불린 데이비드 립튼 IMF 부총재도 이렇게 말합니다. “수십 년간 각국의 사례를 봤을 때 불평등이 심화되는 나라는 성장이 둔화하고, 평등한 나라는 성장이 빠른 것을 볼 수 있다. 정부가 소득재분배 정책에 나설 필요가 있다.”

립튼 부총재는 한국에 대해서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소득불평등이 점점 커지면서 중산층이 줄어들고 있다. 재분배 정책으로 중산층을 재건해야 한다.” 이러한 소득 재분배와 함께 임금 인상이 수요 진작을 위한 수단으로 떠올랐던 것입니다. 주상영 교수의 말입니다.

“소득주도성장은 분배를 소홀히 하면서 지속 성장을 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 당장 공급보다 수요부족이 상대적으로 더 큰 문제인데다 인구 감소 시대가 닥쳐오고 있다는 점에서 예리한 통찰을 담은 답안일 수 있다.”

대동세상은 이렇게 기본소득과 소득주도성장을 통해 재분배 정책과 임금 인상 정책이 효과적으로 발휘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지난 정부 때 보수 언론과 정당, 재벌 대기업의 거센 저항을 맞고 꽃을 피워보지 못한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현 정부에서 다시 부활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때 대동세상은 열릴 것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죠? 지난주 말씀처럼, 부자 청년이 탐욕과 소유욕 때문에 영생의 길을 포기한 것처럼, 오늘 우리는 죄로 인해 탐욕의 길을 갑니다. 그 결국은 심판입니다. 따라서 구약 말씀은 우리보다 먼저 그 탐욕의 길을 간 나라의 멸망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4.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 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우리의 구원자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사 47:1-4)

오늘 구약 본문 이사야 47장 말씀은 바벨론과 여러 우상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고 멸망할 것을 언급하는 말씀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는 말처럼, 먼저 되었으나, 나중 된 자들의 모습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반복되는 구절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말씀이라고 했죠? 심판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이유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여주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 전에 내가 내 백성에게 노하여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사 47:5-8)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에게 넘겨주었는데, 바벨론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모르고, 사치하고 오만하여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라고 교만하였습니다. 대동세상을 이뤄야 하는데,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멍에를 심히 무겁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심판하십니다. 악을 의지하고 교만한 자의 마지막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한 날에 갑자기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사 47:9-11)

5. 믿음으로 대동세상을 여는 아름다움 교회 공동체!

우리는 앞서 복음서 말씀을 통해 포도원 주인의 마음과 같은 포도원이라는 대동세상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구약 말씀을 통해 대동세상과 반대되는 세상을 바벨론의 교만한 모습을 통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영생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갑니다. 그러나 불의한 이들은 오만하여 그 대동세상을 무너뜨립니다. 따라서 마지막 말씀인 서신서 말씀은 믿음에 관해서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물론 이 믿음은 하나님께 드리는 아벨의 더 나은 제사,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는 노아의 순종, 하나님을 믿음으로 죽음을 극복한 에녹의 소망,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고향을 떠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나아가는 아브라함의 도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사라의 믿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모두 대동세상을 향한 순종과 소망, 그리고 도전과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사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는 대동세상을 열되, 그 시작은 예배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믿음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히브리서 11장 본문 말씀을 볼까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믿음의 대명제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과 역사적 증거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조상들의 예를 소개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4-5)

아벨과 에녹을 소개했죠? 노아와 아브라함을 계속해서 소개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7-10)

믿음의 선조 가운데, 여성인 사라도 소개합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1-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대동세상을 열어야 합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대동세상을 여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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