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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선교와 그 신학적 배경기독교 선교의 본질과 과제 ⑷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2.08.09 16:33
▲ 엑스플로74의 모습이다. 이듬해인 1974년에는 세계기독교 대회인 ‘엑스플로74’가 8월 13일부터 5박 6일 일정으로 열렸다. 국내 모든 기독교 교파가 모인 것은 물론 전 세계 82개국에서 3,039명의 외국인을 포함해 30만여 명의 전도 요원들이 여의도에 천막을 치고 합숙을 하며 행사가 진행됐다. 방문 신도만 첫날 130만을 비롯해 연인원 665만 명이 운집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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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선교는 초기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선교사들의 활동은 선교, 교육, 의료 영역에서 이루어졌지만 이들의 신학적 태도는 회심과 가시적 교회의 설립을 지향하는 경건주의, 근본주의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들은 한국교회에 걸 맞는 한국 교역자 양성이라는 목표 아래 대중목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을 주입하는 신학교육을 실시했고 교회의 비정치화와 구령운동을 선교정책으로 채택했다.

초기의 이런 선교신학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는 길선주(1869-1935)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새벽기도’, ‘성서 무오설’, ‘말세론’ 등 오늘의 한국교회의 성격을 크게 규정하는 전통을 만들어 낸 인물이기도 한 길선주는 보수적 근본주의 선교신학의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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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우리 민중의 주체적인 신앙고백의 빛에서 역사를 보면 이 시기 선교사들의 신학과는 다르게 전개된 한국교회의 선교신학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거한 진보적 사회참여 운동을 실천한 윤치호(1864-1945), 한국의 전통종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을 추구한 최병헌(1858-1927) 등이 이 시기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와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선교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선교신학은 선교초기부터 이미 큰 틀에서 ‘영혼구원’과 ‘민족구원’,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근본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상호 대립적, 때로는 상호 보충적으로 서로 영향을 끼치며 받아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대립과 갈등은 1940년대에 이르러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장로교 총회에서 성서의 고등비판과 자유주의 신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논란이 그것이다. 한 편으로 성서 무오설과 성서 축자영감설을 정통신학의 유일한 척도로 삼은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자인 장로교의 박형룡과 감리교의 변홍규, 다른 한 편으로 모세의 창세기 저작설을 부인했다고 비난받은 김영주, 성서의 여성관을 비판했다고 제소 당한 김춘배, 성서의 자유주의적 실존적 이해를 추구한 정경옥, 사회적 역사적 성서이해를 기초로 참여적 신학의 길을 닦은 김재준 등이 이런 대립의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 신학적 논쟁은 주로 성서이해를 둘러싸고 전개된 것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아직 일제의 식민지배가 강화되고 있었다. 1937년의 중일전쟁, 조선어 폐지와 1938년의 신사참배강요와 장로교신학교 폐교, 194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폐간, 창씨개명, 1941년 태평양전쟁 시작, 1942년 성결교, 안식교, 침례교 등의 해산과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의 추방 등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지만 당시 한국 신학계는 세계를 향해 주목할 만한 선교 신학적 성찰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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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4,19 학생혁명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는 이른바 ‘한국교회의 바벨론 포로기’를 겪었는데, 이승만 정권에 대한 무비판적인 순응과 반공, 친미주의적 태도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시기에는 한국교회 내부적 분열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일제 시대 신사참배에 대한 책임문제를 중심으로 분열되기 시작한 한국교회(장로교 고려파가 1951년 분리)는 급기야 교권다툼과 이권문제로도 분열되었다. 신학적으로도 보수와 진보 사이의 다툼이 장로교 안에서 재연되었고, 이런 다툼은 마침내 한국전쟁 중에 열린 37회 장로회 총회(1952년)에서 김재준의 제명과 이것이 계기가 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분열(1953년)로 이어졌다.

선교신학적으로 주목할 운동은 이 시기에 발흥한 신흥종교라고 하겠다. 문선명의 통일교 운동(1954년), 나운몽이 이끈 용문산 기도원 운동(1954년), 박태선의 전도관 운동(1955년) 등은 토착종교와 기독교신앙, 말세론, 축사와 치유, 선교와 기업정신이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전개된 신흥종교들이었다. 지금은 이들 신흥종교들의 영향력이 크지 않지만 당시 이들은 한국전쟁 이후의 사회적 혼란기에 제 기능을 못한 제도권 교회의 틈새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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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선교신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한 것은 60년대 토착화, 세속화 등 선교신학적 논쟁이 활발해진 이후였다. 물론 이런 선교신학적 접근은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분류되는 신학자들에 의해 주로 진행되었고, 이런 신학적 논쟁은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적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기 한국의 선교신학은 ‘토착화론’에서조차 수입신학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계교회의 지평에서 주목받는 신학적 논의가 한국이라는 콘텍스트에서 모색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진보진영 신학자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은 ‘4.19 학생혁명’ 이후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반성하면서 60년대 세계를 휩쓴 ‘근대화’의 물결에 편입된 한국사회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한국교회의 신학적 방향은 여전히 보수주의, 진보주의, 자유주의라는 세 유형으로 전개되었고 대다수 한국교회의 현실은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양적 성장을 지향하고 있었다.

선교신학을 둘러싸고 한국교회가 첨예한 신학적 대립을 보인 것은 70년대부터였다. 보수진영에서는 일련의 대규모 대중 집회(‘엑스플로 74’ 등)를 통해 개인의 회심을 강조하는 ‘복음화’와 전도를 강조했다. 미국 풀러 신학교의 교회성장이론가인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이 74년과 75년에 한국에 초청되었고, 개신교 각 교단들은 경쟁적으로 성장계획을 수립했다.

이른바 ‘확장의 시대’로도 불리는 이 시기의 선교방법은 물량주의 위주라는 부정적 영향을 끼쳤지만 전도와 양적 성장에 큰 자극을 주기도 했다. 성장을 뒷받침한 것은 기복적인 설교, 로버트 슐러의 ‘적극적 사고’와 같은 대단히 현세주의적인 ‘번영의 신학’이었다. 그러나 진보진영에서는 산업선교와 도시빈민선교를 통하여 ‘인간화’를 강조했다. 이런 대립과 갈등은 선교신학적으로 ‘교회중심적 선교’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으로 대별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80년대 말, 두 입장의 대립은 조직으로도 구체화되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1989년 조직)로 한국교회가 양분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 때 형성된 신학적 대립과 기구적 분열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데 앞으로도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두 조직의 기구적 통합에 대한 논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의 실현가능성은 희박한 것처럼 보이고 신학적 대화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처음으로 한국의 독창적인 신학운동이 일어나 세계교회와 신학계의 주목을 끌었는데, 그것은 바로 박정희 개발독재의 희생자인 도시빈민과 노동자의 인권보장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연대투쟁으로부터 태동한 ‘민중신학’이었다. ‘민중신학’이야 말로 한국 개신교 100여 년의 역사상 세계 에큐메니칼 신학의 지평에서 처음으로 주목을 받은 한국적 선교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신학은 역사의 담지자이면서도 권력자에게 억압받고 소외당한 민중의 현실을 성서적, 교회사적으로 조명하고, 한국의 민중전통과 성서의 해방 전통을 합류시키는 신학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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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특히 광주민중항쟁 이후, 정치권력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보수와 진보 두 진영은 또다시 대립했는데, 진보진영은 ‘민중신학’의 기초 위에서 민중교회 운동을 전개했고, 보수진영은 교회성장과 대형화를 꾸준히 추진했다. 이들은 복음의 순수성과 정교분리의 이름으로 교회의 사회참여와 민주화, 평화통일운동을 비난했다. 이 시기는 군사독재에 의해 자유와 민주주의가 여전히 유보되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경제적 성장을 성취할 수 있었고 이에 편승하여 한국교회 안에도 물량적 성장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진영의 신학자들이 야당 국회의원으로 정당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현실정치의 도덕성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개신교 재야인사들의 정당정치 참여에 대한 선교신학적 논의가 심도 있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 선교신학적으로 중요한 자극을 준 사건은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된 것이었다(1990년 3월). 중요한 세 주제 모두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한반도에서 열린 이 세계대회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역교회공동체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90년대는 문민정부에 의한 정권교체와 절차적 민주주의의 수립, ‘국민소득 1만불 시대’로 특징지어졌다. 문민정부의 수립을 전후하여 한국교회 진보진영이 지지후보와 전략적 판단의 차이로 분열된 것도 이 때였고 이 분열의 후유증은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 선교신학적 화두는 단연 통일이었다.

사실상 통일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80년대부터 한국기독교회협의회는 통일논의의 물꼬를 터왔다.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1988년 2월), 세 차례에 걸친 글리온 남북회의(2차는 88년 11월, 3차는 90년 12월), ‘인간 띠 잇기 운동’(1993년 8월) 등이 그것이다. 특히 ‘88선언’은 그 후의 남북관계를 진일보시킨 ‘남북기본합의서’(1991년 12월),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1992년 2월)의 채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한편 한국기독교회협의회는 1995년을 민족의 ‘희년’으로 선포하고 평화통일운동에 박차를 가하려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 북한의 식량난은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넘어 북한동포 돕기 운동을 통하여 서로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 국민의 정부 수립 이후 정치적 문제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 사이의 갈등과 대결은 많이 약화되었다. 오히려 대표적 보수교단이었던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1996년 7월 11일 가입)와 ‘정교회’(1996년 2월 26일 가입)가 교회협의 회원교단으로 가입했고, 장로교단의 통합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됨으로써 가시적 교회일치를 위한 기구적 접근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 안의 가부장적 권위주의, 교회의 양극화, 대형교회의 세습에 대한 비판도 거세졌고, 개신교의 공격적인 해외선교와 타종교, 특히 불교에 대한 배타적 정복주의가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다원주의문제 때문에 진보적 신학자들이 강단에서 추방당할 만큼 보수적 근본주의가 다시 강화되었다.

한국개신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대부분의 신학적 논의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영혼구원과 사회참여, 보수와 진보, 토착화와 세속화, 복음화와 인간화 등을 둘러싼 논의들이 대부분 수입신학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교회의 주체적인 선교신학은 없단 말인가? 나는 70년대의 ‘민중신학’과 ‘한국문화신학’, 80년대의 ‘통일신학’, 90년대의 ‘희년신학’이 한국 상황에 대한 신학적 대결과 성찰에서 탄생한 한국의 선교신학이라고 생각한다.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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