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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세우신 교회, 사랑과 정의, 그리고 경건 공동체(사 56:1-7 약 1:19-27 마 22:34-40)성령강림 후 열째 주일/평화・통일주일(8월14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8.11 23:41

1. 두 계명, 곧 사랑!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에 관한 말씀이 계속됩니다. 오늘은 세 본문 말씀이 각각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의 핵심을 하나씩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정의’, 그리고 ‘경건’입니다. 복음서 말씀은 사랑을, 그리고 구약의 말씀은 정의를, 마지막으로 서신서 말씀은 경건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가 사랑과 정의, 그리고 경건한 공동체가 되어 주님의 뜻을 받드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22장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의 일들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시는 장면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혼인 잔치로 비유합니다(마 22:1-14). 그리고 가이사에 대한 세금 납부의 문제(15-22)와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23-33)에 관해 대답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관해 말씀(41-46)하십니다.

물론 오늘 본문 말씀은 부활에 관한 논쟁에서 사두개인들이 말문이 막혔을 때,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의 바통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논쟁하는 말씀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을 묻습니다.

▲ 가장 큰 계명인 사랑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4-40)

한 율법사의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관해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장 큰 계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방향이 위(수직)와 사방(수평)으로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는 사랑이 위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수평으로, 곧 이웃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보수 교단은 너무 위로만 사랑을 보내고, 또 진보 교단은 옆으로만 보냅니다. 위로만 가는 사랑을 오늘 말씀의 맥락에서는 경건으로, 또한 사방으로 열리는 사랑에 관해서는 정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이 두 사랑이 모두 하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부족한 사랑을 채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늘 항상 정의에 기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정의 없는 사랑은 기준이 없기에 혼란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기준은 ‘분배에 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의 핵심은 정의입니다.

2.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오늘 구약 이사야 말씀은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를 정의를 지키는 공동체로 소개합니다. 말씀을 먼저 볼까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사 56:1).”

▲ 이사야서 구분

잘 아시다시피, 이사야 말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오늘 본문인 56장부터 마지막 66장까지를 제3 이사야, 곧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사야’의 말씀이죠? 예언하는 장소를 기준으로 이렇게 나눕니다. 처음 1장부터 39장까지는 제1 이사야로 ‘예루살렘 이사야’입니다. 바벨론 포로 전 민족의 멸망을 예언하는 이사야입니다. 그리고 40장부터 55장까지는 제2 이사야로,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사야’입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유다 민족들에게 소망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사야는 그 소망을 유다 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으로 확장합니다. 이방인까지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제가 바로 정의를 지키고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 이사야 예언자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사 56:2-3)

하나님께서 정의를 지키고 의를 행하는 것 외에, 또 다른 조건을 두 가지 다십니다. 곧, 안식일을 지키고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 세 본문 말씀의 맥락에서 보면, 경건과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여기에는 이방인과 고자도 해당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이들, 곧 악을 행하지 않고 정의를 행하며 하나님과의 언약인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고, 기쁘게 그들을 하나님의 성산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4-7)

3. 평등, 공평 그리고 자유

2009년 발간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끈 인문학 서적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와이즈베리, 2009)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샌델 교수는 ‘정의’에 대한 확고한 답을 내리지는 않고 오히려 책을 읽는 독자들이 위대한 사상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쳐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바로잡는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정치철학자인 샌델 교수는 오늘날 대표적인 공동체주의자, 공화주의자이며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하기에, 이 책의 결론은 ‘정의를 통한 공동체주의 회복’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10장에서 ‘정의와 공동선’을 이야기합니다. 공동(공동체)의 선으로서 정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3년이 지난 지금 다시 정의의 문제가 부각되었는데, 특별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공정 담론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동체적 정의’가 아니라, ‘개인주의적 정의’가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TV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입니다. 인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주인공 우영우보다 “권투터민투더우!”, 곧 권모술수 권민우(주종혁 분)가 매력으로 보입니다. 권민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 우영우 변호사의 직장동료 권민우 변호사

“우영우가 강자예요! 모르겠어요? 로스쿨 때 별명도 어차피 일등은 우영우였다면서요. 이 게임은 공정하지가 않아요. 우영우는 우리를 매번 이기는데, 정작 우리는 우영우를 공격하면 안돼. 왜? 자폐인이니까. 우리는 우변한테 늘 배려하고 돕고, 차에 나온 빈자리 하나까지 양보해야 된다고요! 우영우가 약자라는 거, 그거 다 착각이에요.”

권민우에 공감하는 이대남이 많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권민우라는 캐릭터가 ‘조국 사건’과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논란(인국공 사태)’과 ‘연세대 청소 노동자 고소’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공정 담론 논쟁을 촉발한 ‘이대남의 화신’이라는 말에, 100% 공감하지는 않지만, 이해가 됩니다.

무한 경쟁 속에서, 또한 취업난과 미래의 불안에 허덕이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면, 권민우의 말이 이대남들의 속 마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극한 경쟁에 내몰린 이대남, 아니 2030세대를 바라보면, 기성세대로서 미안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드라마에서도 나왔지만, 최수연 변호사(하윤경 분)의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최고의 실력을 지닌 우영우가 (장애 때문에) 취업할 수 없었던 차별을 보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권민우는 우영우가 자폐인이라는 이유로, 로스쿨 동기 중 최고의 성적을 가지고도 모든 취업의 문이 닫힌 것을 모릅니다. 우영우가 약자라서 받았던 차별은 간과하고, 그저 우영우가 받았던 이득(아니 배려라고 할까요?)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죄송합니다만, 이대남은 권민우와 같이 ‘공동체적인 정의’가 아니라, 전형적인 ‘형식적 평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그림의 제일 왼쪽 ‘평등’ 부분). 이것을 저는 ‘개인적 차원의 정의’라고 부릅니다.

▲ 평등, 공평, 자유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형식적 평등(equality, 균등)을 넘어 실질적 평등, 곧 공평(equity)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차별 없는 해방의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구조적 원인인 담벼락을 살펴야 합니다. 담벼락을 만든 ‘룰’을 보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법이죠? 법을 바꾸면 평등과 공평으로 인해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이대남들이 ‘역사의 경험치’를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렇게 우리 앞에 놓여있는 담벼락을 무너뜨린 역사였지, 내 앞에 있는 담만 허문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법입니다. 출애굽 당시, 노예들을 해방하고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 십계명이죠? 애굽의 제국과 노예의 룰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법인 사랑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 핵심을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잘 요약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 공동체는 사랑으로 함께 손잡고 우리 앞에 놓여진 담벼락을 허무는 것입니다.

또한 죄 아래 신음하는 모든 만물의 해방을 위한 ‘그리스도의 법’도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 이대남들, 아니 2030세대들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룰이자, 법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다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 6:1-2)

4. ‘도덕성’을 이루는 여섯 가지 근본적 기반

이렇게 법과 정의, 사랑과 해방이 다일까요? 현재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뉴욕 대학 스턴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도덕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가 쓴 책 가운데 『바른마음: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웅진지식하우스, 2014)이 있습니다. 여기서 도덕성을 이루는 여섯 가지 근본적인 기반을 소개합니다. 법과 정의, 사랑과 해방 외에 우리 사회, 혹은 교회에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것은 바로 ‘①배려/피해 ②자유/억압 ③공평성/부정 ④충성심/배신 ⑤권위/전복 ⑥고귀함/추함’입니다. 여기서 진보주의자들은 이러한 도덕성 기반 중에서 ‘배려’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죠? 배려 기반으로 문제에 접근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피해를 개선하고 공정하고 자유로운 삶을 중시합니다. 오늘 말씀의 맥락에서 사랑과 정의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또 다른 도덕성 기반인 ‘충성심, 권위, 고귀함’에 대해서는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충성심과 권위’를 기반으로 문제에 접근합니다. 저는 이것을 오늘 말씀의 맥락에서 경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들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도덕성 기반을 받아들입니다. 곧 진보는 배려 기반과 공평성 기반이라는 두 가지 기반에 집중하는 반면, 우파는 다른 기반 모두를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하이트의 말입니다.

“좌파는 배려 기반과 공평성 기반에 주로 기대는 반면, 우파는 다섯 가지 기반 모두를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만일 실제로도 정말 그렇다고 하면, 좌파의 도덕성은 마치 ‘더 트루 테이스트(맛집)’ 식당의 음식과 비슷하다는 뜻이 아닐까? 좌파의 도덕성은 고작 한두 개의 미각 수용체를 활성화시키는 반면, 우파의 도덕성은 충성심·권위·고귀함까지 아우르며 더 폭넓게 미각 체계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유권자들과 연결될 더 폭넓고 다양한 방법도 결국 보수적 정치인들이 손에 쥐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이트는 이 책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사람들이 왜 정치와 종교 때문에 서로 이편저편으로 나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 답은 어떤 사람은 선하고 어떤 사람은 악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마음이 집단적 바름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답이었다. 우리 인간은 지극히 직관적인 생물체로서, 우리의 전략적 추론 능력도 사실은 직감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나와 다른 매트릭스의 사람들을 만나면, 더구나 그런 이들의 도덕 매트릭스는 우리의 것과는 다른 식으로 배열된 도덕성 기반에 의지하고 있는 때가 많기 때문에, 그들과 연결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오늘 말씀의 맥락에서 보면, 사랑과 정의가 경건과 분리된다는 뜻인데, 도대체 왜 그런가요? ‘도덕’은 개인적인 영향보다는 집단적 움직임에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덕성은 한 집단을 뭉치게도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눈멀게도 하는 위험한 힘이 됩니다. 한 집단이 특정한 도덕성에 기반하여 다른 집단을 공격할 때, 공격받은 집단은 감정적으로 반응하여 더욱 격렬한 분노를 보이게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이념적 양극화 현상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싸움에서 나름 이성적인 논리와 추론이 동원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지닌 감정과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한 자폐적인 움직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본질적인 도덕성일지라도 한두 가지 도덕성만을 절대화했을 때, 그것은 또한 ‘극단주의적’ 성향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이트의 말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은 압제당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대변하고자 한다. 그러나 희생자들을 도우려는 열의는 좋지만, 그것이 충성심, 권위, 고귀함 기반을 별로 중시하지 않다 보니, 진보주의자들이 밀어붙이는 변화는 집단, 전통, 제도, 도덕적 자본을 약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세상에는 다양한 정치적 이념, 종교적 믿음, 사회적 가치들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중 자신이 선택한 것이 ‘가장 옳다’고 믿습니다. 그 ‘옳음’을 위해 집단을 이루고, 행동하며, 심지어 삶의 모든 것을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옳음이 배타성을 띄고 유일성으로 존재할 때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이겠죠? 이것은 진보나 보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한 사회에 중도적인 입장이 많아야 그 사회가 건강하게 움직입니다. 화이트도 이렇게 조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해결할 문제는 타인을 설득하지 않고 풀릴 수 없다. 사람들이 같은 가치관과 도덕관을 가지면 하나의 집단이 생기고 열린 사고가 마비되기 때문이다.”

사랑과 정의 개념은 어떻게 보면 경건의 개념과 대조되는 듯이 보입니다. 이것은 사회, 정치적으로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정의는 매몰차고, 정의 없는 사랑은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또한 경건에 기초하지 않은 사랑과 정의는 가식적입니다. 물론 경겅만 있고 사랑과 정의가 없는 것도 반사회적 자폐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 공동체는 경건하되, 사랑과 정의라는 베이스에서 기초해야 합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랑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의 법과 정의를 구현하되, 경건에 기초하라고 권면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5.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19-21)

먼저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 방편으로 성내기를 더디하라고 합니다. 특별히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 사이도 그렇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도 그렇습니다. 오늘이 평화・통일주일인데, 남과 북에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된 평화가 옵니다.

또한 야고보 사도는 사랑과 정의에 관해 말로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행하고 정의롭게 살아야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2-25)

마지막으로 야고보 사도는 경건을 이야기합니다.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고아와 과부, 곧 사회적 약자를 환난 중에 돌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속에 물들지 않게 경건하라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6-27)

여기서 경건의 의미가 두 가지죠? 사랑과 정의를 행하되, 세속적인 가치에 물들지 말고 하나님 사랑에 기초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는 사랑과 정의, 그리고 경건으로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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