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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 삶이 된 말씀다시 새로운 탄생(요 21:5-6)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8.21 22:59
▲ Fritz von Uhde, 「Christ and Nicodemus」 (c.1896) ⓒWikimediaCommons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 요한복음서 21:5-6

1.

오늘 요한복음 마지막 시간입니다. 요한복음은 맨 처음의 시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다른 복음서의 시작과 조금 다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의 ‘육신의 탄생’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예수의 육신의 탄생이 아니라, 예수라는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 의미를 요한복음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된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의 진술이나 주장에만 공허하게 그쳐버린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현실로 실현된 것’이 예수라는 존재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압니다. 물론 신학자들처럼 성경연구가들처럼 체계적이고 조직적이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 흐트러짐 없이 아는 것 아니지만, 비록 뒤죽박죽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큰 의미를 잘 압니다. 그 핵심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말씀을 삶으로 잘 살아내느냐가 문제입니다.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성서를 보면 특히 예언서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탄하실 때가 있습니다. “나는 너희들 하는 짓이 다 싫다. 내가 바라는 것이 단 하나 있다면 내 말대로 사는 것이다. 내 말을 잘 안다고 하는데 내 말대로 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찌보면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큰 목표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고 계신 것이 그것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의 일생을 증언하면서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살아낼 수 없는 거룩한 삶을 사셨다고 예수를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본받아 살아야 할 모범이 이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내 보자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성육신’을 증언합니다. 말씀이 공허하게 ‘말씀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 나도 말씀을 알고 있어. 하나님 그렇게 말씀하셨지.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뜻이야’ 하면서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고, 그 말씀이 실존하고, 말씀이 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가는 실제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의, 공의라는 가치를 알려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정의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지난 시간 말씀을 통해서 ‘아들의 탄생’을 이야기했습니다.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게쎄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살겠다’고 고백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로 비로소 탄생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말씀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존재 안으로 완전히 받아들이는 순간이 진짜 탄생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라는 인간 속으로 들어가 그 삶의 실체가 된 것입니다. 머릿속에 가슴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탄생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우리가 잘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제사장이고 레위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는 말씀은 그들의 삶 속에 실제가 되어 성육신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다고 손가락질하고 무시하고 비웃었던 사마리아인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잉태되어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사마리아인에게서 말씀이 탄생한 것 아닙니까?

밤중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바리새파요 백성의 지도자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잘 안다고 하는 니고데모도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잘 알고 있는데, 율법대로 살아왔는데... 그런데 다시 태어나라고?’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를 오해하는 것인지도 몰라, 니고데모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상상해 봅니다. 니고데모는 말씀을 잘 압니다. 그리고 말씀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만 실행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한다는 것은 내 존재의 내적 근본에서 말씀이 나와 하나 되는 것인데, 니고데모는 마음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외적 실천만 고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마음 안에서 근본적으로 존재가 변해야 한다고 말하십니다. ‘거듭나야 한다’고 일러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앎과 실천’이 아니라, ‘존재로 태어남’인 것입니다. 

3.

거듭나려면 이전의 탄생이 무효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과 같습니다. 새 사람이 태어나려면 옛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탄생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지금 2022년을 살고 있는데, 2022년이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2021년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2021년이 지나가야 2022년이 옵니다. 2021년을 다 살아내야 합니다. 다 살아낸다는 것을 오늘 우리의 말로 바꿔보면, 2021년을 온전히 죽는 것입니다. 그래야 2022년이 우리에게 옵니다. 

‘죽는다’고 표현하니까 부정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희생해야 하는 것 같고, 포기해야 하는 것 같고, 십자가를 져야만 할 것 같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고난받아야 할 것만 같습니다. ‘죽고 다시 태어나라’고 하니까 옛 삶을 무작정 부정하고 벗어버리려고만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죽는 것인데,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인데, 그 죽음이 아프고 고된 것만은 아닙니다.

옛사람이 죽는 것은 한 편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2022년을 살 수 있는 것은 2021년을 잘 살아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린 시절을 잘 살아냈기에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린이 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을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 억지로 견뎌내는 시간이 아니라, 어린이가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삶을 누리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옛사람을 벗어버리라는 것은 어린시절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충만하고 행복하게 그 삶을 살되, 그 삶에 사로잡혀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뛰어넘으라는 것입니다. 돌파하고 초월해 내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 아픔과 고됨이 있을 수 있지만, 기쁘고 즐겁고 복되고 희망찬 시간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야 합니다. 내 원대로 살던 삶을 다 살아내고, 그 삶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렇게 내 욕심대로만 사는 삶에 머물지 않고 그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이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시 태어나는 첫걸음입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세 번이나 ‘내 양 떼를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 전에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에서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다시 고기잡이하고 있는 베드로를 만나셨습니다. 양 떼를 치는 새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고기 잡는 옛사람에 머물러 있는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당장 그물을 던져 버리고 나를 따라라’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고기잡이의 삶, 베드로의 옛 삶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십니다. 옛 삶을 온전히 다 살아내게 하십니다. 옛 삶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다 허락하십니다. 머물러 있지 않고 뛰어넘을 수 있도록, 옛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옛 삶에 미련이 남지 않도록 채워주십니다. 그렇게 죽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살아도 은혜요 죽어도 은혜요, 그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라 하십니다. 태어나기 위해 죽으라 하십니다. 죽기 위해 지금을 충실히 살라 하십니다. 마침내 죽어야 할 이 삶마저도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마침내 온전히 죽어낸, 그래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예수의 삶을 보여주시고, 우리도 그렇게 살라 하십니다. 너희도 그렇게 살 수 있다 하십니다. 그렇게 살도록 돕겠다 하십니다. 

복음서의 마지막을 읽고 책을 덮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진리를 사모하고, 마침내 그 진리와 온전히 하나되어 내 삶에 말씀이 성육신하기를 사모하는 마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새로운 탄생을 위해, 옛 삶을 현재의 삶을 마냥 부인하는 억지스런 죽음을 맞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먼저 지금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낼 수 있기 바랍니다. 그 충실한 삶을 통해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고, 아름답게 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각자의 게쎄마네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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