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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봄이 아닌 들음으로주님의 종이 듣겠습니다(삼상 3:1-12)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2.08.23 00:05
▲ 예루살렘에 있는 청동촛대조각(Knesset Menorah)의 가운데 기둥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 이스라엘, שׁמע ישׂראל, 신6:4)가 조각 되어 있다. ⓒWikipedia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평안은 우리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평안을 우리의 내면이 아니라 밖에서 찾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헛수고일 뿐입니다. 

평안을 누리고 싶다고 성령님께 요청하면, 평안이 주어집니다. 평안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우리 안에 주어진 평안을 선택하십시오. 또 다시 우리 안에 주어진 평안을 선택함으로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주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 삶에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목적, 나의 욕망을 비워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성경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더라도 하나님이 아닌 ‘나’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면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하거나, 적용하게 됩니다.

겸손하게 듣고자 하는 성도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고, 나를 통해 드러내려고 하시는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바로 그 원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것만 해결해 주세요!”라고 드리는 기도의 제목이 있으십니까? 그 기도의 제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삶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십시오. 삶을 하나님께 내어 맡김으로 자신을 비운 성도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근래에 저는 자주 성도님들과 성도님들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깊은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성도님들이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어려움을 겪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등등을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교회 성도님들이 아프지 않고,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순하면서도 목사로서 당연한 바람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런 목사의 바람과 기도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보이는 현상에만 집중해서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려움 가운데 놓여있는 성도님들에게 정작 필요한 기도는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어쩌면 중요한 것이란 보이는 현상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참 의도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빠르고 쉽게 ‘보이는 현상’만을 놓고 기도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즉, 해결만을 바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에 집중할 때 우리는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됩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무엘상 27:1-2 “1 다윗이 혼자서 생각하였다. "이제 이러다가,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을 것이다. 살아나는 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망명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사울이 다시 나를 찾으려고 이스라엘의 온 땅을 뒤지다가 포기할 것이며,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2 그래서 다윗은 일어나서, 자기를 따르는 부하 육백 명을 거느리고,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넘어갔다.”

믿음 좋은 다윗이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다윗이 혼자 생각했습니다. 혼자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이제 이러다가,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을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상을 쭉 읽어온 성도는 다윗이 이제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친히 보호하시고 왕으로 세워주신다는 약속을 이제는 굳게 믿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사울과 함께 지내더라도 ‘하나님으로 인해 죽임당하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할 만도 한데, 다윗은 이방 땅으로 도망을 갑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말씀보다, 보이는 사울이 자신에게 했던 행동들에 더 집중한 까닭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스스로가 보고, 경험한 것들에 무게 중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혼자 생각하였다.’ 혼자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혼자 생각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중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윗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들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들어야 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듣겠습니다.”라고 귀 기울여야 합니다.

눈앞에 벌어진 일들에 사로잡혀 버리면, 하나님의 뜻과 기도의 방향을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에 집중하고자 할 때면 이런 멘트를 많이 듣지 않습니까? “눈을 감고”라고 시작하는 멘트를 말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창세기 2:15-17 “15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16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창세기 3:5-7 “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7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이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진행한 것입니다. 

<매주 오경 읽기 영성 강론>이라는 책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조너선 색스라는 랍비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유다이즘의 윤리는 외면, 명예, 수치심의 윤리가 아니라, 영혼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의를 기울이는 윤리다.

아담과 하와의 드라마는 비유대인들이 해석해왔던 것처럼 ‘타락’이나 원죄, 사과나 섹스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깊은 것이다. 그 드라마는 우리가 살도록 요청받는 도덕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타인들을 지배하는 도덕에 지배당할 것인가? 마치 도덕이 정치인 것처럼, 대다수의 의지에 지배당할 것인가? 우리 감정의 지평이 명예와 수치심이라는 두 가지 뿌리 깊은 사회적 감정에 국한될 것인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남들의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가치, 즉 하나님의 말씀과 의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인가?

아담과 하와가 직면했던 것은 인간의 원형적 선택, 즉 그들의 눈이 본 것(선악과 나무와 그 열매)과 그들의 귀가 들은 것(하나님의 명령)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일이었다.

유다이즘은 보는 종교가 아니라 듣는 종교다. 유다이즘에서 가장 유명한 명령은 “들어라, 이스라엘아”이다.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이 그 당시의 사람들과 달랐던 이유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짧게 요약하자면, 듣는 종교에서 보는 종교로 변질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지면서 첫 번째로 한 행동은 벌거벗은 몸에 수치심을 느껴 자신의 몸을 가린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을 피해 숨은 것입니다. 

이전에는 시각적으로 어떻게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는 보이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음성,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 순종만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선악과 열매를 먹고서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내가 어떻게 보여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하나님 중심에서 나 중심으로 넘어가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의 전환이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 전체에서 “들어라!”라는 구호는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이사야 28:23 “너희는 귀를 기울여서,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주의 깊게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예레미야 2:4 “야곱의 백성아,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가족아, 너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에스겔 3:10 “그런 다음에,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에게 하는 모든 말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귀를 기울여 들어라.”

이사야서에서는,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레위기서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신명기서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어라.” 에스겔서에서는,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등의 “들어라!”라는 말씀이 많이도 나옵니다. 듣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성도는 듣지 않습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에 집중하며 판단합니다.

그래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이 더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사무엘상 3:1-12 “1 어린 사무엘이 엘리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이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2 어느 날 밤,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였다. 그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 3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른 새벽,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환하게 밝혀져 있을 때에, 4 주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그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고서, 5 곧 엘리에게 달려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사무엘이 다시 가서 누웠다. 

6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얘야,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7 이 때까지 사무엘은 주님을 알지 못하였고,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난 적도 없었다. 8 주님께서 사무엘을 세 번째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소년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9 사무엘에게 일러주었다. "가서 누워 있거라. 누가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이 자리로 돌아가서 누웠다.

10 그런 뒤에 주님께서 다시 찾아와 곁에 서서, 조금 전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한다.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무서워서 귀까지 멍멍해질 것이다. 12 때가 오면, 내가 엘리의 집을 두고 말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루겠다.”

사무엘이 아직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던 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겸손한 태도로 귀를 기울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성전에서 잠자리에 누워 있었던 사무엘, 주님이 말씀을 해주시는 일도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던 때에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를 도와 주님을 섬기면서 얼마나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환상을 통해 하나님 보기를 갈망했을까요?

하지만 오늘날 과연 누가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갈망하겠습니까? 나의 목적과 욕망을 하나님께 말하고, 이 목적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움직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렇기에 어느 누가 겸손한 태도로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겠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자신이 보고 경험하는 것이 다라고 여기며, 자신이 할 말만 하고 돌아서는 것이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주님의 종이 듣겠습니다.’라는 믿음의 태도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더욱 듣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을 감고,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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