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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가 된 율법율법을 벗어나 율법에 따라(고린도전서 9:19-23)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8.28 05:13
▲ Valentin de Boulogne, 「Saint Paul Writing His Epistles」 (c.1618-20) ⓒWikimediaCommons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성령강림후 열둘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사도 바울에 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 그가 율법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전하고자 했는지, 율법을 통해 어떤 신앙을 전하고자 했는지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바울 서신이나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어떻게 생각하면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꿔서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쓰며 살았습니다.

특히나 사도 바울은 생계를 위해서 교회의 지원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른바 자비량 선교라고 불리는 선교 방식의 개척자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 저희가 읽은 고린도전서 9장의 앞부분에 나타납니다. 자신이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지만, 자신과 바나바는 그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복음 전파를 위해 대단한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이지만, 그가 살아있던 당시에나 또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러모로 시달린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에게는 진짜 사도가 아니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어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는데, 심지어 자신이 세운 교회인 고린도 교회 내에서도 사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의심하거나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은 그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반박입니다.

기독교의 긴 역사 속에서 사도 바울이 상당한 지위를 누리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한동안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했다는 논리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과 예수님의 복음은 차이가 있으며, 사도 바울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위해서 말씀을 왜곡시켰다는 주장들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이런 주장들이 오히려 잘못된 해석이라고 비판받고 있지만,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이 자신이 살던 시대에나 2000년 가까이 지난 후대에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율법을 벗어난? 율법 아래에 있는?
고린도전서 9장은 사도직에 관한 사도 바울의 변론입니다. 그 앞부분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은 저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교회의 지원으로 생계를 유지할 권리가 있으며, 자신도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고, 보이셨던 가장 큰 은혜를 십자가에 달리신 자기희생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 자신도 무언가를 희생하면서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다른 사도들과는 조금 다른 태도를 취하며, 그들이 누리는 것을 누리지 않으며 복음 전파에 전념했습니다.

약간 난해한 부분이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사실 단순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복음 전파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맞춰서 최대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이야기로 읽으면 그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저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 버린다면,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의미를 오해하거나 곡해할 가능성도 분명히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복음 전파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아무 자세나 취해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문제가 생기는 부분은 사도 바울이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취하고 있는 듯 하기 때문입니다. 20절에서 자신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21절에서 자신이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율법 아래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이야기합니다. 특히나 할례와 같이 사람을 얽매는 율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21절 본문에서도 자신이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라고 말한 뒤에,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틀, 유대교가 가지고 있던 신앙의 틀을 깨뜨리려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부정하는 일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서 벗어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율법에서 벗어나서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비판하며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율법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법이 지향하는 바, 그 목적 중 하나는 질서유지입니다. 사회가 질서있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법입니다. 그런데 만약 법이 법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유익하게 적용되고, 법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역할을 한다면, 법 자신이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살아갔던 시대, 예수님께서 살아가셨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내려주신 이유는 그들의 삶을 보호하고 지키며 안정된 사회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와 지키지 않는 자를 구분지으며 어떤 이들은 죄인, 어떤 이들은 의인으로 만드는 도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법을 잘 아는 이들,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이들은 자신들이 법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법을 잘 모르는 이들을 억압했습니다.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악한 사람들이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이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때로는 잘못된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욕망에 빠져서 율법을 이용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나 당시에나 마찬가지로 법을 잘 안다는 점을 이용해서, 또 재판관과의 인맥 등을 통해서 약한 이들을 수탈하는 도구로 법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비판한 율법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이런 도구화된 율법입니다. 누군가를 죄인으로 규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율법을 비판했습니다. 율법은 이런 일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가 아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율법을 어기면서 살아도 좋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물론 때로 율법에 맞지 않는 일을 허가하거나 자신이 행한 일도 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허용한 점이나, 이방인과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일들이 그 예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사도 바울은 스스로 율법을 완전히 어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유대인들과는 율법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법대로 하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이하에 나타난 27절에서 자신 또한 버림을 당할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쓰며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을까, 자신의 방식을 따랐던 사람들이 함께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스스로에게 더욱 채찍질하며 복음 전파에만 힘쓰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했고, 율법의 근간을 어기지 않으면서 현실에서 율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현재 대통령은 취임 전이나 취임 후에나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법대로 하라는 말입니다. 검사 출신이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법대로 하라는 말처럼 때로는 무책임하고, 때로는 위험한 말도 없습니다.

법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상황을 담을 수 없습니다. 사회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한다지만, 변화하는 사회에 발맞춰 그때그때 법을 바꿀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동킥보드에 관한 법률일 것입니다. 아무런 법이 없었기에 지자체를 비롯해서 수많은 업체가 전동킥보드 대여를 시작했는데, 사고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뒤늦게 법률 재정이 이루어진 사례입니다.

법이 모든 상황을 다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국회는 늘 고민하며 새로운 법을 입안해야만 합니다. 법의 사각지대가 없도록 국회가 만들어가야만 합니다. 행정부는 현재 법이 다루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관리하며 처리해야만 합니다. 사법부는 법 적용이 모호한 순간에 이를 판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행정부 수장이 법대로 하자는 말은 법의 목적은 잊은 채, 법을 도구로만 사용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저 만들어지고 쓰여진 법대로만 하자는 수동적인 태도이며, 방관적인 태도이고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그렇기에 결국 또 다른 문제를 만들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도구화 된 율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저 누군가에게 유죄를 선고하기 위한 율법은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삶 속에서 그저 행해지기에,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람들을 보호하며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율법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율법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사회법은 무엇이고, 성경을 통해 배우는 율법은 무엇입니까? 그저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으니까 억지로 지킬 수밖에 없는 강제력입니까? 아니면 내 유익을 위해서 때로 이용할 수 있는 도구입니까? 법은 지킬 때 우리 삶에 평안을 주기에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율법도 마찬가지이며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법, 생명을 살리고 평안을 주는 법을 따라 살아가며 그 안에서 진정한 평안을 누리며 사랑을 나누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도구화 된 법은 벗어버리고 본질을 잃지 않는 법을 따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삶을 보호하시며 평안으로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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