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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기는 삶부활의 희망으로(전 3:12-13; 고전 15:26-28)
이경훈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08.31 21:05
▲ Sebastiano Ricci, 「The Resurrection」 (c.1715-16) ⓒGoogle Arts&Culture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 전도서 3:12-13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 고린도전서 15:26-28

예수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죽음은 모든 생명에게 벽이고 경계이며 누구도 거기서 벗어나거나 그 너머를 내다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죽음은 우리에게 정말 끝으로 보이기에 여러 가지 형태로 죽음의 위협이 닥칠 때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그것을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생명체에게 공통된 현상이며, 생성과 소멸의 순환이라는 자연의 질서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죽음을 하나님의 “마지막 원수”라고 부릅니다. 더욱이 바울은 이 죽음이 멸망당할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님”으로 군림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패배했고 근본적으로 힘을 잃었지만(고전 15:55), 아직 그 세력을 떨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전쟁이 끝나기 이전 어느 시점에 이미 승패를 가름하는 결전이 있었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치러야 할 전투가 아직 남아 있는 상황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자주 말하듯이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전쟁’ 속에서 하나님의 원수에게 굴복하고 그 세력의 지배 아래 있을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의인과 악인의 차이가 소멸되고 도리어 악인은 번영만 누리다가 편안한 죽음을 맞고, 그래서 모든 삶의 의미와 가치들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일 때, 또 죽음과 짝하며 우리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는 세력 앞에서 우리의 신념이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뒤에서 바울이 “죽음의 독침은 죄”(고전 15:56)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하셨음에도 죽음의 한계와 죽음에 대한 공포는 독침이 치명상을 입히듯 우리를 그 생명의 근원에서 이탈시키고 포획하여 죄와 죽음의 세력 아래 묶어 둡니다.

즉, 인간은 자연적으로도 죽음을 향한 존재이며, 역사적으로도 국가폭력이나 체제 및 구조에 의한 죽음의 위협 앞에 놓여 있어, 때로 거기에 굴복하고 그런 의미에서 유죄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 소식은 이처럼 사방이 죽음으로 에워싸여 있는 곳으로 들려왔습니다. 우리와 동일한 죽음을 당하신 예수의 죽음에서 우리 자신의 죽음을 보고, 예수의 부활에서 죽음 너머 우리의 부활을 보라고 그 소식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죽음은 더 이상 우리 삶을 지배하고 삶의 의미를 모두 앗아 가는 절대 세력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기생하며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무리도 그 정체가 드러나고 힘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승리는 이미 결정되었으나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죽음의 세력 앞에서 우리에게는 치러야 할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싸움을 끝까지 싸우고 견디는 길 역시 예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저 수동적으로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가셨습니다. 죽음의 힘과 죄의 굴레에 갇혀 사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죄인 되게 하고 죽음의 지배 아래 가둬 두려는 세력을 폭로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먼저 갈릴리로 가시고 그곳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겉보기에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세상 속에서, 그러나 부활하신 자를 만나고 새로운 현실의 토대 위에 세워진 이들과 함께 생명의 길을 열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가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실제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예수 안에서 부활은 단지 신비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기초이며 장차 올 우리 미래의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한계 속에 갇혀 있지 않으며, 그로 인해 끝내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 안에서 죽음의 세력에 의해 무의미로 치부되고 망각 속에 묻힌 역사적 운동들도, 그 세력에 의해 죽임당한 수많은 어린양들도 생명으로 옮겨져 하나님 앞에 산 자들이 될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은 역시 모든 것이 봉착하는 죽음이라는 한계 때문입니다. 그 한계를 벗어날 길이 있는지 모색하며 세상사를 두루 살핀 끝에 기자는 오늘 본문과 같이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하는 것, 곧 선을 행하는 삶, 그것은 악과 불의를 멀리하고 이 땅에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일구는 삶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그런 삶은 고난과 고통을 불러올 수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속에서 기쁨을 얻게 하시고 죽음의 세력을 이겨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그런 삶은 여전히 죽음에 에워싸여 있지만 결코 죽음에 삼켜질 수 없습니다.

또한 선을 행하는 삶은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너와 연대하는 삶입니다. 선을 행하면서 옆에 있는 너를 경쟁 상대로 볼 수는 없으며, 서로를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은 기쁨을 가져오고 그 기쁨은 선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경쟁과 불평등을 부추기고 모든 것을 경제적 수치나 가시적 성과로 환산하는 이 세상 속에서 이러한 삶은 거기에 균열을 일으키고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예수 안에서 새로운 토대를 얻은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은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죽음의 세력이 주는 두려움와 근심을 이겨내고 이 땅에 평화를 수립하는 싸움을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치유와 해방과 평화의 힘이 죽음의 지배 아래 신음하는 사람들과 자연 위에 임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부활의 희망을 세상 곳곳에서 전하며 사람들과 자연을 고통에서 건져 주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서로에게 선을 행하고 거기서 기쁨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경험하는 우리의 나날이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경훈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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