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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회복죽음을 이기고 얻는 평화(롬 5:15-18)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9.04 04:52
▲ Peter Paul Rubens, 「The Garden of Eden with the Fall of Man」 (c.1615) ⓒWikimediaCommons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들어가는 말
이번 주일부터 창조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창조절 첫 주일에 선정되어 있는 본문이 창세기 3장 1-13절, 시편 37편 1-9절, 마태복음 18장 1-14절, 로마서 5장 12-21절입니다.

한동안 교회력에 따른 본문들 중에서 이번 주간에 말씀을 나눌 본문만 말씀드렸었는데, 이번 주일에는 선정된 본문들이 무엇인지를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 이유는 이번에 선정되어 있는 본문 중 창세기와 로마서 본문이 전통적으로 원죄를 설명할 때 사용되던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원죄라는 교리는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아담과 하와의 죄에서 시작해서, 시편 51편에 나타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다’라는 말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5장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이야기로 확정되게 됩니다.

창조절 첫 주일이자 추석이라는 민족 명절을 앞둔 주일에 왜 원죄라는 교리의 근거가 되었던 본문이 선정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번 주일에 선정된 본문은 분명 강단에서 원죄의 이야기를 다루길 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관한 말씀이 선포되길 바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에는 원죄에 관해서 잠시 생각해보고, 그와 함께 창세기의 이야기와 그리스도의 구원, 사람의 죄에 대해서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명절을 앞둔 주일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드리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원죄
아마도 우리는 원죄라고 하면,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서 우리 안에 내재 되어 있는 죄를 뜻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찌보면 최초의 인간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전되고 있는 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죄의 근거가 되는 본문들에서는 이런 죄의 유전이라는 개념은 찾기 어렵습니다. 물론 조상의 죄가 후대에 이어진다는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박이 예언서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에 나타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니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속담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예전에 말씀을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조상의 죄로 인해 지금의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절반 정도 긍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에스겔은 부정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지금의 상황은 조상의 죄로 인함이 맞지만, 이제 하나님의 구원이 이른 후에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절반의 긍정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조상이 죄를 범하였고, 그 죄가 땅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자손들 때에 벌을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조상들로부터 죄의 DNA를 이어받았다는 개념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원죄의 개념, 죄의 유전이라는 개념은 초대교회에서도 없었습니다. 이런 개념을 확립시킨 사람은 4-5세기에 활동했던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이라 불리는 인물입니다. 어거스틴이 유전되는 죄, 원죄를 말하기까지 복잡한 사고의 과정이 있었겠지만, 단순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는 죄의 기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각인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원죄라는 교리는 과거 교회가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원죄의 교리는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키고,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괄시하게 만드는, 오히려 스스로를 파괴하는 교리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런 문제와 함께 유전되는 죄라는 개념은 지금 내 자신의 잘못, 내가 행하는 죄에 대한 면죄부가 됩니다. 죄는 내가 지었지만, 이것은 사실 내 잘못이 아니라 내 안에 새겨진 원죄 때문이라는 변명이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한때 언론에서 범죄자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자란 환경이 저들을 범죄자로 만들었다고 자주 언급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누군가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인데, ‘내 잘못이 아니라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주장한 범죄자가 있었습니다.

분명 성장환경은 사람의 성격을 만들어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모든 사람이 범죄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결국 범죄를 저지른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어떤 누구, 어떤 무엇을 변명거리로 삼을지라도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원죄를 유전되는 죄라고 생각하는 경향은 거의 없습니다. 유전되는 죄가 아니라 그저 아담과 하와라는 인류의 첫 번째 사람들이 처음으로 범한 죄가 원죄입니다. 그리고 죄를 범하고자 하는 속성이 우리의 영혼에 각인되었다기보다, 인간은 죄를 범하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죽음을 벗어난 우리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은 여러모로 어려운 본문입니다. 율법에 관한 점에서도 그렇고 아담과 예수님의 관계에 있어서도 복잡한 본문입니다. 또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더 복잡하기도 합니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명절을 앞둔 주일에 풀어낼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간단한 점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전하고자 했던 중심 내용은 아담의 죄가 유전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을 이겨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서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하고 있지만, 앞선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중점을 놓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구원받았다는 이야기가 무엇일까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에게 여러 벌을 내리시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찌보면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죽음이라는 벌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쫓아내신 또 다른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듯이 생명 나무의 열매도 먹고 영생할까 하여 그들을 내쫓았다고 말합니다.

약간 모순되어 보이는 이 두 가지 진술은 인간이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말합니다. 본래 죽음은 아담이 받은 벌이 아닙니다.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처한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죽는다는 형벌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어졌지만, 하나님의 영을 받아 생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 생명을 마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제 인간은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만 돌아갑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내려진 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놓여진 죽음을 직면하심으로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상태를 바꾸어놓으셨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순간이 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5장 1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살아있으나 죽으나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음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환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세례를 받고 난 예수님 믿는다고 고백했다고 해서 모든게 끝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다시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믿는다고 선언했다고 해서, 죄에서 완전히 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야기하면서도 죄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나, 어거스틴이 인간의 영혼에는 죄가 각인되어 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아마도 우리가 죄로부터 멀어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과 함께 이룬 평화의 상태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죄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나 언제나 죄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교만하기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다른 누군가에게 아픔을 줍니다.

명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항상 인터넷에 식구들이 모이면 싫은 이유들이 떠돌아 다닙니다. 가족이 모였을 때 하면 안 되는 이야기들도 떠돕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도는 이유는 남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상대방이 듣기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교만입니다.

많은 죄는 교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 시대에 신을 믿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지식이 상당히 향상되었다는, 신보다는 물질과 과학 문명을 추구하는 인간의 교만에 의한 현상입니다. 근원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분명 존재함에도 눈에 보이는 현상만 쫓으면 된다고 여기는 교만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낮춰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잘못을 범합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죄를 범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추석에 가족이 모인 가운데, 스스로를 낮추며 오직 평안하고 즐거운 모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또 우리의 삶 속에서 나를 낮추며 하나님만을 바라보기에 구원의 상태,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가 이어져 있는 상태를 지켜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가운데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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