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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발견하고 인정하는 믿음우리가 잃어버린 것(눅 15:8-10)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9.05 23:40
▲ James Tissot, 「The Lost Drachma」 (c.1886-94) ⓒWikimediaCommons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는데, 그가 그 가운데서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 그래서 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 누가복음서 15:8-10

1.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전통적으로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라고 해석합니다. 잃은 드라크마 동전 이야기를 본문으로 읽었습니다만, 우리에게 더 익숙한 말씀은 ‘잃은 양’ 이야기죠.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있는 양 아흔아홉 마리를 제쳐두고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거친 산을 헤매면서 찾아다니시다가 마침내 찾아서는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노력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잃은 양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특별히 오늘 누가복음은 그 잃은 양 이야기에다가 잃은 동전 이야기, 그리고 잃은 아들 이야기를 추가해서 삼종세트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앞뒤를 보면 단순히 ‘하나님이 잃은 것을 찾으신다’ 하는 말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마태복음과는 그 뉘앙스가 전혀 다릅니다. 

먼저 마태복음에서 잃은 양 비유가 나오는 곳은 18장인데, 그 주제는 ‘누가 큰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크냐?’ 하는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어린이 같은 사람이 크다.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중요하다. 작다고 어리다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죄에 빠지게 하면 안 된다. 그런 작은 사람을 하나님은 오히려 간절히 찾으신다. 그러니 작은 사람을 용서하고 돌봐야 된다. 죄인들을 오히려 감싸 안아야 된다. 빚졌는데 갚을 돈이 없는 사람 어떻게 해야 하냐? 돈 갚으라고 달달 볶다가 돈 안 갚는다고 감옥에다가 집어 넣어야 되냐? 아니다. 용서해 줘라. 여성들 아이들, 연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들을 돌봐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찾으시듯이..,”

이 이야기의 끝에 부자 젊은이가 찾아와서 말하죠. ‘선생님, 내가 지금까지 계명도 잘 지키고 말씀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기특해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 잘했다. 그런데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 가진 거 다 팔아서 작은 사람, 가난한 사람 그들을 섬겨 봐라’ 하십니다. 끝까지 마태복음은 ‘작은 자를 섬겨라. 그들이 큰 사람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2.

똑같은 비유를 가지고 오늘 누가복음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 크냐?’가 아니라, ‘누가 죄인이냐?’ 하는 물음입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뉘앙스가 다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 옆으로 몰려듭니다. 말씀도 듣고 같이 식사도 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파 사람들하고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립니다. ‘이 사람은 죄인이랑 밥도 같이 먹고 아주 죄인이랑 친구로구나.’ 2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리새파 사람들하고 율법학자들을 예수님의 적대자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적대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합니까? 적대자들이라면, ‘옳다구나. 너 잘 걸렸다. 죄인들이랑 밥을 먹어? 내가 이거 꼬투리 삼아서 공격해야지’ 했을 겁니다.

그런데 2절 말씀에 뭐라고 합니까?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투덜거렸다고 합니다. 입을 비죽거리면서 불평했다는 겁니다. 이건 적대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호의를 가지고서 지켜보는데, 조금 못마땅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원래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만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는 원칙주의자들입니다. 현실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이념에만 사로잡혀서 폭력적으로 세상에 강요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오로지 말씀에 의지해서 사람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려는 영성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믿고 있는 바가 너무나 확고한 나머지, 그 확고한 믿음의 내용을 감히 성찰하지도 못하고, 그저 신주단지처럼 꽁꽁 싸매두고 모시기만 해서, 아쉽게도 그 믿음의 내용이 점점 안에서부터 썩어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하나님 이야기를 하고 하늘나라 이야기를 합니다. 가만 봤더니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종교적인 이상향, 사회를 종교를 통해 완성해가려는 그 꿈을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설교도 들어보고, 치유하고 기적을 베푸는 곳에도 찾아와 봅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말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못마땅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저 사람, 다 좋은데, 왜 죄인들하고 어울릴까? 죄인들하고 관계를 딱 끊고 의로운 사람들끼리 정결한 사람들끼리 하나님 나라 만들어야지.’ 그래서 지금 불평하고 투덜거리고 있는 겁니다. 

그 불평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오늘의 비유 삼종세트인 것입니다. 잃은 양, 잃은 동전, 잃은 아들. 

3.

처음 시작은 잃은 양으로 시작합니다. ‘저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그래, 죄인이라고 하자. 그럼 뭐 어때서? 하나님은 바로 그런 죄인을 찾으려고 노력하시는 분이다. 그 죄인을 찾고 기뻐하시는 분이다.’ 이어서 잃은 동전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떤 여자가 동전 열 개가 있었는데, 하나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당연히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찾지 않겠어?’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잃은 아들 이야기를 합니다. ‘아들이 둘 있는데, 하나가 뛰쳐나가서 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오면, 얼마나 좋아하겠어?’

잃은 양 이야기처럼 이어지는 두 이야기도 언뜻 들으면 똑같은 이야기 같습니다. ‘잃은 것을 찾으시는 하나님, 찾고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자세히 주의를 기울여 보면, 예수님의 이야기가 점점 미묘하게 그 내용이 바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잃어버린 것은 양이었는데, 그런데 동전으로 바뀌고, 아들로 바뀝니다. 백 마리 중에 한 마리였다가, 열 개 중에 하나로 바뀌고, 둘 중 하나로 바뀝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시작했다가 점점 귀중한 것으로 바뀝니다. 마침내는 아들입니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 죄인이냐? 별거 아닌 존재냐? 아니면 귀중한 존재냐? 

또 변화하는 것은 잃어버리고 찾는 주체가 변화합니다. 목자가 양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목자가 양을 찾죠. 여자가 동전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여자가 동전을 찾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잃어버리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으로 어느 순간 슬그머니 주인공을 바꿔놓고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심판의 주체가 되고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 되어서, 하나님이 인간을 평가하고 의인을 구원하고 죄인을 심판하는 그런 식의 종교.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의인이 되느냐 죄인이 되느냐를 중시하는 종교. 그래서 나는 의인이라고 고개 쳐들고 당당하게 다니고, ‘너는 죄인이니까 눈깔아’ 하는 그런 낙인찍는 종교. 의인이 되기 위해서 무의미한 외적 행위에 매달리는 종교. 그런 종교에게 예수님이 오늘 비유를 통해서, 익숙한 비유를 슬쩍 변형시킴을 통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양처럼, 동전처럼 하나님이 나를 찾아 주겠지... 그리고 기뻐하시겠지... 하나님, 날 찾아주세요!’ 하는 거 말고, ‘너는 죄인이니까 하나님이 찾지도 않으셔~!’ 하고 면박 주고 정죄하는 그런 신앙 말고!

‘당신은 뭘 찾고 있습니까? 당신이 쓸고 닦고 샅샅이 뒤져가면서 추구하고 있는 것이 뭡니까? 들로 산으로 헤매면서 찾는 것이 뭡니까? 등불을 환히 밝히고 찾으려고 하는 그 영적 탐구가 뭡니까? 쥐엄나무 열매 먹어가면서 방탕하면서까지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마침내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그 영혼의 각성이 도대체 뭡니까?’

‘믿음으로 신앙으로 새 세상을 만들자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진짜로 원하시는 그런 새사람이 되려고는 하지 않고, 종교놀이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심판놀이 정죄놀이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예수님의 신랄한 비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이야기에 화를 내는 형이 등장합니다.

처음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그저 투덜거리고 불평했을 뿐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내면에 대한 탐구 없이 ‘의인 대 죄인’이라고 하는 도식에만 계속 빠져 있으면, 마침내는 주님께 화를 내고, 주님의 집으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는, 그런 꼴이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어찌했는지는 그들에게 맡겨두고,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구원을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잃은 양으로 동전으로 그렇게 머물러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등불을 밝혀가면서 샅샅이 온 집안을 뒤집어가면서 잃은 것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는데, 나에게 있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이 결여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왜 온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되지 못하는가? 그렇게 온 집안을, 나의 내면을 살펴야 하고, 들과 산을, 나의 외면을 살펴야 합니다.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 없는 곳에서,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절대 이룰 수 없는 나의 한계와 나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서 완전히 죄인이 되었다가, 돌아와야 합니다. 

죄인은 죄를 지은 사람이 죄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세상 법정에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잘 덮어 놓고 ‘나는 괜찮지요?’ 하는 사람입니다. 회복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회복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입니다.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모든 죄가 사해지고 깨끗해진 사람입니다. 이제 세상 앞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한 번 깨끗해졌다고 해서 우리가 앞으로 평생토록 계속 깨끗할 것이냐?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이런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사탄 마귀가 어느 사람의 영혼을 점령하고 있다가 쫓겨났습니다. 깨끗하게 정화되었습니다. ‘이제 다 되었다’ 하고 안심하고 있는데, 어느 날 그 귀신이 다시 와 보니까, 어? 옛날보다 더 깨끗하고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더 악한 친구 귀신을 일곱이나 더 데리고 와서 자리 잡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불교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출가하고서 계속 마음을 닦지 않으면 이전보다 더 더러워진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제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으니까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지, 나는 깨끗하지’ 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냥 안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일반 사람보다 더 더럽다는 겁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율법학자들에게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믿으신다고요? 예, 잘하고 계십니다. 율법을 잘 지키신다고요?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믿는 믿음 가지고서 그 믿음의 눈으로 뭐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 찾아주세요. 나 여기 있어요. 나 이렇게나 의로워요’ 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밝히고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무엇을 잊어버렸는지, 그렇게 우리 삶을 속속들이 샅샅이 살펴보기를 원하십니다. 그 가운데 잃은 양을 찾기도 하고, 잃은 동전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 삶의 먼지들이 구석구석 보이지 않던 더러움들이, 장롱 밑에, 침대 아래에 소파 뒤에, 바빠서 혹은 게을러서, 몰라서 혹은 짐짓 모른척하며, 그렇게 내 삶을 채우고 있던 더러움들이 속속들이 파헤쳐지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무것도 아쉬운 것 없이 호의호식 누리기만 하면서 내가 상속자야! 거들먹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돼지우리 안에서 쥐엄 열매 주워 먹으면서 거름더미에 뒹굴면서 참으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피눈물 흘리며 고민하고 마침내 깨달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찾아내시고 어깨에 둘러메고 주님의 집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기쁨으로 감격하지도 않고, 하찮게 여겨 소홀히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잃어버린 것을 그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성찰의 과정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마음속 깊이 사모하는 이들에게 주십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일까? 깊이 고민하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바로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무엇을 찾아야 합니까?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뭘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찾기만 합니까? 그럼 모든 것 넘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무엇을 주셔야 합니까?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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