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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이야기에 담긴 인권 선언‘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관계적 존재의 원수 사랑(창 1:25-31 행 13:1-3 마 5:43-48)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9.08 23:06

인간 창조,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오늘은 창조절 둘째주일이자, 교회연합주일입니다. 창조절 첫째주일인 지난주에는 ‘생명의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살펴보았지만, 오늘은 인간 창조에 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지난주 말씀에서 천지 창조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인간 창조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본문 말씀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의 시작을 보면,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는데, 이것은 관계적 존재로 둘이 합력하여 선교 사역을 감당하라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오늘이 교회연합주일이기도 한데, 교회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관계적 존재,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핵심은 바로 ‘원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럼 먼저 창세기 말씀부터 볼까요?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5-27) 

오늘 본문 말씀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첫 번째 창조 이야기와 같은 배경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인간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십니다. 그러나 두 번째 창조 이야기와 연결되는 두 번째 인간 창조 이야기에는 잘 아시다시피, 먼저 아담을 창조하고, 그의 갈비뼈로 하와를 창조하십니다(창 2:20-22).

첫 번째 창조 이야기가 조금 더 세련되고 진화되었죠? 이것은 첫 번째 인간 창조 이야기가 두 번째 인간 창조 이야기보다 후대에 쓰였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인간 창조 이야기의 배경인 기원전 9세기경 솔로몬 왕조 시대보다 400여 년이 지난 바벨론 포로기 때 편집된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튼 첫 번째 인간 창조 이야기의 핵심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인데, 그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맥락을 놓치고, 문자적 보편성을 강조하면 서구 신학이 지금까지 잘못된 해석한 걸어온 것처럼 이상한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먼저 이 말씀은, 서구 신학이 해석하듯, 인간의 권리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천부인권’ 사상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유사한 형태로 인간이 만들어졌고, 인간만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어서, 특별한 존재인 인간이 모든 피조물 위에 군림하는 특권적 존재로 파악하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 결과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도 오해하게 되죠? 먼저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 모든 피조물은 생육하고 번성하라!

여기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 그리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을, 서구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특권을 받은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던 피조물을 정복하고 남용하는 근거로 인용합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을 그 배경이나 맥락 없이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하나님의 형상’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서구 신학은 이 말씀을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존재 자체가 유비 가능하다. 곧 ‘동등성’이나 ‘동일성’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천부인권설의 기원이 됩니다. 그러나 맥락을 살펴보면, 인간이 특별한 존재이기에 다른 피조물을 착취하고 파괴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앞서 오늘 창세기 본문 인간 창조 이야기도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한 부분이라고 말씀드렸죠? 시대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시기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맥락은 바벨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곧 유대인들을 파괴하고 정복하고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해방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노예해방, 혹은 인간 해방의 말씀이 이상하게 다른 피조물을 착취하라는 말씀으로 잘못 해석되어온 것입니다.

미국 컬럼비아 신학교의 구약성서 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화려한 명령어로 쓰인 이 축복 문은 포로 생활 속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고 있는 가난과 패배에 대한 저항이요, 그들의 억눌린 처지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 권리의 선언으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다.” 따라서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어를 이렇게 재해석합니다.

생육하라! ☞ 더 이상 자손이 해를 입지 않는다.
번성하라! ☞ 더 이상 황폐하지 않는다.
땅에 충만하라! ☞ 더 이상 땅에서 유리되지 않는다.
정복하라! ☞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다.
다스리라! ☞ 더 이상 지배받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 말씀은 바벨론 포로기를 상정하고 읽을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맥락을 놓치고 서구 신학은 이것을 단지 “자연을 정복하고 이용하라!”라는 의미로만 사용하여 오늘 지구촌의 생태 위기, 기후 위기가 벌어진 것입니다. 성경 문자 하나 잘못 이해하고 해석하니, 지구촌 전체가 위험한 것입니다. 특히 서양은 여기서 ‘문명/자연’이라는 틀을 ‘서양/동양’, ‘남성/여성’, ‘기독교/타종교’의 도식으로 확장 적용하여 전자가 후자를 차별하고 다스리는 것을 당연시해 왔습니다. 

가령 산림훼손과 생태계 파괴, 동물 사육과 육식을 넘어 중세의 십자군 전쟁, 신대륙 정복과 인디언 말살 전쟁, 서양의 식민지 쟁탈전, 기독교 패권주의로 인한 이슬람 혐오, 기독교 문화를 앞세운 타자 억압 등. 하나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부정하는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은 그 어떤 인간도 더 이상 다른 인간을 지배하거나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인권 선언입니다.

자, 그런데 성서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아까 하나님의 형상을 서구 신학은 ‘존재의 유비’라고 말씀드렸죠? 그러나 최근 현대신학은 이것을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로 해석합니다. 존재가 아닌 관계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여기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죠? 삼위(三位)가 하나, 곧 하나님은 삼위(성부, 성자, 성령) 간의 관계가 완벽한 조화 가운데 일치하는 하나님인데, 우리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관계적 속성’을 본받아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이 관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성은 핵심은 사랑입니다. 나아가 이 관계성은 모든 피조물에도 해당이 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 1:29-31) 

땅의 모든 짐승과 새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십니다. 또한 인간도 잘 먹을 수 있도록 하시죠? 이렇게 게 먹거리가 부족함이 없는 세상, 그리하여 서로 사랑하고 어울리는 세상, 그 세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잘 먹고 잘사는 세상,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일꾼을 세우시고, 파송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안디옥 교회의 바울, 바나바 파송: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 바울과 바나바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행 13:1-3)

안디옥 교회가 새 인간으로 변화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의 시작입니다. 금식 기도 후에 두 사람을 안수하여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위해 이방지역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은 곧 하나님 나라 전파죠? 이렇게 관계적 존재로 둘이 선교 여행을 떠나되,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이 교회연합주일인데, 세상 모든 교회가 이렇게 연합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다시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로버스 동굴 실험’, 외부의 적을 만나야 내부의 갈등을 접고 마음을 합친다?

▲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로버스 동굴 야영장’, ‘트럭을 타고 따로 도착한 아이들’, ‘독수리 부족 깃발을 만든 아이들’, ‘마침내 하나가 되는 아이들’

1954년 터키 출신의 미국 사회심리학자인 무자퍼 셰리프(Muzafer Sherif)가 실시한 실험이 있습니다. 오클라호마 주립공원 내에 있는 로버스 동굴 근처의 야영장에서 실시되었기에, ‘로버스 동굴 공원 실험’이라고 합니다. 이 실험을 통해 셰리프는 ‘현실 갈등 이론’(realistic conflict theory)과 ‘최소집단 패러다임’(minimum group paradigm)을 완성시켜 나갔고, 1961년 동료들과 함께 『우리와 그들, 갈등과 협력에 관하여: 로버스 동굴 실험을 통해 본 집단 관계의 심리학』(에코리브르, 2012)을 출간하였습니다. 아무튼 실험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12세 소년 24명을 두 팀으로 나누어 캠프에 참여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두 팀을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았습니다. 경쟁이 본격화되자 각 팀의 결속은 놀랍도록 강화됐고(팀 이름도 방울뱀 부족과 독수리 부족으로 지었습니다), 상대 팀에 대한 증오도 매우 높아졌습니다. 사실 두 팀은 그냥 캠프에서 경쟁했을 뿐인데, 이들은 빠른 속도로 결집해 상대를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이 고조되면서 밤에 서로의 캠프를 급습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죽여버리겠다.”라는 위협도 등장했습니다. 서로의 감정이 너무 고조되는 바람에 실험팀은 예정보다 빨리 실험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험 기간 1주일 만에 종료했습니다. 이것이 1단계 실험입니다. 

2단계는 이렇습니다. 실험팀은 이 두 팀을 다시 한 팀으로 묵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경쟁상대가 아니었는데도 상대에 대한 증오심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고작 1주 동안 경쟁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자 실험팀은 대책을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3단계 실험입니다. 실험팀은 한 팀으로 섞여 있는 이들 앞에 새로운 거대한 적을 등장시킵니다. 가령, “공원 관리인이 수로를 끊어버렸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라!”라는 과제를 줍니다. 이렇게 끊어진 수로를 복원하는 일은 두 팀이 협력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서로를 미워하던 아이들에게 공원 관리인이라는 더 큰 적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두 팀의 협력이 복원되었습니다.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되는 외부의 적을 만났을 때 아이들은 내부의 갈등을 접고 마음을 터놓았던 것입니다. 

『파리 대왕』, 위기의 때에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의 사회로 전락하는가?

▲ 『파리 대왕』 책 표지와 영화의 한 장면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골딩은 이 실험과 2차 세계 대전 당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1954)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1983년에 그는 이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작품의 배경은 어느 미래의 핵전쟁 시대입니다. 전쟁을 피해 피난 가던 영국 소년들이 비행기 추락으로 인하여 무인도에 고립됩니다. 소설은 그 이후에 벌이는 모험담입니다. 

소년들은 문명과는 동떨어진 곳에 고립되자, 조금씩 야만인으로 변질해갑니다. 정체불명의 외부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극한 생존 위기로 인해 오로지 힘만이 유일한 가치가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소년들은 문명 세계에서 배웠던 이성과 공감, 그리고 배려를 잃어버립니다. 나아가 신앙을 상실하고, 마침내 양심까지 버리게 됩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재지변이나 전쟁, 감염병이나 식량 위기 등의 격변으로 인해 인류가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들이 무너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의 사회가 된다는 무섭고도 불편한 진실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곧 관계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의 관계성을 파괴하고, 지금까지 지켜온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무너뜨립니다. 사탄・마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관계성을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로버스 동굴 실험’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인간은 외부의 적이 없으면 내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나요? 또한 『파리 대왕』처럼, 생존의 위기에서 야만으로 전락해야만 하나요? 지금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각자도생과 약육강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이, 세대와 세대가 분열되어 서로를 원수로 여겨 죽이려고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대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약소국을 짓밟습니다. 러시아와 중국, 나아가 미국이 그렇습니다. 목하, 지구촌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이 더 이상 아니게 된 것입니다.

앞서 셰리프가 했던 실험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서로 달라서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하기 위해서 서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방울뱀 부족과 독수리 부족은 사실 누구보다도 비슷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단지 두 부족으로 나뉘어 일주일간 따로 지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들은 피를 볼 각오까지 할 정도로 상대에 대한 증오를 불태웠습니다.

일단 반목과 차별이 시작되면 자주 만나는 것도, 대화하거나 함께 뭔가를 하는 시간도 그 상태를 호전시키지 못했습니다. 두 부족의 갈등은 만난 횟수의 증가에 따라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주 볼수록 서로의 차이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상대에 대한 증오는 더 커지고 갈등은 심화하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대한민국이 갈등을 접고 한마음이 되기 위한 새로운 세상은 ‘북한’을 적으로 둬야 하나요?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입니까? 아니 ‘미국’인가요? 헤지펀드(hedge fund)(1)나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2)일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적을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안의 ‘탐욕’과 ‘오만’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적인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3-45)

관계적 존재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랑은 원수 사랑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6-4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관계적 존재인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은 원수까지도 품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모든 교회가 연합하고, 모든 성도가 힘을 합쳐 다시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주

(1) ‘개인모집 투자신탁’을 뜻한다. 100명 미만의 투자가들로부터 개별적으로 자금을 모아 파트너십(partnership)을 결성한 뒤, 카리브 해의 버뮤다와 같은 조세회피지역에 위장 거점을 두고, 자금을 운용하는 투자신탁이다. 헤지펀드는 파생금융상품(financial derivatives, 통화, 채권, 주식 등 기초자산으로부터 파생된 금융상품)을 교묘히 조합해 도박성이 큰 신종상품을 개발하여 국제금융시장을 교란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들 헤지펀드는 보통 1,000~2,000%의 부채비율을 안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 비율이 5,000% 이상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최근 국제금융의 중핵으로 자리 잡고 있다.
(2) 군부세력과 군수산업세력 간의 상호의존체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1961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고별연설에서 처음 사용된 말이다. 2차 세계 대전 후, 지금까지 이들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사실상의 지배자로 등장했으며 끊임없이 무기를 생산, 판매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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