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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로부터 벗어남용서와 사랑(시 130:1-8; 요일 2:1-6)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09.14 22:00
▲ Jan van Eyck, 「The Ghent Altarpiece」 (1432) ⓒWikipedia

이스라엘은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절기에 맞춰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제사를 드리는 전통이 매우 깊어 오늘날까지도 광범위하게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제사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양자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성서에서 제사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에 기초해서 생겨난 하나님의 계약백성이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넓은 의미의 ‘죄’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죄’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용서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계속될 수 없으므로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무조건적일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징계 또는 제사가 있고, 양자는 모두 용서를 목표로 합니다. 용서와 아울러 감사도 제사드리는 계기이지만, 여기서는 용서와 관련해서만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 편에서 제사는 죄 고백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그에 대한 용서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죄가 제사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으로 값을 치러야 하는 죄도 있고 백성에서 끊어지는 죄도 있습니다. 이러한 제한들이 있지만, 제사의 한 가지 기능은 죄 용서에 있고, 제사에는 일종의 죄값으로 제물이 반드시 바쳐집니다.

시편기자가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죄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있고, 죄 용서가 오직 야훼께 있음을 고백하고 간구합니다. 그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찾고 그것을 간직하고 계신다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 때문에 하나님께 간구하고 또 간구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위해 하나님의 응답을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언제 어떻게 응답하실지 모르나 그는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다립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아는 나무열매를 따먹고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의 역사적 결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의 폭을 계속 줄여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간의 ‘죄’는 극복될 수 없었습니다. 문제 인식과 해결 능력의 획득은 하나님의 명령과 인간의 ‘욕심’이 충돌한 결과이고, 욕심은 죄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인간의 윤리적 능력을 증대시킬 수 없었고 욕심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욕심의 지배를 받는 그 능력은 빈번하게 심각한 파괴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경향에 비춰볼 때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능력이 아무리 극대화되어도 인간의 한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사실 앞에 사람이 겸손해질 수 있다면, 사람은 저 문제 인식과 해결 능력이 아무리 커도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한계 안에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인간에 의해 인식될 수 있어도 그 해결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는 자연에 그 영향을 끼칩니다. 자연의 생명력을 훼손시킵니다. 자연의 생명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었는데, 인간은 그 자신의 행태로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고 있으니 문제 인식과 해결 능력에 기초한 인간의 존재방식이 하나님과 충돌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점에서 ‘원죄’를 말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죄 용서는 오직 야훼께 있습니다.

요한은 그의 첫 편지를 쓰는 이유가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힙니다. 그만큼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나 그때나 지금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죄가 온세상에 끼치는 영향도 계속됩니다.

죄와 관련하여 과거에 제사가 있었다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중보하고 변호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이 다릅니다. 죄가 없을 수는 없어도 죄의 길에서 멀어지는 것은 변함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가 화목제물로 소개되지만, 그 말은 70인역 시편 4절에서 ‘용서’로 사용된 ‘힐라스모스’입니다. 이는 용서 내지 용서를 위한 제물을 뜻하므로 화목제물이란 특정한 용어로 옮기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알고 고백하는 대로 용서에 필요한 제물로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도록 그리 하셨습니다. 이는 동시에 우리가 죄의 길에 다시 들어서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를 믿는 사람들만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 그리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일치합니다. 하나님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여기서 처음 나타내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그와 그의 후손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복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고, 출애굽 후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고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도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아 모든 민족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세상 전체를 향합니다. 더 나아가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세상을 위해 일하도록 창조되었고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매개하기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써 그의 말씀 곧 그의 명령을 지키기로 서약한 자들입니다. 그의 말씀을 지킬 때에만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실천을 통해 비로서 우리 안에서 온전해집니다.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일그러뜨리고 왜곡시키는 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우리를 죄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이유입니다.

예수 안에 있습니까? 예수께서 하신 대로 하십시오.
예수를 아십니까? 그의 명령을 행하십시오.
예수를 믿습니까? 선을 행함으로 악의 길에서 떠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동행하시고 또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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