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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동체의 시작,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창 12:1-9; 행 17:16-23; 마 6:25-34)창조절 셋째 주일/기장 남신도회 주일(9월18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9.16 15:12

1. 원역사 이후,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

오늘은 창조절 셋째 주일입니다. 앞서 두 주 창조절기 동안 우리는 ‘생명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과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곧 ‘관계적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신학은 창세기 1-11장까지를 원역사라고 합니다만) 이후에, 믿음의 조상 아브람을 부르시어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말씀입니다. 구약 본문 말씀이 그렇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대가 이어지고 마침내 야곱의 열두 아들인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받고 새로운 공동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공동체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민족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새로운 공동체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공평하게 분배받은 가나안 땅에서 자유롭게 농사를 짓고 자급과 자족, 자존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보면, 자유농민과 농가를 중심으로 한, 자치와 연대, 상호부조를 이룬 ‘부족 연합체’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를 만들거나, 혹은 만들었다고 해도 계속해서 유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왕과 국가로 형성된 주변 나라들과 하나님을 왕으로 하는 이스라엘 부족 연합체는 전쟁은 물론, 생산과 경제 경쟁에서도 뒤처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제사장 나라,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 인간 왕을 요구했습니다.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러나 왕정 시대 가운데, 다윗-솔로몬 시대만 잠시 융성했고, 이후 왕국은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고 각각 앗시리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실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으로 세운 공동체는 이렇게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새로운 공동체의 본래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곧,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공평하게 시행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류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거짓 우상을 세우고 맘몬 물질 문화를 세워 참 진리와 올바른 삶의 의미,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의 참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 말씀을 보면, 아덴(아테네)에서 바울은 그런 이들에게 새로운 공동체, 곧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설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가 구현되는 새로운 공동체, 곧 하나님 나라의 지상에서의 모범이 지금 우리가 모인 교회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본질을 깨닫고 다시금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실천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은 교단 총회가 지정한 남신도회 주일인데, 아브람과 같이, 또한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시는 남신도회원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2.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 12:1-5)

▲ 가나안을 향하는 아브람

아브람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75세에 아내 사래, 그리고 조카 롯과 함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원주민인 가나안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다른 말로는 새로운 공동체의 비전이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땅을 유랑하며 새로운 공동체의 기틀을 다집니다. 말씀을 볼까요?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창 12:6-9)

이렇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새로운 가치관, 곧 새로운 공동체를 가나안 땅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새로운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요? 잠시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공중에 붕 뜬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가운데 주신 말씀이기에, 그 당시 시대 배경과 상황을 좀 더 깊이 알 때,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3. 농(農)적 삶을 위한 사유와 농신학(農神學)

기원전 13세기 말부터 12세기 초(15세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에 걸쳐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중앙 산지로 진입하였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인’이라는 뜻은 ‘강 건너나 바다 건너편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람은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왔고, 애굽에서 포로 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도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강을 건너온 히브리인들은 가나안 땅에 있던 다른 그룹들과 함께 12부족, 곧 12지파 연합체를 결성하였습니다. <단군신화>에 하늘을 숭배하는 환웅 부족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웅녀 부족이 결합하여 단군 고조선을 세운 것처럼, 12지파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스라엘 지파동맹’이라고 합니다. 이들 이스라엘 부족 연합체는 정치・경제적으로 가족 중심의 생산과 자급자족의 경제로 운영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윗과 솔로몬 이전, 곧 국가 이전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부족 연합체는 당시의 제국과 국가에 반하는 반제국적, 반국가적, 반지배적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반/지배적-제국적-국가적 구조’를 형성했을까요? 왜냐하면 이들 히브리 노예들은 해방자로서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땅이 없이 떠돌던 난민이었던 히브리 노예들은 애굽에서도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해방자이신 야훼 하나님을 통해 가나안 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이전 제국과 국가의 논리와 다른, 하나님의 법질서를 통해 땅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평등한 분배와 나눔의 경제, 그리고 함께 공존하는 정치 실현이 하나님의 뜻이자 새로운 공동체의 비전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생산의 기초인 땅의 문제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구약성경에서 복은 끊임없이 ‘땅’과 ‘자손 번영’에 관한 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땅을 약속하시죠? 결국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계명과 말씀은 가나안 왕정 지배체제가 점령한 땅과 그 땅의 지배 이념과 대결하는 것입니다. 농신학자(農神學者)이자 농철학자(農哲學者)인 서성열 목사는 『농적 삶을 위한 사유』(좋은땅, 202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농적 삶을 위한 사유』 표지

“가나안 정복은 피지배층, 특히 땅에서 쫓겨난 자들이 자유농민의 삶을 쟁취한 상징적 투영이다. 그런데 소위 기독교 문명이라고 자처하는 유럽 국가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근대화,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아시아의 땅을 착취하고 그 땅에서 대대로 살고 있던 수많은 사람(농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만들었다. 기독교 국가인 이들은 자신들을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이라고, 그리고 나머지 국가(특히 남반구 국가)들은 가나안이라 칭하며,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을 근거로 자신들의 추악한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사실 이러한 추악한 행위는 현재 자본주의 체제 아래 여전히 자행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 구약 신학자 노만 K. 갓월드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국은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이기보다는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 제국에 가깝고, 오히려 쿠바, 베네수엘라, 베트남, 이라크 같은 나라들이 초기 이스라엘에 더 가깝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그 옛날의 애굽과 바벨론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팔레스틴 사람들이 바로 그 옛날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서성열 목사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농민/농가)은 하나님으로부터 공평하게 분배받은 땅에서 자유롭게 농사(자작, 자영, 자경)지어 자급과 자족, 자존을 이룬다. 이런 자유농민/농가를 중심으로 자치와 연대, 상호부조를 이룬 부족 연합체에 기반을 둔 삶이 바로 이스라엘이 꿈꾼 이상적 삶이라고 하겠다. 나는 이러한 삶을 농적 삶이라 칭하고자 한다.”

농(農)적 삶, 곧 농신학(農神學)의 핵심입니다. 구약성경의 숨겨진 진실입니다. 한국 교회 개신교인들이 볼 수도 없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를 만들기가 쉽지 않죠? 오늘날과 같은 세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자급, 자족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걱정하며 염려합니다. 그러나 그 걱정이 끝나면 이제 영원히 그 걱정을 덜기 위해 자본과 물질을 축적하며 삽니다. 대대손손 부를 누리려고 합니다. 결국 이웃과의 연대와 상호부조는 사라집니다. 이렇게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남을 배려하는 사람은 ‘바보’라는 취급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잘 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며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제자들에게 오늘 복음서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4.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5-26)

물론 이 말씀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20)’라는 말씀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 6:24)라는 말씀도 있죠? 새로운 공동체는 이렇게 하늘의 보물을 위하여 이 땅에 미련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나누고 함께 쓰고, 배려하고 공감하고 그렇게 아름답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곧 관계적 존재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다 보살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27-32)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공동체는 이렇게 의식주는 기본적으로 배당이 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의식주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새로운 공동체, 곧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 6:33-34)

5.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그런데도 우리 인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거짓 우상을 숭배합니다. 사도행전 본문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때의 말씀이죠? 철학의 도시 아덴(그리스 아테네)에서, 사도 바울은 많은 우상과 철학자를 만납니다. 그들과 토론합니다.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 연설과 토론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 아덴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하는 바울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행 17:16-18)

바울이 말을 잘했나 봅니다. 아덴 사람들이 바울을 ‘말쟁이’라고 부릅니다. 아무튼 바울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이 바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19-21)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해결되었던 아덴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의식주가 안정이 되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습니다. 저는 이것을 ‘선악과의 빈자리’라고 부릅니다. 물론 철학은 “진리가 무엇이냐?”, “존재가 무엇이냐?”라는 형이상학적 물음을 묻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2-23)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은 누구인가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실 아덴은 노예제 사회입니다. 노예가 의식주를 책임져 주니, 자유인인 주인은 아덴에 방문한 외국인들을 통해 새로운 소식을 듣는데,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가면 새로운 공동체로 변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그렇습니다. 새로운 공동체는 종이나 자유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 평등 공동체, 곧 하나님의 의가 공평하게 시행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의가 구현되는 새로운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브람과 바울처럼 담대히 믿음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그 길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처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직 새로운 공동체의 비전을 위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동행하시며 의식주의 복을, 또한 영원한 생명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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