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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삶의 목적복을 맡은 사람(창세기 12:1-3; 요한복음 8:39-41; 갈라디아서 3:9-10)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9.18 03:24
▲ Francesco Bassano, 「Abraham vertrekt uit Haran」 ⓒWikimediaCommons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세기 12:1-3)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요한복음 8:39-41)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9-10)

본문에 나타난 두 부류의 사람들

이번 주는 창조절 셋째 주일입니다. 이번 주간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 바울의 해석까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최근에는 교회력에 따라 지정된 본문들이 서로 연결점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그 중 한 가지 본문만 선택해서 말씀을 전해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간에 선정된 본문은 모두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하는 유대인들과 논쟁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논증합니다.

세 본문에는 모두 두 부류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창세기 12장에는 하나님께 복을 받을 사람과 저주를 받을 사람, 요한복음 8장에는 하나님께 난 사람과 마귀에게 난 사람, 갈라디아서 3장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와 율법 행위에 속한 사람이 구분되며 나타납니다.

오늘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시작된 복과 저주의 구분이 사도 바울에 이르러 어떻게 믿음과 율법에 속한 사람의 이야기로 바뀌어 가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복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2018년 송구영신 예배 때 전해드린 적이 있고, 지난 추석 가정예배 말씀에서도 이를 다루었습니다. 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그가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해 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축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축복’이 되는 이유, 다른 이들에게 복을 비는 사람이 되는 이유는 그 다음 절인 3절에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고, 그를 저주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복은 온 땅에 퍼지게 됩니다.

창세기 12장 2-3절의 말씀 속에서 아브라함의 해야 할 일은 적어 보입니다. 그래서 보통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에 복을 받았다고 말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 밖에는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무언가를 행해야 하는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관련된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브라함을 축복해야 한다는 역할이 부여됩니다. 만약 아브라함을 축복하지 않고 저주한다면, 그는 복이 아닌 저주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만 본다면, 아브라함은 참으로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한 일은 하나님께서 하라는대로 고향을 떠난 것뿐인데, 앞으로 아브라함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들에게 어떤 잘못을 저지른다 할지라도, 누구도 아브라함을 욕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3절 마지막에 하신 말씀에서 하나님의 본래 의도가 나타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나님의 의도는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즉 모든 이들이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게 되는 상황을 원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사명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주변의 누구도 너를 저주하는 말을 내뱉지 못하도록 선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행동의 주체는 아브라함 주변 사람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따져보면 행동의 주체는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선하게 살아가며 남들이 자신을 축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자녀인가?

요한복음 8장에는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논쟁이 나타납니다. 본래 교회력에 따라 지정된 본문은 53-59절이기 때문에 이 부분만 읽으면,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세상에 계신 분이라는 말씀만 생각하게 됩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하신 예수님이라는 삼위일체 신앙의 기반이 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본문은 삼위일체 신앙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유명한 말씀을 전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누구의 종도 아니기 때문에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이 중심 소재가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시고자 했던 말씀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너희는 지금 죄에 매여 있기에 ‘죄의 종’이라는 이야기가 핵심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37절에서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대답만을 합니다. 유대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앞서 살펴봤던 그 이야기입니다. 자신들은 복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복은 자신들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유대인들은 그저 자신들은 선택받고 복 받은 이들이라고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논쟁은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9절에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왜 아브라함처럼 행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의 사람으로 만드시면서 내려주신 사명은 왜 지키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죄의 길을 걷는 이들은 다른 이들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에게 복을 나눌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점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는 부모의 모습을 닮아가기에,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잘못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를 깨닫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 받을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을 나눌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온 민족에게 복을 전할 사람으로 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복 받은 아브라함만을 쫓아왔기에, 자신의 복을 챙기는데 여념이 없었고, 결국 죄의 자녀, 마귀의 자녀라는 꾸짖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주의자들의 교훈에 대해 논증합니다. 과연 율법 준수가 중요한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중요한지를 따집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워낙 자주 드린 바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비교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를 구약에 나타난 율법의 폐기 선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사도 바울은 결코 율법 자체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율법을 버려도 된다고 말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율법이 아닌 행위에 집중하게 됩니다. 행위로 인해 의롭게 되는가, 믿음으로 인해 의롭게 되는가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무엇이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가의 문제의 답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도 중요한 점은 사도 바울이 행위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 자체를 부정했다면, 그가 여러 교회에 편지를 적으며 악한 일을 행하지 말라고 당부한 내용이 무의미해집니다. 행위보다는 믿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악을 삼가며 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믿음에 속한 사람은 당연히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율법의 행위가 믿음보다 낫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무엇일까요? 앞서 저희가 생각해본 바와 연결해본다면, 사도 바울이 비판하는 점은 율법이라는 조항에 매여 있는 행위, 율법에 집착하는 행위입니다.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창세기 12장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 내리시며 하신 말씀의 핵심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복 받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복을 전하기 위한 말씀임을 깨달았다고 생각됩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이유는 복 받기 위해서입니다. 율법 아래에 살아가며 하나님의 복을 받고, 그 복을 차지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율법의 저주라고 말합니다.

내가 복을 차지하기 위한 행위는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행위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저주를 받게 만듭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남이 아니라 스스로의 저주를 받으며 결국 복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복을 맡은 사람

지난 2018년 마지막 주일 예배 때 달란트 비유를 이에 빗대어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맡은 사람들이고 그 복을 남들에게 전할 사명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받은 복은 내가 누릴 복이 아니라 남들에게 나눌 복입니다. 그것을 나누지 못 하고 감쳐두었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잔치상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물질이 최고인 세상, 돈이 최고인 세상,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세상입니다. 지금 사회가 그렇게 흘러간 이유는 많은 사람이 나눔보다는 스스로를 채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복을 함께 나눈다고 생각하기보다 내가 복 받기만을 바라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여러분이 받은 복을 나누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처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며, 욕을 먹으며 내게 맡기신 복을 하나도 전하지 못하는 그런 삶에 빠지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복이 많은 이들에게 전달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복이 흘러넘친다면, 지금과 같이 돈에만 혈안 된 사회가 아니라 나눔과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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