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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택할까?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대하 28:22-25; 마 4:8-11)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09.22 01:00
▲ Rombout Van Troyen, 「King Ahaz sacrifices his son to Moloch」 (c.1605-1655) ⓒSotheby's

성서가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일반적인 역사 기록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역사 기록의 관점이 다를 뿐입니다. 기록할 사건을 신앙적 내지 신학적 관점에서 선택하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관점은 하나님 경외가 핵심이며, 우상에 대한 태도가 중요한 판단기준입니다. 그렇지만 이 관점과 기준이 오로지 종교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종교적인 태도는 상당 부분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현실들을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하스는 북이스라엘이 망하던 때 남유다의 왕이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오늘날의 시리아인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유다가 버티기는 하였지만, 전쟁이 계속된다면 패배할 공산이 컸을 것입니다. 이런 위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지금도 그런 것처럼 가장 쉽고 현실적인 방법은 제3국 특히 강대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시리아 북쪽에 있는 앗시리아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요청이 앗시리아에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호기인 것이 분명하더라도 군대파병은 댓가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에 아하스가 어떤 댓가를 치루었을지 궁금합니다.

앗시리아는 유다의 요청대로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제압하고 유다를 구해냈습니다. 그에 대한 보도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앗시라의 티글랏빌레셀은 다마마스커스에 입성했고, 아하스는 그를 만나러 그곳에 갔습니다.

그때 그는 그곳의 제단을 보고 그 규모와 모양에 압도된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이 초라하게 여겨졌나 봅니다. 아하스는 제단의 모형을 자세하게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고, 그는 그대로 제단을 만들었고, 이를 위해 본래 있던 놋제단의 위치를 변경하고 그 기능도 하나님께 물을 때로 제한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도 그의 신심의 한 표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본래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의 규모나 아름다움으로 측량되는 분이 아닙니다. 또 성전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부르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허용하시고, 사람들이 그곳을 그의 이름으로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말하자면 성전은 하나님의 거처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심을 지시하는 기능적 장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의 크기나 장식이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두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하스가 성전에 시리아식 제단을 설치하고 구조를 변경한 것은 무엇이 성전을 성전되게 하는 것인지를 잊은 탓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한 것이 신앙적 열등감의 표현이라면,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음을 암시할 것입니다. 외세 의존도 하나님을 믿지 못한 탓 아닐까요?

그는 앗시리아의 도움으로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는 했으나 앗시리아에 종속되고 위협에 시달려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앗시리아의 지원을 위해 큰 비용을 치루었는데 오히려 기대에 반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때 그는 결정적인 잘못을 범합니다. 처음에는 외세에 의존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이번에는 이방신들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것도 유다를 침공했던 시리아의 신들에게 구원의 기대를 걸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 장소는 언급되지 않지만 바로 그 시리아식 제단에서, 다시 말해, 성전에서 그리했던 것이 아닐까요? 뿐만 아니라 그는 예루살렘 곳곳에 그 신을 위한 제단을 설치하게 하고 성전 기구들을 파괴했습니다.

그는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하나님을 적대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길은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큰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이러한 아하스의 행적은 자기 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면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침공시 하나님을 의지했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랬을 것이라고 암시하는 보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노예로 삼기 위해 유다의 포로들을 사마리아로 데러갈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자 오뎃이 이스라엘 군대의 길을 가로막고 유다민들을 포로로 잡아온 것을 하나님에 대한 범죄라고 규탄하며 포로들을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의 말에 감동된 이스라엘군은 포로들을 정성껏 대접하고 채비를 갖춰 유다로 돌려보냅니다. 예언자의 말이 이러한 사건을 일으키다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이에 비춰볼 때 하나님이 이 위기 국면을 어떻게 돌파하게 하실지 조금이나마 더듬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아하스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개입과 구윈을 의지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요? 역사에 가정이란 쓸모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분명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신앙적 열등감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하나님을 버리게 했습니다. 어쩌면 불신이 신앙적 열등감의 출발일 것입니다.

아하스의 비극이 우리에게서 반복되지 않기를 빕니다.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되기를 빕니다.

예수가 성령에 의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은 사건이 우리에게 좋은 지침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시험은 먹고 마시며 사는 문제, 권력과 영광의 문제, 참 하나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탄은 세번째 시험에서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면 세상 모든 권력과 영광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누구에게나 솔깃할 수 있는 제안입니다. 사탄은 세련된 방식으로 다가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눈 한번 감고 절 한번 하면 그 모든 것을 얻는데, 이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없고 그에 대한 신뢰가 견고하지 않으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입니다.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만 섬기라는 성서의 말로 사탄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 말씀 인용은 하나님 경외와 그에 대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동시에 그 답변은 모든 권력과 영광의 기원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있을 수 없음을 함축합니다.

아하스는 이를 인정하지 못했기에 외세를 의존했고 굴욕을 당했고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세계가 그의 창조물인 것처럼 권력과 부를 비롯한 모든 것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전쟁이나 기후 위기 같은 심각한 위기에서도 그 해결의 실마리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씀과 그의 행적은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경외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행동들을 찿아낼 것입니다.

야훼 경외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하나님 나라 모형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그의 나라에서 찾는 우리 신앙, 우리의 하나님 경외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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