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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믿음의 창조, 괴로워 울부짖는 이의 소리를 듣다!(출 3:1-10 롬 3:21-31 마 8:5-13)창조절 다섯째주일/세계성만찬주일/군선교주일(2022.10.2.)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9.30 15:44

1.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니라!

창조절 다섯째주일을 맞이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세계성만찬주일(World Communion Sunday)이자 군선교주일입니다. 세계성만찬주일은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성찬에 참가함으로써 하나 됨을 확인하는 주일입니다. 유래는 1982년 페루의 수도인 리마(Lima)에 모였던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1) 총회에서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가톨릭을 포함한 전 세계의 교회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성만찬 예식서 ‘세례, 성만찬, 사역(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BEM 문서)’을 내놓으며 매년 10월 첫째 주일을 성만찬 주일로 지키기로 결정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 이형기 역, 『BEM 문서: 세례・성만찬・직제』(한국장로교출판사, 2012)와 신앙과 직제운동

‘리마 다큐먼트(Lima Documents, 리마 문서)’로 불리는 성만찬 예식서는 전 세계 교회가 교리와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가 되어 주님의 성찬에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에큐메니칼의 장을 열었습니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리마 문서를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에 견줄만한 문서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사의 새로운 획을 긋는 큰 의미와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말씀 선포 이후, 함께 성찬을 하며 세계 교회와 함께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창조절기 동안 계속해서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가치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새로운 믿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저 구약 말씀은 모세를 부르시어 히브리 노예를 구원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들을 통해 가나안에서 새로운 공동체, 곧 새로운 믿음을 만듭니다. 그러나 서신서에서 바울은 이러한 새로운 믿음을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확장시킵니다. 이방인의 믿음을 유대교의 율법 행위와 대조합니다. 이스라엘 해방공동체의 믿음을 이은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새로운 믿음의 본질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방 군인인 로마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 생명의 주인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히브리 노예와 이방인을, 그들의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사역이 오늘 세본문 말씀의 주제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새로운 믿음의 창조라고 부릅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 이집트 성카타리나 수도원의 떨기 나무와 마르크 샤갈의 <떨기나문 앞의 모세>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 3:1-4)

지난주 말씀에 모세는 애굽 공주의 손에서 자랐죠? 장성하여 왕자가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낳아준 생모이자 유모가 되는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장성한 뒤에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을 보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때마침 어떤 히브리 사람이 애굽 사람에게 맞는 것을 보고 모세는 그를 쳐죽입니다. 다음날 히브리 사람들끼리 싸울 때 모세가 싸움을 막자, 그들은 모세에게 “누가 너를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네가 나도 애굽사람처럼 죽이려 하느냐?”라는 소리를 듣고,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 들통날까, 바로 왕을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망갑니다(출 2:11-15).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양무리를 치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 세월이 40년입니다. 애굽에서 왕자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40년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80세가 된 모세에게 새로운 시간이 펼쳐집니다. 그것은 바로 애굽 왕이 죽고 애굽 땅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이 고역으로 탄식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고통 소리를 듣고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출 3:5-8)
 
노예인 히브리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듣고,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의 핵심은 마지막 본문 구절입니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9-10).” 출애굽의 시작입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출발이자 새로운 믿음의 시작인 것입니다.

2. 새로운 믿음의 시작, 비신화와 탈신화

설교 제목에 ‘새로운 믿음’이라고 했는데, 그럼 ‘헌 믿음’은 무엇이고, 또 ‘새로운 믿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헌 믿음은 불의한 바리새인들과 같이 드러난 형식에 치우치는 것이고, 새로운 믿음은 믿음 본질, 곧 참 뜻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비신화화론(非神話化論, Demythologization)’이 있습니다. 여기서 불트만이 말하는 ‘신화’는 “다른 세상의 것을 이 세상의 것으로,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삶으로, 그리고 다른 쪽의 것을 이쪽의 것으로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불트만은 성서에 나오는 ‘신적인 이야기’가 ‘이 세상의 인간적인 삶의 방식’으로 표현된 것을 신화라고 하고, 신화는 드러난 형식이 아니라, 그 의미를 해석해야 성경 본문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비신화화라고 합니다. 이러한 비신화화 작업의 결론이, 비록 서양 신학의 한계인 실존론적으로 설명하고 또 개인의 차원에서 고백되기에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트만은 너무나 복음적인 신학자이고, 우리 말로는 ‘신앙이 깊은 사람’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 말씀에 나오는 가시 떨기나무 상황 역시 신화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왜 안 타는가?’라는 드러난 신비하고 놀라운 형식보다 그 의미를 보아야 합니다. 바로 고통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처참한 상황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탈신화(脫神話)도 살펴볼까요? 탈신화는 신화적 작업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비신화보다 더 급진적인데, 성경 창세기는 완전히 탈신화적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말하는 신화는 무엇일까요? 바로 ‘고대 근동의 신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불트만의 신화 개념과 다릅니다. 불트만은 신적인 이야기의 인간적인 표현이 신화라고 하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신화는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바로 그 신화를 탈신화화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가령,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요일을 살펴볼까요? 요일 이름은 원래 고대 근동의 신 이름이었습니다. ‘월화수목금토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기원은 언제부터일까요? 바로 수메르 문명입니다. 고대 근동의 수메르에는 만신전(萬神殿)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곱 신이 있었는데, ‘하늘, 바람, 산, 물, 달, 태양, 금성’ 신이었습니다. 이들 신은 마치 로마의 원로원, 혹은 우리나라 국회처럼 사람들과 세상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3,000년 경에 7이라는 숫자는 수메르에서 경제, 정치,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죠? “러키세븐!” 성서도 7이라는 숫자는 하늘의 숫자 3과 땅의 숫자 4의 결합으로 완전수입니다. 아무튼 이 7신은 바벨론과 앗시리아 시대에도 변하지 않고 그 권위를 이어 옵니다. 

특히 수메르 사람들은 이 7신의 이름에 따라 날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태양신의 날’, ‘달신의 날’ 등. 따라서 7일이 한 주기가 되어, 신들의 이름이 반복되는 시스템을 만들어 날 수를 헤아리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7일을 한 주로 삼으면 4주마다 태음력의 한 달이 정확하게 돌아갑니다(7×4=28일). 수메르인들의 손에 의해 ‘7일 시스템’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 목요일의 신인 주피터(제우스), 토르(영화 속 토르)

그리고 로마인들은 수메르의 7일 시스템을 로마신들의 이름으로 토착화시켰습니다. 로마 신들의 이름으로 7일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달신(月), 전쟁의 신 마르스(火), 전령신 머큐리(水), 주신 주피터(木), 미의 여신 베누스(金), 농경의 신 새턴(土), 그리고 태양신(日) 등.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자 이 신들의 순서가 조금씩 바뀌어 북유럽에도 정착되었습니다. 북유럽 신화의 신들로 이름이 다시 바뀌게 된 것이죠? 마르스는 티르(Tuesday), 머큐리는 오딘(Wednesday), 주피터는 토르(Thursday), 베누스는 프리크(Friday)로 바뀌게 됩니다. 영어의 요일 이름은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문(Monday)과 선(Sunday)은 그대로 사용하죠? 태양신과 달신은 다른 신들과 별도로 그 위상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주원준, 『구약성경과 신들』 한님성서연구소, 2020 참조). 우리나라가 일월화수목금토(日月火水木金土)로 사용하는 요일 이름은 음양오행을 이용하여 수메르-로마-북유럽 신화를 이어온 요일 이름을 차용하여 사용한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 볼까요? 오늘날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렇고, 무슬림 사람들도 그렇고, 일주일의 이름을 그냥 ‘첫째 날, 둘째 날, 그리고 안식일’로 부릅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숫자로 이름을 붙였지만, 마지막 날은 하나님께서 쉬신 날, 곧 ‘안식일’로 부른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1장의 신학은 탈신화의 작업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만드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에 깃든 그 어떤 신들보다 우월하시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권능에 비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하나님 형상, 곧 관계적 존재로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공감하며 살도록 하셨으나, 힘센 인간이 약한 인간을, 힘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짓밟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새로운 믿음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울부짖는 이들의 음성입니다. 출애굽기 말씀은 이렇게 새로운 믿음은 울부짖는 이들의 신음소리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음소리는 그 사회의 비주류가 되는 난민, 소외당하는 사람, 곧 이방인에게 있습니다. 로마서 말씀과 마태복음 본문 말씀은 바로 그들에게 관심을 둡니다. 새로운 믿음의 시작도 이렇게 차별받는 이들, 곧 주류가 아닌 비주류 이방인들의 신음소리를 듣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먼저 서신서 말씀부터 볼까요?

3. 오직 믿음의 의?,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새로운 믿음은 차별이 없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고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23-26)

그렇습니다. 죄의 용서입니다. 여기에 의로우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유대교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7-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과 율법의 도식 이면에 있는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도식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앗싸(비주류)와 인싸(주류)입니다. 하나님은 앗싸를 구원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인싸가 앗싸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순간, 하나님은 출애굽 시대에 애굽을 심판하셨듯이, 그들 인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물론 인싸들이 회개하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이며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믿음의 본재적인 의미를 깨닫게 되면 그들도 구원받을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29-31) 
 
4. 한 백부장의 믿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이러한 이방인의 믿음 중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인물이 복음서에 나오는 백부장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 파울로 베로네세 <예수와 백부장>(1588)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 8:5-9)

놀라운 고백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백부장의 하인도 고쳐주시고 그를 칭찬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마 8:10-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새로운 믿음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시작은 괴로워 울부짖는 이들의 소리를 듣는 데서 나옵니다. 그들은 우리 주변의 약자들이며, 이방인이며, 소외된 자들입니다. 특별히 오늘이 세계성만찬주일인데, 세계 모든 교회가 고통받는 이들, 차별당하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주의 성찬으로 하나가 되어 평화의 세상, 하나님 나라를 열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다른 인간을 침략하고 정복하고 짓밟는 군대는 사라져야 하겠죠? 오늘은 군선교 주일인데, 이렇게 군인들에게 하나님의 고귀한 말씀, 곧 생명의 복음이 전해져 탐욕과 불의의 군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병이 되어, 새로운 믿음을 창조하여 이 땅에 평화를 일구는 군대가 되기를 또한 소망합니다.

미주

(1) 신앙과 직제위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 여러 교파의 신앙고백과 교회 조직을 비교하여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연구하는 곳이다. 여기서 ‘직제(order)’란 ‘조직법’을 뜻한다. 그 출범 기원에서 본다면 신앙과 직제운동은 WCC 출범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5년 스톡홀름에서 시작된 교회 일치와 연합운동인 ‘삶과 봉사운동’과 1927년 스위스 로잔에서 시작된 ‘신앙과 직제 운동’이라는 양대 에큐메니칼 운동이 통합되어 1937년 런던에서 WCC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실제 협의회의 조직은 미루어져서,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제 1차 세계대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조직되었다. 이후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CWME)rk 추가 되었다. 신앙과 직제위원회의 구성을 보면, 회원 교단이 아닌 천주교와 기타 교단들도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유형적 연합(Visible Unity)을 위하여 교회들 사이의 공통점들을 모색하고 교회 연합에 장애물이 되는 모든 교리적・신앙적・신학적 문제들을 연구하여 재해석하거나 또는 제거한다. 특히 세례・성찬・사역(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등에 있어서 모든 회원교회가 다 함께 참여하는 길을 모색한다. 따라서 WCC 산하 교회들의 모임에는 성찬을 같이 하게된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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