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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기적은 무엇이더냐그리스도의 살과 피(요한복음 6:53-57)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10.02 15:04
▲ 성찬 식탁은 그리스도의 해방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다. ⓒGetty Image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마지막 만찬

창조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이번 주간 성서일과에 선정된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성만찬 의례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성만찬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되어 있기에 이 둘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부분도 물론 있습니다.

다만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을 읽으시면 대부분 십자가 사건 보다는 성만찬을 먼저 떠올리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말씀이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희가 성만찬이 무엇인지 교리적인 또는 예전의 측면에서 살펴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성경에 나타난 성만찬이 어떤 형태로 전해져 왔는지, 요한복음은 이 예식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는지 살펴보고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성만찬의 시초가 된 사건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유월절이자 무교절 첫날 밤 제자들과 식탁을 나누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르는 사건입니다. 마지막 식탁의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타납니다. 다만 떡과 포도주에 축사하시고 나누신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만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에는 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에 축사하시고 이를 제자들에게 나누셨다는 이야기는 고린도전서 11장에도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만찬의 방식을 예수님께 받아서 고린도 교회에 전하였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전한 말씀은 지금 저희의 성만찬 예식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마지막 만찬은 어찌 보면 그냥 유월절 식탁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눴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어떤 예전의 원형을 보여주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런 명령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타난 마지막 만찬의 이야기만을 떼어놓고 본다면,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고가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신의 살을 내어주시고, 피를 흘리게 되실 예수님 자신을 위한 식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본래 유월절의 식사 나눔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셨음을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식탁에 참여한 이들은 출애굽의 기억을 떠올리거나 서로 나누며 해방자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또 가정에서는 이를 자녀들에게 전했습니다.

따라서 유월절 식탁은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잇는 절기 행사였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우리를 지키시고 또 해방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식이었습니다. 과거에 실현된 하나의 사건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실현될 출애굽 해방 사건을 바라보는 시간이 바로 유월절 식탁이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아마도 이런 유월절 식탁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결합시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식탁은 나누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했고, 그것을 서로에게 전했습니다. 또 유월절과 마찬가지로 어떤 한 순간에 벌어진 사건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십자가 사건을 식탁 가운데 나눴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마지막 만찬에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기념’ 외에 이후에 행해야 할 행동 강령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순간 예수님과 함께 식탁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마지막 만찬 이야기를 보면, 초대 교회에서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6절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과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가 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되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말은 사도 바울의 첨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식탁이 복음 전파를 다짐하는 시간이라고 여겼습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사도 바울은 이 식탁이 불화의 자리, 죄인들의 식탁이 되지 않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식탁은 모두가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자리가 되어야 하며, 죄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바는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의 의미와 크게 달라 보이진 않습니다. 유월절을 기념하는 행사도 하나님 앞에서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다짐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또 일반적으로 가족 단위로 절기를 지켰을 것이기 때문에 불화보다는 가정의 화합을 위한 자리였을 것입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성만찬

복음서에 나타난 마지막 만찬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고였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식탁은 공동체가 일치를 이루는 자리였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짐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을까요?

요한복음이 성만찬 제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 성만찬 예식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형식의 성만찬은 아닙니다. 또 내용도 식탁의 나눔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63절에서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앞서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하신 말씀과 대치되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요한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가 성만찬이라는 제도, 예식을 시행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행했던 것처럼 식탁 교제를 행했는지, 지금 우리가 하는대로 빵과 포도주를 나눴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살과 피에 기존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합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는 식인 행위도 아니고, 이를 대체하는 어떤 상징물인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행위도 아닙니다. 육체적인 어떤 예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이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은 이제 육체에 속하지 않고 영에 속한 이들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시고,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이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출애굽 시기에 있었던 만나 사건을 언급합니다. 만나 사건과 예수님 앞에 모여있는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광야를 떠돌던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외쳤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기적을 일으키라는 요구였습니다.

예수님 앞에 모인 이들은 오병이어를 연상케 하는 사건을 언급하며, 이것이 만나와 같은 의미인지를 묻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 기적이 무엇인지, 당신은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인지를 묻습니다.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기적을 바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두 집단은 분명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먹을 수 있었고, 예수님 앞에 모인 이들은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향해서 ‘너희가 나를 찾는 이유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지금 예수님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이나 요구하는 바는 결국 같습니다. 지금 내가 배부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든 무엇은 하든 지금 내 배를 채워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배부름이었기 때문에 배가 부른 이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합니다. 기적이라는 놀라운 사건도 이젠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자신의 배를 더욱 채워줄 새로운 기적을 요구합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지금 한순간 배를 채우는데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요한복음 공동체는 마지막 만찬에서 시작된 식탁 교제의 문제점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함께 식탁을 나누는 데에만 집중하게 되고, 먹고 마시는데 집중하게 된 식탁 교제를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생명을 얻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믿음이 그저 믿는다 고백하는 일로 끝나는 믿음은 아닐 것입니다. 영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며,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일이 믿음일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행했던 식탁 교제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식탁은 필요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식탁도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살아가겠다는 다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의 식탁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우리의 이 모든 행동, 그것이 예식이 되었건 일반적인 식탁 나눔이 되었건, 우리가 교회에 모여 하는 행동이 지금 한순간의 배부름을 위한 일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배가 차고 나면 만족해버리고, 내 배를 더 채워줄 무엇인가만 요구하게 되는 그런 모습의 신앙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그리스도와 하나되기를 바라며,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모습을 따르길 다짐하며,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십니다. 욕망으로 인해 끊임없는 배고픔에 허덕이지 않도록 우리를 참된 떡을 내려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진정으로, 참으로 채워주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영을 채워주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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