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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에서부터 소망으로고난 속의 희망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10.04 15:09
▲ Sieger Köder, 「Jesus washes Peter’s feet」 ⓒGetty Image
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고난당하는 자다.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어, 빛도 없는 캄캄한 곳에서 헤매게 하시고, 온종일 손을 들어서 치고 또 치시는구나. 주님께서 내 살갗을 약하게 하시며, 내 뼈를 꺾으시며, 가난과 고생으로 나를 에우시며,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처럼 흑암 속에서 살게 하신다. 내가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아 가두시고, 무거운 족쇄를 채우시며, 살려 달라고 소리를 높여 부르짖어도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다듬은 돌로 담을 쌓아서 내 앞길을 가로막아, 길을 가는 나를 괴롭히신다.
- 예레미야애가 3:1-9

1.

불교에서는 인간의 삶을 한마디로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비관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핵심을 한마디로 짧게 잘 짚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생로병사로부터 시작해서 복잡다난한 여러 가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잘났건 못났건 고통의 차이가 조금씩 있을 뿐, 고통 자체를 비껴가지는 못합니다. 제각각의 고통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도대체 왜 고통스러운가 하고 그 고통을 찬찬히 들여다봤더니 고통의 원인이 있답니다. 그게 바로 집착입니다. 업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번뇌라는 말도 들어보셨죠? 삶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허탄한 집착을 하게 되고, 쓸데없이 번뇌하게 되고, 무의미한 업의 사슬에 매여 있는 겁니다. 

그런 집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 바로 해탈이고 구원입니다. 삶에서 놓지 못하고 있던 허탄한 아집과 갈망을 놓아버리고, 쓸데없이 매여 있던 업에서 해방되고, 삶을 고통스럽게 하던 모든 집착을 초월해 버릴 때, 마침내 구원받은 인간, 부처가 된다는 것이지요.

복잡한 불교의 교리를 저도 정확하게는 모릅니다만 기본 골격은 이렇습니다.

그 안에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 ‘수행’이라고 말하죠, 행복해지기 위한 인간의 피나는 노력에 대한 촉구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삶에 대한 비관론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인간중심적인 긍정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2.

불교는 고통이라고 했는데, 그럼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의 삶을 뭐라고 할까요? 우리는 한마디로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삶은 소망입니다. 물론 고통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즐겁기도 하죠.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원망스럽기도 하고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무엇을 향한 소망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지금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슬프고 원망스럽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지금 현실이 아무리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그 세상적인 행복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온전한 행복을 소망하는 겁니다.

그 소망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세상 모든 것을 친히 주관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떤 고통도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고통스러움을 벗어나려고 그 원인을 고찰하고 그 원인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불교의 노력도 참 가상합니다. 그렇지만 그 고통스러움을 피해가고 도망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서 이겨내고 초월하고 극복하는 힘을 얻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너, 나를 고통스럽게 해? 그래,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 고통이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해! 나는 신앙으로 그 고통을 초월할 수 있어, 억지로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그 고통이 나를 사로잡지 못해!’

불교가 고통을 두려워하고 피해 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오히려 끌어안고 내 안에서 내 수중에서 품어내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 일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증언하듯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기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다른 어떤 사람들도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것들을 바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마침내 현실로써 누리는 겁니다.

불자들이 해탈을 위해서 깨달음을 위해서 수행을 하고 피나는 노력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인 노력일 뿐입니다. 인간 스스로에 대한 신뢰일 뿐입니다. 내 노력으로 이루어내겠다는 교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노력 안 합니까? 물론 우리도 하죠. 신앙훈련 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내 욕심을 얻기 위한 그런 노력도 아니고, 내가 노력만 하면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인간중심적인 자기 신뢰에 따른 노력이 아닙니다. 순종으로서의 노력이고, 자기 포기로서의 노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그 약속을 믿는 소망으로써의 노력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값없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선언하십니다. ‘너희들은 와라. 와서 사라. 그런데 돈도 내지 마라. 그냥 다 준다. 그저 하나님을 찾아라. 하나님을 불러라. 그러면 된다.’ 이사야 55장의 말씀입니다. 값없이 주시는데, 그냥 공짜가 아닙니다. 그 값없는 것을 사모하고 소망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 그것뿐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간절히 사모하는 것. 그것입니다.

물을 달라고 먹을 것을 달라고 매달리는 것보다, 스스로 물을 얻겠다고 먹을 것을 찾겠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면서 발버둥치는 것이 어찌 보면 더 바람직한 일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그런 모든 인생의 모습 속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하는 노력이냐? 아니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제쳐놓고 하는 노력이냐? 하는 것이죠.

바로 그 태도가 우리를 소망으로 이끌고, 그 소망이 마침내 주님을 감동시키는 겁니다. 주님의 감동이 우리를 감싸면, 우리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소망으로 충만하며, 현실 속에서 그 소망을 실현하고 누리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출발해서 절망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결국 절망 속에서 인생 대부분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소망에서 출발해서 소망을 현실로 누리려는 사람들은 소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미 모든 것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것을 소망의 선취라고 말합니다. 미리 취하고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루터의 말처럼 ‘아직도 죄인이지만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의 세상 속에 있으나 소망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3.

그런데 만약 우리의 삶 속에 아직도 절망이, 고통이, 아픔이 남아 있다면, 왜 그럴까요? 우리가 절망하고 고통받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믿지 않아서 그렇다. 절망하는 사람은 그 믿음이 가짜다. 안 믿는 거다. 제대로 못 믿는 거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삶 사이에 괴리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내 삶이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그 믿음이 내 삶 속으로 뚫고 들어와서 내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겁니다. 신앙인이지만 신앙하고 상관없이 살아간다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그 간극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보여줍니다. 오늘 예레미야의 애가를 읽었습니다. 애가는 삶의 고통과 아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에카! 에카! 슬프다! 슬프다!” 우리의 삶이 슬프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슬픔과 아쉬움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삶 자체의 고통과 아픔을 노래합니다. 원망하고 절망하고 한탄합니다. 신앙으로 어찌 해보려고 해도 되지 않는 그 절망을 노래합니다.

아픔이 깊어지니까, 오히려 이 고통이 하나님 때문 아니냐며 원망의 화살을 하나님께로 돌리기까지 합니다.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기도하는데도 듣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을 탓합니다.

그러다가 21절에서 모든 것이 역전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집니다.’(개역개정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다.’ 개역의 번역이 조금 더 원문에 가깝다고 합니다.)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혹은 ‘마음에 담아 두었다’ 이 말을 히브리어 원문 그대로 말하면, ‘슈브 엘레브; 마음으로 되돌아갔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진짜 마음으로 되돌아갔다는 겁니다. 가짜 마음, 내 허위의식, 내 욕심과 욕망의 결정체인 ‘나’라고 하는 옹졸한 마음, 그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니 나를 보니, 만족함이 없고 아프고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니 ‘에카! 에카! 슬프다! 슬프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그 마음이 문득 돌아갑니다. 어디로 돌아가나요? 진짜 마음, 내 안에 나와 함께 존재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그 품으로 안깁니다. 내 마음으로만, 내 생각으로만, 내 판단으로만 절망과 아픔을 해결하려고 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고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마음과 합해졌다는 것입니다. 내 신앙은 내 신앙대로 두고, 내 삶은 내가 알아서 하던 그런 삶, 하나님은 하나님이요 나는 나라는, 신앙과 삶이 분리된 그런 삶을 이제 벗어나서, 신앙과 삶이 하나로 일치된 경지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인간적인 생각들, 절망들, 고통들, 아픔들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삶을 소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냥 소망이 아니라, 이 긴긴 믿음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삶은 소망이구나’ 하고 깨닫고 삶을 소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4.

흔히 ‘성령 받았나?’ 하고 말하는데, 성령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나는 나대로 하나도 변한 것 없이 그대로 있으면서, 갑자기 무슨 초능력을 얻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대로 있으면서 내 능력이 늘어나고 내 소유가 불어나는 그런 것 아닙니다.

성령이 나에게 오시지만,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나를 성령에게 허락해야 합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을 때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십니다. ‘이 성에 머물러라’는 말은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무슨 특별한 곳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 맘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갈 길 내 맘대로 가던 그 삶을 멈추고 내려놓고 가만히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머무르라는 겁니다. 수동적인 사람이 되어서, 성령이 나를 주장하시도록 나를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고통을 내 힘으로 벗어나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아, 덤벼라!’ 하고 맞서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을 붙들고 껴안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겁니다. 무력한 자기 포기가 아니라, 나에게 의지하던 썩은 동아줄을 포기하는 지혜로운 포기인 것입니다. 그것이 예레미야가 고백한 ‘슈브 엘레브’ 참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내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간극이 좁혀지기 시작합니다. 

성령 속으로 들어가려면 내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내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내 삶의 한가운데에 있는 목표로 삼고 소망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헛된 것들은 참된 소망 안에서 녹아져 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침내 예레미야처럼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5.

그러고 나면, 참으로 희한한 일이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선배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고백합니다. 이 고난의 세상이, 고통의 일생이, 아픔의 순간들이, 그러나 복되고 즐겁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에 지거 쾨더 신부님의 그림을 실었습니다. 우리 발은 고난의 삶을 살아가느라 다치고 멍들고 상처 입고 더러워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우리 발 앞에 꿇어 앉으셔서, 닦아주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말씀드립니다만, 사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 앞에 더 많은 것을 내려놓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디쯤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어디를 걸어가는 중입니까? 어떻게 걸어가는 중입니까? 고통이고 아픔입니까? 아니면 소망이고 즐거움입니까? 그 발을 지금 주님께서 어루만져 닦아 주고 계십니다.

성령으로 소망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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