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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가 함께 잘 살길 원합니까?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신 8:7-18)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2.10.04 23:14

신명기는 모세오경의 결론이자 동시에 이어지는 신명기 역사의 서론에 해당하는 책으로서 사실상 구약성서의 뼈대를 형성하는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신명기(申命記, Deuteronomy)는 ‘거듭되는 율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의 유랑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설교하는 형식으로 기록된 신명기는, 출애굽기 등이 전하는 율법을 집약하여 반복합니다.

그러나 단순 반복은 아닙니다. 기원전 8세기 왕정시대의 불평등 상황을 반영하는 동시에 기원전 6세기 유배기에 최종 편집되던 당시의 정황을 반영하여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이 무엇보다 두드러지고, 그 믿음을 구체화하는 것으로서 출애굽 이래 강조되어 온 이웃사랑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직결시키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부분(7~10)은 장차 가나안 땅에서 누리게 될 복을 전망하고 있으며, 뒷부분(11~18)은 그 복을 누리게 될 때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복지에 대한 전망은 그야말로 환상적입니다. 골짜기와 산에서 물이 흐르고 샘물에서 물이 나와 시냇물이 흐릅니다. 밀과 보리,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고, 올리브기름과 꿀이 납니다. 먹을 것이 모자라 결핍을 느껴야 할 필요가 없는 땅입니다. 게다가 철과 구리 등 자원도 풍부하여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땅입니다. 가나안 복지에 대한 전망은 그렇게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 Henry Davenport Northrop,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1894) ⓒWikipedia

가나안 땅의 실상과 얼마나 부합할까요? 철과 구리가 난다는 이야기 말고는 터무니없지는 않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북부 지역을 보면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합니다. 그러나 이 전망이 단순히 이미 주어져 있는 자연적 조건 그 자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맥락상 객관적 사실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사실 생뚱맞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한 이집트 땅에 비해 가나안 땅은 보잘것없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넓고 풍요로운 나일 강 유역에 비해 가나안 땅은 짜투리 땅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풍요로운 축복의 땅이라 여긴 것은 단지 주어진 조건 그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그 땅을 향유하게 될 백성의 새로운 관계 차원에서 내다보는 전망입니다. 성서 곳곳에서 반복하여 말하고 있듯, 저마다 자기가 흘린 땀의 결과를 빼앗기지 않고 누리는 삶을 복된 삶으로 여기는 맥락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풍요로운 제국 이집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종으로서 고단한 노동의 결과를 스스로 누릴 수 없었습니다. 불평등한 사회 안에서 언제나 결핍된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반면에 장차 누리게 될 가나안 땅에서의 삶은 그와는 다르다는 것, 아니 달라야 한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고 주어진 것을 함께 누리는 사회에 대한 전망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가나안 땅은 풍요로운 복지였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누리게 될 복의 진정한 조건을 후반부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의 두드러진 어법입니다. 배불리 먹고 좋은 집에 살며,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 재산이 늘지라도 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섬겨야 복을 누린다는 말씀은 신명기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누리게 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죽음의 위협이 득실거리고 마실 물조차 없는 광야에서 보호해주시고 샘물이 솟아나게 하여 살려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먹을 것조차 없던 그 땅에서 그 조상들도 알지 못하였던 만나를 내려 굶주림을 해결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진정한 자유를 향한 삶의 여정 매 순간 경험한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그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려고 오늘 이렇게 재산을 모으도록 당신들에게 힘을 주셨음을, 당신들은 기억해야 합니다.”(17-18)

예수 그리스도를 거쳐 사도 바울에게까지 이어지는 성서의 핵심적인 정신이 이 말씀 가운데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섬긴다는 것이 그저 추상적이거나 심리적인 차원의 일이 아니고, 또한 어떤 의례적 행위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물질적 삶 가운데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시어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라는 대목은 만나의 의미를 새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당신들에게 먹이셨습니다. 이것이 다 당신들을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나중에 당신들이 잘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6)

이 말씀에 결구가 이어집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선포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3)

만나가 그저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담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겪을 때 악마가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하자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태 4:4)라고 응답하셨습니다. 바로 신명기의 이 말씀을 환기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르고 그 조상들도 모르던 만나’라고 한 것입니다. 그저 일상적인 식품으로서 낯익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단지 먹을거리 그 자체를 넘어선 오묘한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선 ‘말씀’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오묘한 진실, 곧 말씀으로서 의미는 만나가 내려지고 그것을 누리는 과정을 전하는 이야기(출애 16장)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배타적 축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모두가 공평하게 누려야 할 물질을 뜻합니다. 그렇게 물질을 나누는 삶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구현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함축하는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에 먹는 이야기가 어째서 의미심장하게 자주 등장할까요? 바로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삶 가운데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흘린 땀의 결과를 내가 누리고자 하는 열망과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누리는 것이 나만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여길 때, 반드시 내가 기여하지 않은 몫까지도 탈취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정반대로 누군가는 빼앗기는 일이 벌어집니다. 모든 계급사회의 불행한 철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신물 나게 경험한 일입니다. 반면에 지금 내가 눈앞에서 누리고 있는 것이 나만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덕분인 것으로 여길 때 배타적 독점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모두의 진정한 삶을 위하여 함께 나누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때 사람들은 비로소 누군가에게 부당하게 빼앗기지 않고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게 됩니다. 성서적 정의의 요체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누리는 모든 삶의 조건이 다른 누군가의 노고 덕분에 가능하다는 진실을 기억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말씀의 진실입니다. 가장 연약한 이들과 함께 하고 심지어는 그들과 동일화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종도 자유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 역시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인간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관계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가운데 새롭게 짜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의 진실은 사회 전체적으로 물질적 풍요를 이뤘지만 불평등과 차별이 날로 심화되어 가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도한 능력주의에 몰입되어 있습니다. 정부가 말하는 ‘공정과 상식’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점차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공정’은 ‘정의’와 상관없고 ‘상식’은 다른 의견을 몰상식으로 모는 도그마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시장의 법칙을 전면에 내세운 능력주의와 경쟁주의 밖에는 모두 몰상식으로 모는 어처구니없는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교회마저 물질적 축복을 강조할 뿐 하나님의 정의는 외면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강조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저마다의 욕망을 포장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살이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렸습니다. 그저 복 받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더 악착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그 뜻을 이루는 데 헌신을 다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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