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시간이 복을 받을 수 있는가?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는가? ⑴
랍비 데이비드 프란켈/이성훈 | 승인 2022.10.06 01:50
ⓒtheTorah
랍비 데이비드 프란켈 박사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모쉐 봐인펠트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프란켈 박사는 The Murmuring Stories of the Priestly School(VTSupp. 89)과 The Land of Canaan and the Destiny of Israel(Eisenbrauns)을 포함 다수의 저작을 출간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소재한 the Schechter Institute of Jewish Studies에서 대학원 학생들과 유대교 학생들에게 히브리 성서를 가르치고 있다.

창조 이야기는 다음의 구절로 마무리된다.

어떤 날을 성별하거나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날이 신성한 예배에 바쳐져야 하며, 불경한 활동이 금지되었음을 의미한다. 히브리 달력의 많은 날은 불경한 활동이 엄격하게 금지된, 성회로 모이는 날(미크라에이 코데쉬, מקראי קדש)로 불린다(레위기 23장을 보라). 창세기 2장 3절이 일곱째 날의 거룩해짐(sanctification)을 말한다는 점은 이 구절이 전통적으로 안식일(Shabbat) 식사를 준비하는 가운데, 그날을 거룩하게 하는 금요일 밤의 식사 기도(키두시, Kiddush) 서문에 포함되는 분명한 이유이다.

그런데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한다(bless)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복된 날의 해석들 : 전통적 해석과 현대의 해석

1.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 : 가오닉(Gaonic, 중세 유대교 영적 지도자들)

아브라함 이븐 에즈라(Avraham ibn Ezra, 1089-1167년)는 이 구절이 거룩하게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 가온(사디아 벤 요세프에 대한 언급으로 보인다, 882-942년)을 인용한다.

돈 아이작 아브라바넬(Don Isaac Abravanel, 1437-1508년)은 이 해석을 즉각 비판했는데, 그 구절이 그날을 준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날 자체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이스라엘 민족이 한참 후대에 안식일을 알게 될 때까지, 그날을 준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2. 만나와 함께 복 받았다 : 창세기 랍바(Genesis Rabbah, 랍비의 창세기 해석)와 라시

창세기 랍바 11장 2절(기원후 3세기)에 의거한 라시(Rabbi Shlomo Yitzhaki, 줄여서 Rashi, 1040-1105년)에 따르면, 이 복은 미래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여섯째 날에 안식일을 준비하면서 두 배로 받게 되는 만나를 가리킨다.

이 해석은 확실히 미드라쉬적이고 본문의 간결한 의미를 반영하지 않는데, 본문의 어떤 것도 독자들을 만나 이야기와 연결하고 있지 않으며, 사람들은 세계창조에 관한 본문이 광야에서 40년 이상 지속된 복을 가리킨다고 예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람반(Rabbi Moses ben Nachman, 1195-1270년)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본문은 미래에 일어날 어떤 것을 가리키지 않고, 창조 당시에 당장 일어날 어떤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3. 영육에 활기를 불어넣는 안식일 : 이븐 에즈라

아브라함 이븐 에즈라는 일곱째 날이 추가적인 힘을 공급해서 몸과 영혼 모두에 활력을 불어넣도록 허용된, 독특한 특성을 부여받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접근법이 성서적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중세 점성술 개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그 구절의 의미일 수는 없다. 람반은 이븐 에즈라가 이 해석을 얘기했을 때, “이에 대한 그의 발언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옳다(דברו בזה נכון למאמינים בו)”라며 풍자적으로 비판하였다.

4. 복되게 함과 거룩하게 함은 하나의 행동이다 : 라피 바이스(Rafi Weiss)

이스라엘 학자 라피 바이스(1940-1974년)는 이 구절에 관한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주어인 엘로힘(אלוהים ,하나님)이 오직 바예바라크(ויברך, 그리고 복 되게 하심) 뒤에만 언급될 뿐, 바예카데쉬(ויקדש, 거룩하게 하심)에 대해 반복되지 않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두 개의 동사가 실제로 두 개의 별개 행위보다는 하나의 행위를 표현한다는 점을 나타낸다. 복 되게 함과 거룩하게 함은 기본적으로 똑같은 하나임을 암시한다. 즉, 그날의 복됨은 그날이 거룩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본문이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그가 일곱째 날에 일을 멈추셨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을 제공한다는 점은 두 개의 동사가 실제로 하나의 행위를 나타낸다는 바이스의 주장을 더욱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잘못되어 보인다. 바예바라크와 바예카데쉬는 서로 관련이 없으며, 자연적인 쌍을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성별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고, 무엇인가를 복되게 한다는 것은 그것에게 비옥함과 행운을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22절에서 물고기와 새에게 복을 주셨을 때, 이를 통해 그들에게 거룩함을 부여하시지는 않았다. 또한 이삭이 에서에게 ‘남아 있는’ 축복을 할 때, 그에게 거룩함을 부여하지 않았다(창27:38-40).

반대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자식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 돌렸을 때(출13:1-2),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 것은 아니다. 짐승의 순전한 첫 새끼는 제단 위에서 희생되어야 했다. 이것은 그들을 향한 복이 될 수 없다! 또한 복 되게 함은 ‘성회(מקראי קדש)’라 불리는 어떤 절기에 있어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사실 바예바라크와 바예카도쉬는 성서 어떤 곳에서도 함께 나타나지 않으며(안식일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예외는 나중에 다뤄질 것이다), 이는 우연일 것 같지 않다.

바예바라크(ויברך)는 필사자의 오류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바예바라크(ויברך)를 읽음에 있어 그 정확도에 관해 질문하면서, 이것이 필사자 실수의 결과물이라고 제안하도록 나를 이끌었다. 몇몇 고려 사항이 이 주장을 지지한다.

1.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축복이 아니라) 거룩하게 했다 -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 3절에서 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 제사장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해야 했지만, 이스라엘도 이스라엘 제사장들도 결코 안식일을 ‘축복’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이스라엘에게 “거룩하게 지킬 날로 안식일을 기억하라” 명하셨고(출20:8; 또한 렘17:22; 겔20:20 참고), 에스겔에게 이와 같이 하는 것(ואת שבתותי יקדשו)이 사독 계보 제사장의 임무라고 선포하셨다. 안식일은 거룩하게 되어야 하지만 복 받지 않았다. 유사하게 출애굽기 16장 23절, 31장 15절, 느헤미야 10장 32절에 따르면 안식일은 ‘복된’ 날이 아니라 ‘거룩한’ 날이다.

2. 일반적으로 성서에서 시간은 복을 받지 않는다 – 살아있는 존재보다 시간을 복되게 한다는 바로 그 개념은 성서 문학에서 극도로 드물다. 가장 유사한 구절은 자신의 태어난 날이 복 받지 않았다는 예레미야의 수사적 탄식이다(렘20:14). 그러나 우리가 다루는 본문이 속한 제사장 문서에는 이런 종류의 용법이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성서와 마찬가지로 P에서는 오직 살아있는 존재들이 복을 받을 수 있다.

3. 복은 확산되어 간다 – 제사장 문서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를 복 주실 때마다 그것이 확산하도록 만드신다(창1:22,28; 9:1; 17:16,20; 28:3).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이 확산/증식하게 만드시는 일은 무의미할 것이다.

랍비 데이비드 프란켈/이성훈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