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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어쩌자고 이런 일을?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10.11 00:34
▲ Carlo Antonio Tavella, 「Jonah and the Whale」 ⓒWikimediaCommons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우리가 어서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내리는지 알아봅시다.” 그들이 제비를 뽑으니, 그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다.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우리에게 말하시오.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내렸소?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어디서 오는 길이오? 어느 나라 사람이오? 어떤 백성이오?”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오.” 요나가 그들에게, 자기가 주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고 말하니,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겁에 질려서 그에게 소리쳤다. “어쩌자고 당신은 이런 일을 하였소?”(요나서 1:7-10)

1. 세 사람 이야기

하나님께서 요나를 불러 말씀하십니다. “니느웨로 가서 외쳐라.”

요나는 그냥 일반인이 아닙니다. 그는 선지자입니다.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요샛말로 쿨하게 무시해 버립니다. 물론 4장 마지막에 가면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말하지만, 요나서 처음에는 그런 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요나는 그 명령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주님을 피해서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자기 생각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거나, 이후 벌어질 일을 무서워했다거나 그런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스페인으로 가는 배를 타고서, 태풍이 오는지도 모르고 천하태평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압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큰 물고기가 삼켜버리고, 요나는 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밤낮을 기도하고서 다시 살아납니다. 요나는 결국 하나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합니다.

요한복음 마지막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요2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십니다. 베드로가 누굽니까? 예수님의 일등제자입니다. 열성제자입니다. 제자들 중 으뜸입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는 지금 고기잡이하는 중입니다. 고기잡이하는 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내려와서 다시 고기잡이를 하는 중입니다.

예수님께 이끌려 복음의 길에 들어섰다가, 예수님이 안 계시자 다시 자기 길로 돌아온 겁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베드로의 길을 다시 되돌려 놓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잊고 있던 마음, 아니 굳이 ‘잊어버리고 살아야지’ 하고서 꾹꾹 눌러놓았던 그 마음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리고는 주님을 사랑하는 길을 기어이 가게 하십니다.

또 한 사람을 떠올려 봅시다.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지금 전도여행 중입니다. 온 세상을 다니면서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의 십자가를 전하는 중입니다. 가는 곳마다 환영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핍박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서, 바울은 그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브루기아, 갈라디아를 거쳐서 비두니아로 가서 전도하려고 하는데, 굳이 하나님의 영이 그 길을 막는 겁니다. 성경에는 “예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전혀 생각에도 없던 마케도니아로 억지로 발걸음을 돌리게 합니다.

2. 발길을 돌리게 하시는 하나님

세 사람의 이야기의 공통점이 뭘까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발길을 돌리게 했다는 겁니다. 발길을 돌린다고 하면, 우리는 회개를 먼저 생각합니다. ‘가는 길이 잘못되어 있으니까, 그 길을 돌려주신다. 그래서 올바른 길로 돌아온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그렇죠?

그런데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된 길이 아니라면, 그런데도 그 길을 하나님께서 굳이 돌이키려고 하신다면, 그래도 우리는 ‘감사합니다. 아멘’ 할 수 있을까요? ‘에이,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어딘가 잘못된 게 있으니까 하나님이 반대하시는 거지’

과연 그럴까요? 우리 믿음이 부족한 걸까요? 만약에, 진짜 만약에 입니다만, 정말 제대로 가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래, 네가 가는 길이 맞다는 거 안다. 그래도 가지 마라.” 하신다면! 그래도 우리는 ‘감사합니다. 아멘.’ 할 수 있을까요?

요나나 베드로나, 바울에게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름의 정당함이 다 있습니다. 그 정당함의 근거가 인간적인 것이든, 민족적인 감정이든,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선택이든, 종교적인 확신이든 간에, 나름대로의 정당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나는 왜 도망쳤습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용서받는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민족의 원수라서 갖게 되는 편향적인 적대감이 아닙니다. 나름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요구입니다. 잘못한 사람들, 의롭지 못한 사람들, 죄악을 저지른 사람들은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뉴스에 악한 범죄자들이 보도될 때, 우리는 공분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마땅한 처벌이 내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려지는 형벌이 너무나 가볍다고 생각될 때 개탄합니다. 법을 바꿔야 한다고 외칩니다. 피해자들에게는 한 마디 사과도 없으면서 재판정에서는 선처해달라고 흘리는 그 눈물을 보면서 분개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갑자기 ‘다 용서해 줘라’ 하시면 어떨까요?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저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아멘’ 하기까지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요나가 처한 상황이 그런 상황입니다. 용서받아서는 안 될 사람들, 그런데 그들을 용서하실 것만 같은 하나님, 그래서 그 길을 돌아서 버린 것입니다. 정당한 이유가 요나에게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왜 다시 고기잡이하러 갔습니까? 그의 마음 속에 고민과 번뇌를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추리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말씀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알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 확인시키는 말씀입니다. ‘너, 나를 사랑하잖아. 내가 알아. 너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 그런데 왜 이러고 있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충실합니다. 그 길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마따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의지와 결심만 가지고 어렵습니다. 인간의 한계에 봉착한 것입니다. 예수님 계실 때는 예수님 등 뒤에서 예수님이 헤쳐가시는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안 계시니 내가 스스로 헤쳐나가야 합니다.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불가능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정당한 인간적인 한계에 굴복한 겁니다. 베드로는 정당합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바울이야말로 누구보다 정당합니다. 인간적인 한계에 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의 신념,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일에 매진했습니다. 몰두했습니다. 누구도 갈 수 없다고 한 길을 십자가만 붙들고 헤쳐나갔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왜? 그건 모릅니다. 다만 ‘너의 길이 이쪽이 아니다’ 하신 겁니다.

3. 우리의 나아가는 길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는 중입니까? 우리가 나아가는 길은 정당합니까? 인간적인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끌려 가는 길입니까? 아니면 우리 인간이 판단한 정당함에 의해 인정되는 길입니까? 아니면 정말로 하나님마저도 기뻐하시는 그런 길입니까?

문제는 그 길이 정당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길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길이라도 하나님이 막으실 수도 있습니다. 바울처럼 말이지요. 정당하지 않고 의롭지 못한 길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요나처럼 말이지요. 물론 인간의 의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의를 마침내 보여주실 것입니다. 내 부족함과 연약함에 의해 주저하고 머뭇거리더라도 하나님께서 등 떠밀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말이지요.

문제는 어느 길이 올바른가, 정의로운가를 따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야 하는 길이 어디냐는 것과 그 길을 내가 지금 결단하고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배 밑창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다가 끌려 나와서 자기 사정을 고백했을 때, 선원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왜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했습니까?’ 그렇게 지적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갑니까?’ 이 말은 무지한 선원들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의 입을 빌려서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성령의 외침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길이 무엇인지, 그 길에서 내 고민은 무엇인지, 나는 왜 이 길이 어려운지, 나는 왜 이 길이 맘에 들지 않는지, 맘에 든다고 하더라도, 이 길에서 어려운 것은 무엇인지, 내가 피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가고 싶은 길은 어딘지, 그 길로는 왜 못가고 있는지, 이 길에서 내가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해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 일생일대의 고민을 왜 하나님 앞에서 하지 못하고, 왜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도망만 치냐는 겁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해결되겠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피해 다녀봐야 우리에게 닥치는 것은 폭풍우요 풍랑밖에 더 있냐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자는 겁니다. 내 인생의 문제를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도망치려고 하지 말고, 스페인으로 배 밑바닥으로 도망치지 말고, 늘상 익숙한 고기잡이 속으로 도망치지 말고, 하나님을 맞닥뜨리고 하나님을 마주 대하고 서보라는 겁니다. 도망쳐서 어쩌자는 겁니까? 하나님과는 만나보지도 못하고서 이 길이 옳은 길이지 하고 내 신념에 사로잡혀서 무작정 돌진 하지도 말자는 겁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배 밑바닥으로 도망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 십자가를 뒤로하고 고기잡으러 도망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내 사랑을 인정하는 삶. 내 신념만 가지고 돌진하지 않고, 주님의 명령을 겸허히 듣는 삶. 신앙의 삶은 이런 삶입니다. 주님을 주보고 서 있는 것입니다.

4. 성령과 하나된 삶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마주보면, 도망치지 않고 하나님과 마주서면, 우리 삶이 확 뒤바뀌고, 뭔가 진리를 깨닫고 은혜가 넘치는 삶이 우리에게 가득할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마주서고 하나님의 뜻대로 따릅니다. 순종합니다. 그런 요나에게 복된 삶이 찾아옵니까? 아닙니다. 요나는 자기가 품고 있는 정의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정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채로 남아 있습니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자기 가고 싶은 길을 주체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됩니다(요21:18). 연약하고 유약한 인간적인 한계를 이겨내고 굳세게 서지 못하고,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고민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바울도 자기가 가진 신념대로 돌진하는 그 버릇 고치지 못합니다. 바나바와 싸우고 헤어지고, 굳이 고집부려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체포됩니다.

하나님 앞에 마주서고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고 축복과 은혜가 넘치고 마냥 해피엔딩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살면, 하나님 없이 헛된 고민 헛된 노력 헛된 좌절로 점철된 삶을 살지만, 하나님 앞에 마주서면, 그 모든 고민과 노력, 좌절과 실패, 성공과 환희를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고, 하나님 손 잡고 하게 됩니다. 참된 고민을 가지고, 참된 시련을 겪으며, 참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과 하나 된 삶입니다. 

요나를 보며 뱃사람들이 말합니다. 어쩌자고 이런 일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말합니다. 어쩌자고 이런 일을?
우리 삶을 보면서 주님이 뭐라 하실지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 빙긋 웃으실 그런 삶을 살아 봅시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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