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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종교인의 창조, 정결함과 진리 가운데 온전하여 선을 행함! (민 8:5-13 고후 13:1-10 마 9:1-8)창조절 일곱째 주일(10월16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10.13 22:50

1. 로봇, 인간의 마음을 이어받은 ‘마음의 아이들’

“인간에게 쉬운 일은 컴퓨터에게 어렵고, 반대로 인간에게 어려운 일은 컴퓨터에게는 쉽다.”라는 ‘모라벡의 역설’로 유명한 로봇 공학자 한스 모라벡(H. Moravec)의 책 가운데 『Mind Children(마음의 아이들)』(1988)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의 아이들’이란 인간의 마음을 이어받은 ‘로봇’을 뜻합니다. 이 책에서 모라벡은 이렇게 말합니다.

▲ 한스 모라벡과 모라벡의 역설, 마음의 아이들
“로봇 안에 (인간의) 마음을 이식할 수 있다면, 굳이 (인간의) 마음이 특정한 몸에 결부될 필요도 없고, 특정한 신체 패턴을 고수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음을 이식하는 능력은 저장 매체에 용의주도하게 기록된 누구라도 쉽게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정보가 사라지더라도, 예컨대 그 사람의 유전자 코드, 필름 기록, 육필 기록, 의학 기록, 동료의 기억 등의 다른 정보를 통해 사라진 많은 조각을 재구성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놀라운 상상력이지만 현재 과학 기술이 그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기억하고 있는 의식의 주체를 마음이라고 한다면, 새로운 과학 기술은 이러한 마음을 인간의 몸과 결부시키지 않고 자유롭게 새로운 신체에 이식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기계든, 다른 유기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것은 역사 소설가가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시나리오로 재구성하듯, 놀라운 도구로 무장한 초 지성적인 고고학자들이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의 의식과 생각을 저장하여 거의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라벡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마어마한 시뮬레이터를 사용하여 대규모의 부활이 가능할 수도 있다.” 몸의 부활이 아니라, 의식의 부활, 마음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모라벡의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과거 거주자를 부활시킨 후, 마음 이식을 통해 영생불멸을 만드는 상황을 그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러한 모라벡의 상상력은 종교적 상상력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영혼의 부활에 관해 모라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영혼의 부활은 기계라는 미래의 신체에 다운로드 되는 과거의 영혼(마음)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이 필멸의 신체를 벗어나 완전히 해방되는 세계, 곧 ‘생물학 이후의 세계(post-biological world)’가 이제 곧, 인간의 과학 기술 발전과 함께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계적 내세(來世)’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면 종교의 신비성이나, 영성의 차원을 더는 고려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종교적 세계가 기계적으로 실현되어 종교가 필요 없는 세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라벡은 ‘우리의 마음이 낳은 아이들(Mind Children)’이 거주하는, 앞으로 다가올 ‘현세적 내세’를 『마음의 아이들』에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종교적 체험을 하기 위해서, 또한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프로그램에 로그인하거나 혹은 다운로드하면 됩니다. 

2. 포스트휴먼의 등장, 그리고 테크노 종교!

그러나 여기서 잠깐,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된 영혼’이란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영혼 구원’이라는 편협한 구원관에서 해방되어 ‘자율적인 몸을 가진 인간으로,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주체’의 차원까지 확장되어야 합니다. 포스트휴먼 철학자 캐서린 헤일스(K. Hayles)가 저보다 잘 반박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플래닛, 2013)라는 책에서 헤일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 포스트휴먼은 인간 향상인가? 아니면 다른 인간인가?, 기계인가!

“인간 의식을 컴퓨터에 다운로드함으로 기계가 인간 의식의 저장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라벡의 오류는 몸과 마음의 분리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이며 인공 신체 안에 놓인 마음이 같은 마음일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살과 피가 아니라, 금속과 플라스틱 안에 존재하는 마음은 결코 이전의 마음과 같을 수 없다.”

모라벡처럼 생물학적 몸을 기계적 몸으로 대체한 포스트휴먼이 인류의 이상적 모습일까요? 아니면 ‘자율적인 자유주의적 주체’가 인간의 본질일까요? 종교인으로서 모라벡의 편을 들기에는 너무 비관적이고 헤일스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너무 나태합니다. 게다가 유발 하라리의 경고는 그 둘 사이를 고민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잘 보여줍니다. 『호모 데우스』(김영사, 2017)에서 유발 하라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종교는 연구소에서 출현할 것이다. 이 종교는 신과는 전혀 관계없고 오로지 테크놀로지와 관계할 것이다. 이 새로운 테크노 종교(techno-religion)는 알고리즘과 유전자를 통한 구원을 약속함으로써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 그리고 죽음 이후가 아니라, 바로 이곳 지상에서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행복, 평화, 번영, 영생을 주겠다고 약속할 것이다.”

바야흐로 ‘마음의 아이들’과 포스트휴먼의 등장으로 이제 새로운 종교가 과학 기술의 힘을 빌려 탄생합니다. ‘테크노 종교’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것이 새로운 종교일까요? 오늘 말씀은 새로운 종교인의 창조입니다. 정말 새로운 종교는 연구소에서 출현할까요? 신과 관계없이 오직 과학 기술로만 가능할까요? 영생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기술의 도움으로 지금 이곳에서 영원불멸의 포스트휴먼이 되는가요? 이런 고민을 안고 말씀을 보겠습니다. 진정 새로운 종교인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고민해 봅시다.

3. 새로운 종교인의 창조, 레위인을 데려다가 정결하게 하라!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새로운 종교인이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 말씀은 새로운 종교인으로 레위인을 세우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정결하게 하고 여호와께 봉사하는 직분을 맡기십니다. 또한 복음서 말씀은 이러한 새로운 종교인의 모습으로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치십니다. 새로운 종교인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자신보다 남을 더 아끼는 마음, 이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인의 모습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새로운 종교인들을 통해 ‘죄를 사하는 권능’을 허락하십니다. 물론,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행하시는 권능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성령을 받으면 받게 되는 권능입니다(행 1:8). 이것이 새로운 종교인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본문 말씀에서 새로운 종교인의 모습을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위하며, 마침내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술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이죠? 따라서 새로운 종교인은 영원불멸의 포스트휴먼이 아니라, 정결하고 선을 행하며 권능으로 죄 사함의 권세를 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진리 가운데 온전함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사람을 입는 것이지, 기술과 기계를 통해 온전하거나 새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하나님을 위해 회막에서 임무를 수행하도록 구별된 레위인의 위임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난주 아론의 첫 제사처럼 레위인도 하나님 앞에 속죄 제사를 지내고, 물로 정결케 하는 성결 의식을 행합니다. 이것은 레위인을 일반 백성과 구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데려다가 정결하게 하라.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하게 하되, 곧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에게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그들에게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가져오게 하고 그 외에 너는 또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 제물로 가져오고 레위인을 회막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안수하게 한 후에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에게 여호와께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라.”(민 8:5-11)

따라서 새로운 종교인의 모습은 첫째, 레위인과 같이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술과 자본과 욕망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기술 사회가 되어도 변함없는 종교인의 모습입니다. 이들 레위인이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속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레위인으로 수송아지들의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네가 그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려 레위인을 속죄하고,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 세워 여호와께 요제로 드릴지니라.”(민 8:12-13)

역시 요제란 ‘흔들어 드리는 제사’라는 뜻입니다. 희생 제물의 가슴 부분을 제단 앞에서 흔들어 바치는 제사로, 앞으로 흔드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이고, 뒤로 흔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돌려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요제로 드린 제물은 하나님께서 제사장 몫으로 다시 돌려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인의 먹을 것을 챙겨주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드림으로, 참으로 진실하고 온전한 새로운 종교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모든 것, 곧 먹을 것! 입을 것! 거할 곳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4. 새로운 종교인의 창조, 선을 행하고 진리를 위하며 온전하라!

두 번째 새로운 종교인의 모습은 바울이 말한바, 세 가지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우리가 버림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13:6-10)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당부합니다. 우리가 버림받더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라! 또한 오직 진리를 위하여 살라! 마지막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 번째로 방문할 때, 그렇지 않은 자들, 곧 회개하지 않고 악을 행하며 진리를 멸시하는 불완전한 자들을 단호히 책벌할 것을 경고합니다.

“내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고후 13:1-3)

선을 행하고, 진리를 위하며, 온전하지 않은 이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너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온전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 13:4-5)

이렇게 새로운 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는 자입니다. 로봇의 몸에 인간의 기억과 마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는 이들이 참된 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진리 가운데 온전하여 선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5. 새로운 종교인의 창조,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

새로운 종교인의 창조 세 번째는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사실 마태복음 9장은 ‘치료장’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습니다. 각종 질병과 사망의 권세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 사역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로 인해 그 병자를 고치시는 기적입니다. 또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며 12년간 혈루증으로 투병하는 여인을 치료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보지 못하는 두 사람과 말 못 하는 이를 치료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말씀을 볼까요?

▲ 중풍병자와 사람들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 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 9:1-5)

예수님은 한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병자를 치료해 주십니다. 새로운 종교인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보다 남의 더 아끼는 마음, 여기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며 그때 죄를 사하는 권능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새로운 종교인들을 통해 ‘죄를 사하는 권능’을 허락하십니다. 물론,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행하시는 권능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성령을 받으면 받게 되는 그런 권능입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볼까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것이 바로 새로운 종교인의 모습입니다. 계속 마태복음 말씀을 볼까요?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9:6-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정결하며 진리 가운데 온전하여 선을 행하고, 마침내 그것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웃을 위해 실천하는 그런 참다운 종교인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제자, 곧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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