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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도끼는 쇠도끼입니다”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이사야 6:8-10)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10.18 14:29
▲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Getty Image

1.

체육대회나 성탄잔치 같은 날, 선물 추첨을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당첨자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할까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냥 넘어가자. 다시 뽑자.” 또 두 번이나 당첨되어서 옆 사람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이 체육대회 성탄잔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어떨까요? 선물 받을 사람이 그 자리에 없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이 대신 받아 버린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요? 노여워하실까요? 실망하실까요?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으실까요? 당첨자가 없으면 넘어가듯이, 그렇게 넘어가 버리실까요?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선물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아무라도 챙겨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딱 맞는 선물, 그 사람 아니면 필요 없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누구라도 받아가기만 하면 그만인 그런 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는 고심에 고심을 하십니다. 그 사람을 두고 딱 맞는 것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세신다고 하시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필요 없는지 그런 거 모르실까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가 잘 하는 것이 무엇이고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면 될지 모르실까요?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진실한 고백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좋은 것 주신다고 했는데, 왜 이런 것 주시냐? 왜 이것밖에 안 주시냐?’ 그럴 수 있죠? 솔직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매번 내 맘에 들지는 않잖아요?

하나님이 좋은 것 주신다고 할 때, 좋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으로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멋대로 살고 싶은 망나니 같은 사람, 아직 회개하지 못한 탕자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자기 관점으로 생각할 때 어떤 것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까요?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면 뭘 주실까요? 그 사람이 지금 선물을 받아들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자기 생각에 좋은 것을 주실까요? 아니면, 그 사람은 절대로 좋아하지 않을 것,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흡족해하실 그런 것을 주실까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가장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실텐데, 이 탕자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어떻게 생각할까요? ‘과연 나에게 좋은 것으로 주셨구나, 나에게 흡족하게 베푸셨구나’ 이렇게 고백할까요? 이 문제가 지금 우리 앞에도 똑같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흡족한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중에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호불호로 판단합니다. 내 맘에 드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고,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앞서 예를 든 탕자 같은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인식은 우리의 고백은, 그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 주신 선물을 앞에 두고, 이제 그 선물을 풀어보는데, 내 욕심을 먼저 지나치게 앞세워서 쉽게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앞에 두고, 은혜에 대한 나의 호불호를 벗겨내고 보자는 겁니다. 말을 바꾸면,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님이 하지 않으신 일이 뭘까? 하나님의 손길이 아닌 것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그 일이 내 맘에 들지 맘에 들지 않을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깊이 생각해 봅시다. 지금 당장 결론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두고 두고 오래오래 깊이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결론은 뭘까요? 없다는 겁니다. “어느 것도 하나님이 하지 않은 일은 없다.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내 삶에서 일어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이다!” 단순하게 ‘그래, 하나님이 온 세상 다 만드셨다는데, 이것도 다 하나님이 하셨겠지’ 이런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맨 처음 선물이야기에서 말한 것처럼, ‘나를 위한 가장 좋은 것으로 내 삶을 가득 채우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를 위한, 나만을 위한, 나에게 딱 맞는, 은혜를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 은혜의 결과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백으로, 이 결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3.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이 결론과 함께 우리 삶에, 특별히 신앙의 삶에 뒤따라오는 것은 바로 깊은 회한과 후회, 그리고 슬픔입니다. 

아니, 은혜를 확인하고 나서 슬픔이라니요? 말이 이상하지요? 그 슬픔은 은혜를 은혜로써 인식하고, 고백하고 감사하지 못한, 나에 대한 슬픔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하는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성찰입니다. 

시편 8편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돌보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그리고 나를 알면, 우리는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슬픔은 부정적인 슬픔이 아닙니다. 이 슬픔이야말로 긍정적인 슬픔이고, 거룩한 슬픔입니다. 이 거룩한 슬픔이야말로 우리 삶의 길잡이입니다. 

전도서를 보면 지혜자는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전도서 7장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공동번역 성서가 그 번역이 참 좋습니다. “웃는 것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좋다. 얼굴에 시름이 서리겠지만 마음은 바로잡힌다.”

‘감사’라는 것은 손쉬운 주제가 아닙니다. 감사를 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지만, 이차적으로는 ‘나’라는 존재의 비참함, 부족함, 무력함, 못남을 뼈저리게 느끼는 겁니다.

참된 감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갑니다. 나에게 베푸신 무한한 감사, 그럼에도 그 은혜를 받을 자격 없는 못난 나! 여기에 그치면 우리의 감사는 절망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새로운 신앙의 도약을 해야 합니다. ‘이 불안정한 상태가 신앙의 끝이 아닐텐데, 은혜의 끝이 아닐텐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고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로써 살아온 시간들을 마치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로써 살아갈 시간을 시작할 때, 회당에 들어가셔서 두루마리를 펴고 말씀을 한 구절 읽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사야 61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대한 각오와 결단이면서, 그리스도로써 살아가겠다는 대외적인 선언입니다. 

이 말씀의 중심은 ‘하나님의 영이 내게 내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냥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붙잡고 ‘너 성령 받아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울고불고 기도한다고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리고, 그 영을 우리가 받는 사건의  중심에는 오늘 함께 나눈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뼈저리게 느끼고, 동시에 나의 못난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상태, 그 어쩔줄 모르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냥 기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절망할 수도 없는 그 상황, 그래서 주님만 바라보고 있는 그 상태! 바로 그런 사람에게 비로소 성령이 임하는 겁니다.

4.

그렇게 오늘 말씀으로 드디어 돌아옵니다. 이사야 6장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유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데, 그 일을 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걱정하고 고심하고 계십니다. 그때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이사야는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어쭙잖게 나서는 무모하고 경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8절부터 읽었습니다만, 그 앞의 5절의 이야기를 보면, 이사야는 스스로를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자기 성찰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성찰의 근본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에 있습니다.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뵈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감히 만나고 그 얼굴을 보는 최고의 은혜, 은혜 중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 은혜를 느끼는 동시에 ‘나는 부정한 사람인데’, 하고 스스로를 깨닫는 겁니다. 그래서 불안정하고 긴장됩니다. 어찌할 줄 모릅니다.

그 때 한줄기 빛처럼 주님의 말씀이 들리는 겁니다. “내가 누굴 보낼까? 누가 갈까?” 이사야는 바로 이 음성을 붙잡습니다. 응답합니다. 그렇게 이사야의 삶에 새로운 돌파구가 열립니다. 새로운 차원의 삶이 펼쳐지는 겁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하는 말씀을 우리는 신앙의 현장에서 너무나 쉽게 사용합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데 성급하게 결단하게 합니다.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헌신하게 합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이 말씀을 아무 때나 고백하게 강요합니다.

물론 헌신이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결단과 헌신은 충만한 은혜에 대한 고백과, 철저한 자기 성찰이 있을 때 건강한 결단과 헌신이 됩니다. 충만한 은혜를 제대로 못 느끼고, 자기 성찰이 부족할 때, 무리한 결단과 헌신은 오히려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5.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은혜의 선물을 목도합니다. 그 선물은 과연 나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누리지 못할 은혜입니다. 고르고 골라서 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맞춤 서비스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는 우리가 됩시다. 그렇게 기뻐하는 우리가 됩시다.

오늘 우리는 또한 나의 부족하고 못남을 목도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도 그 절망의 늪에서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내 죄악의 현실이 버무러진 현실 속에서, 나를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침내 들을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아니면 안 되게, 준비된 것처럼,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응답도, 내가 아니면 안 되게 그렇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응답을 통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신앙의 새로운 차원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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