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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가슴으로”체념의 시대를 넘어서는 지혜와 희망(에베소서 5:15~20)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2.10.18 21:50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서신이지만 사실은 사도 바울이 살아 있을 때보다 한참 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고 교회의 시대가 시작될 즈음의 상황입니다. 대략 주후 1세기 말경으로 바울 이후 40여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고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믿음의 열정 또는 그 믿음을 지키고 설파하고자 했던 사도들의 생생한 카리스마보다는 조직으로서의 교회, 제도로서의 교회가 현실적으로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종말론적 기대로 가득 찬 급진적 공동체에서 조직적 격식을 갖춘 제도로서 교회로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교회는 교회 자체의 존립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입니다. 반면에 제도화된 교회는, 그것이 교회인 한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전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존립 자체에 대한 관심을 깊이 반영합니다. 왜 그렇게 변화되었을까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자신들의 당대에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세대가 지나고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동안 교회는 지체되는 종말, 곧 지체되는 새로운 세계에 대비하여 자신을 준비하여야 하는 과제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컨대 사도행전이 전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생활의 모습은 어느덧 사라지고, 저마다 일상의 생활에 근거를 두면서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숭고한 뜻 또는 어떤 정신과 이념이 제도화될 때 그것은 이중의 의미를 지닙니다. 한편으로는 정신과 이념이 현실로서 뿌리를 내리게 되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제도화는 언제나 퇴행적인 요소를 동반합니다. 제도 자체가 굳어지고 결국 공동체의 역동성이 약화되는 경향을 띱니다.

에베소서가 반영하고 있는 교회의 시대는 그 이중성을 안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보존하고 그 복음을 따르는 공동체를 보존할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대안이었지만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복음의 역동성이 훼손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에베소서는 그 위기의 산물이며 동시에 그 위기의 극복 대안이었습니다.

본문말씀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대안으로서 공동체의 덕목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구약성서 이래 유대교의 덕목을 반영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있던 그리스ㆍ로마 세계의 덕목을 반영하면서도, 고유한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을 이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가 요원해진다고 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말씀은 바로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한 하나의 답입니다. 기대하는 그 세계에 대한 꿈을 지금 몸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 구원에 대한 전망을 저버려서는 안 되지만 그것을 그저 미래의 일로 미뤄두지 않고 지금 그 믿음에 부합하는 삶을 이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은 새로운 소망, 새로운 세계를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의 부단한 훈련과 노력에 관한 권면입니다.

첫 번째로 본문말씀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조심하여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평범한 교훈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길을 의미합니다. 바로 앞에서 말합니다.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 주실 것이다.”(5:14)

그리스도 안에서 빛의 자녀로, 죽음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것을 얻을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소진시킬 뿐인 세상의 길이 아니라,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삶을 기쁨을 주고 구원을 맛보게 해주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두 번째로 세월을 아끼라 말합니다. 그것은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 권면은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종말론적 희망, 곧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악한 세태를 따라 엉뚱한 데 자신을 소진시키지 말고 새로운 삶을 위하여 투신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때’는 물론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를 뜻합니다. 그저 시간 벌라는 의미가 아니라, 해야 할 때와 말아야 할 때를 분별하고, 매순간 해야 할 것과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라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첫 번째 권면의 말씀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반복한 것은 그 뜻을 늘 새기고 되새기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묻혀 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뜻을 망각하기 쉽습니까? 그러므로 늘 깨어 그리스도의 뜻을 새기라는 것입니다.

▲ Rembrandt, 「Christ Healing Peter’s Mother-in-Law」 ⓒWikimediaCommons

네 번째로 포도주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충만하라고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에게는 말 그 자체로 보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권면입니다. 공동체 모임에서 늘 빵과 포도주를 나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과 대비되는 술 취함에 대한 경고는 진정한 기쁨이 내면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과 술 취함은 다른 문맥에서도 종종 대비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했습니다(사도 2:13). 기쁨의 열광 상태가 유사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은 외적인 그 어떤 것에 의존하여 누리는 일시적 만족이 아니라 영의 감화로 진정한 내면의 기쁨을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본문말씀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취해야 할 전형적인 덕목입니다. 아름다운 말과 노래로 서로 기쁨을 나눌 뿐 아니라, 그것으로 주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찬양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드리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 바탕을 새롭게 하려는 꾸준한 노력 가운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공동체를 이루고 그 가운데서 서로 격려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아가 진정한 삶을 가능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전해지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모임, 곧 예배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무런 맥락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침내 궁극적으로 맛보게 될 구원의 소망을 대망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교회가 취해야 할 마땅한 태도를 일깨운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희망 없는 세상 한 가운데서 진정한 희망을 일깨우며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소스타인 베블렌(Thorstein Bunde Veblen)이라는 미국의 경제학자는『유한계급론』이라는 책을 통해, 흔히 알고 있는 통념과 다른 주장을 펼침으로써 오늘 풍요를 구가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희망 없음을 일찍이 간파했습니다. 통념에 반하는 하나의 진실은, 가격이 싸지면 수요가 늘어난다는 것과는 다른 현실입니다. 오히려 가격이 비싸져야 더 잘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위 유한계급(有閑階級)의 행태입니다. 사람에게는 일정한 과시욕이 있어서 그 과시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때 기꺼이 그렇게 그 대가를 치른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만개한 사회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유한계급에게 다 빼앗겨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통념에 반론을 제기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당연히 진보적이고 따라서 사회변화의 주도세력이 된다는 것이 일반적 상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고,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거 때 보면 알잖습니까? 베블렌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 보수적이 되는 까닭이 기존의 사회체제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봤습니다. 그렇게 적응해야 겨우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기에, 거기에 자신을 다 소모하느라 다른 꿈을 꿀 여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풍자로만 여길 수 없는 통찰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희망을 잃고 절망의 상황에 빠져드는지를 통찰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소위 유한계급의 과시행태가 더욱 강화되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져 허덕이는 현상이 극단적으로 강화되고 있습니다. 어떤 변화에 대한 기대보다는 어쩌면 체념이 일상화된 현실 가운데 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그저 생존에 급급해 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세계의 도래가 묘연해진다고 여겨지는 상황 가운데서 그 희망을 지켜나가는 지혜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교회는, 결국 자신을 소진시키고 말 세상의 법도를 더 잘 따르기 위해서 전의를 불태우는 곳이 아닙니다. 자신을 소진시키고 말 그 세상의 법도를 넘어 진정으로 기쁜 삶을 누리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깨닫고, 그 길을 저마다의 삶 가운데서 구현하기 위해 모이는 곳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 그 소중함을 알아야 이를 사회에 요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체험해 볼 때 그 가치의 소중함을 더 잘 아는 법입니다. 본문말씀이 서두에서 말한 지혜란 그 실천적 지혜를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지혜를 따르는 교회는 그 지혜를 몸소 누리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예배가 단지 하나의 의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지, 어째서 우리가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진실을 깨닫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누리는 기쁨을 세상 널리 펼쳐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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