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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의인론 이해의인론의 관점에서 본 치유 ⑸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2.10.22 02:02
▲ Carl Bloch, 「Christ Healing the Sick at Bethesda」 (1883) ⓒWikimediaCommons

의인론에 대한 새로운 접근

지금까지 우리는 바르트의 의인론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의인론은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낡고 진부한 옛 교리로 여겨지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바울처럼 율법의 불가능성 앞에서 몸부림치지도 않고, 루터처럼 절박한 죄의식을 경험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저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날마다 떨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나는 하루하루를 고통 가운데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 가운데 과연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의인의 기쁨이나 의인으로 말미암은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바울이나 루터가 경험했던 절박한 상황을 좀더 오늘날의 느낌에 가까운 용어로 바꾸어 표현할 필요가 있다.(1)

우리는 오늘날 우리 자신을 의롭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많은 방법들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해서 어떤 성공을 이루게 될 때, 자신을 능력 있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 느끼고, 그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들이 선망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한 채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어야 할 그 일들이 오히려 우리를 잔인하게 몰아부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실패, 좌절, 실직, 혹은 퇴직에 대한 두려움에 끊임없이 고통을 당한다. 우리가 성공하고,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 위해 일에 몰두하면 할수록,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과 멀어지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일과 업적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지만, 오히려 그 일들을 통하여 우리가 힘들게 넘어서고 정복해야 하는 경쟁자들만을 양산할 뿐이다. 우리 자신을 의롭게 해줄 것만 같은 일들이 우리 자신을 파괴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마저 단절시키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거나 부정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자신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의롭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바르트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믿음의 겸손은 결코 개인적으로 선택한, 의도된 겸손이나 강요된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유로운 순종 안에서 나오는 자유롭고 즐거운 결정이다(CDⅣ/1, 620).

따라서 자신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내세우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다. 언제나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고, 그가 추구하는 것은 자기자신의 주장과 발전이다. 그가 아무리 그의 사랑의 대상을 향하여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초월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그 대상을 획득하고 지키고 혹은 향유하기 위하여 그 대상 앞에서 보다 강력하게 자기자신을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CDⅣ/2, 734참고). 그러므로 자신을 의롭게 하려고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오히려 자기 중심적 삶에 대한 죄의식만을 가져다줄 뿐이다.

반면에 우리 가운데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면 자신은 크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것으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려고 한다. 이들은 복음서에서 “죄인들과 세리들” 그리고 “창녀들”과 같은 죄인들을 억압하고 소외시켰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더 많은 돈과 권력과 의를 소유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죄인들을 그것들로부터 배제시킨다.(2)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억압하고 소외시킨다는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불안해하고 있으며, 자기자신이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용납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켜서 우리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노력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불안정하게 되고 사랑받지 못하게 되며 더욱 외로워질 뿐이다. 우리를 의롭게 하려는 노력들이 오히려 우리를 소외시키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한편,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는 목적에서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며, 그로써 그들 자신을 의롭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바울이 율법의 엄격성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신의 주위를 끊임없이 맴도는 불안과 걱정으로 인도한다. 혹시 무엇을 잊은 것은 없는가? 나는 충분하게 한 것인가? 나는 정말로 선한가? 이렇게 자문하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단지 하나의 업적으로서의 선을 행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이용할 뿐이다.

그의 사랑은 그 모든 형식에서 언제나 “움켜잡고, 정복하고, 소유하는 사랑, 곧 이기적인 자기사랑”이다(CDⅣ/1, 735). 이러한 사랑을 받는 대상은 언젠가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과 인정을 받고, 나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하는 행위가 오히려 나를 괴롭히고 불안과 두려움에 빠뜨린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고 우리의 업적이 지닌 가치를 신뢰할 때,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고, 마침내는 우리 자신이 의롭게 될 수 있는 진정으로 유일한 길, 곧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문제가, 비록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바울과 루터가 가졌던 그것과 꼭 같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의롭게 할 수 없다. 이것이 의인론의 첫 번째 핵심이다. 의인론은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업적과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의가 우리의 의인의 근거와 토대라는 것이다(CDⅣ/1, 617).

그러나 우리는 의인론의 두 번째 핵심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첫 번째 핵심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완전한 의인”(totus justus)가 되었다는 것이다(CDⅣ/1, 596).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의롭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이미 그분은 우리를 인정하고 용납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3)

의인과 치유

예수는 하나님의 의를 “죄인들과 세리들”, 그리고 “창녀들”에게 가져다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모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셨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의인과 치유는 전혀 다른 사건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시에 성취한 하나님의 단일한 화해 행위의 다른 두 형식들로 나타난다.

확실히, 예수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막 1:34). 그러나 예수의 치료 이야기가 지닌 신학적인 문제는 그의 고난과 십자가의 무력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제기된다: “그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고, 택하심을 받은 자이거든, 자기나 구원하라지”(눅 23:35). 예수는 이것을 할 수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을 하지 않는다. 그는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의 버림을 받은 가운데서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여기서 위대한 치료의 기적이 일어난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마 8:17). 예수는 능력과 권능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고난과 무력함을 통해서도 치료한다. 그리스도가 “떠맡지 않은 것은 구원받지 못한다”, 혹은 그리스도에 의해 “취해지지 않은 것은 치유되지 않는다”는 헬라 교부들의 구원론적 원리들은 여기서도 타당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은 “병들었고, 연약하고, 도움의 길이 없으며 장애자가 된 인간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의 영원한 삶의 일부로 삼았다. 하나님은 병과 근심을 자기의 고난과 자기의 근심으로 삼음으로써, 병과 근심을 치료한다”.(4)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와 비극적인 운명과 저주를 자신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의 걱정과 근심, 불안과 두려움, 실패와 좌절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우리에게는 자신의 평화와 생명, 가치와 존엄성을 주신다.

하나님이 병에 걸리고, 삶에서 좌절을 맛보고, 이런 저런 사유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질병과 실패와 고통을 떠맡으시고, 짊어지셨다는 성서의 증언은 순전한 복음이며, 고통의 심연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놀랍고 은혜로운 교제이다. 고통을 당할 때 누군가가 함께 한다는 것은 커다란 위로가 되며, 그것도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자비로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귀중한 선물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 자체에 의해서도 괴로워하지만,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은 그들 자신들이 가치가 없고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고, 그의 고통을 떠맡고 짊어지신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수사학적인 위로가 아닌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과 사회에서 버려진 자들과 교제하고, 병든 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마침내는 성문 밖에서 두 명의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메시지를 통하여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체험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죽음보다도 더 강한 사랑의 희생적 능력은 자연, 혹은 동료 인간들에 의한 고통이 가져다 준 절망과 증오를 극복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칼 바르트를 통하여 전통적인 의인론을 살펴보고, 이 의인론의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여기서 의인론은 낡고 진부한 옛 교리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 많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늘날 우리는 익명의 판사에 의해 판결을 받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소설 「심판」에 나오는 어떤 피고처럼, 우리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개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심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불안해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의인의 복음은 우리를 이러한 모든 불안과 막연한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준다. 우리의 업적이나 공로나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의인론의 메시지는 업적 지향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신음하며 허덕거리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치유의 복음이 될 수 있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여자들로서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판단을 받았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업적과 공로를 따지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의지하여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자들로 여겨진다는 의인론은 이 ‘업적 지향사회의 가치와 질서’(status quo)를 무력화시키는 혁명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의인론은 우리의 존엄성과 가치와 권리와 삶에 대한 책임성의 기초가 된다. 의인의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 바로 이런 사실을 일깨워 준다. 교회는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업적과 공로 사상에 사로잡혀 있는 이 불의한 세상에 적극 전파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 있다.

미주

(1) Shirley C. Guthrie, Christian Doctrine(1994), 김영선 옮김, 「기독교 신학입문」, 서울: 은성, 1998, 441-463를 참고. 이 장의 많은 부분은 의인론에 대한 새로운 그의 통찰 덕분이다.
(2) J. Moltmann은 이것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드러냈다: Der Geist des Lebens, Eine ganzheitliche Pneumatologie(1991), 김균진 옮김, 「생명의 영」,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170-176.
(3) 폴 틸리히는 “당신은 용납된다”는 제목의 설교에서 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당신이 당신보다 위대한 힘에 의해서 용납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을 단지 받아들이십시오”. P. Tillich, “You Are Accepted”, The Shaking of the Foundation, NY: Charles Scribner's Sons, 1948.
(4) J. Moltmann, 「생명의 영」, 258.
(5) D. L. Migliore, 「조직신학입문」, 183-188.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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