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회복, 성찰 그리고 온 생명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를 통해(로마서 8:18-25)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10.24 16:59
▲ 고난과 혼란으로부터 회복되는 길은 성찰에서부터 시작된다. ⓒGetty Image

1.

신약성경에는 편지가 많습니다. 바울의 편지도 있고, 다른 사도들의 편지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유독 편지가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만들고 신앙하는데, 아직 신앙의 내용도 정립되어 있지 않고, 종교적인 조직도 그 체계가 완성되지 않아서, 이런저런 어려움들이 많았습니다. 갈등이 많았습니다.

어떤 교회는 파벌싸움이 있었고, 어떤 교회는 할례를 받아야 하냐 말아야 하나로 다투고, 어떤 교회는 가짜 복음이 들어와서 흔들렸고, 어떤 교회는 성만찬을 두고 말썽이 생겼고, 어떤 교회는 지도자를 세우는데 갈등이 생기고, 어떤 교회는 기껏 선교 봉사라는 좋은 일을 하면서도,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고 차별을 해서 말썽이 생겼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교회 혹은 개인들의 이런 문제점을 앞에 두고서, 이를 올바른 신앙으로 선도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를 혼자만 읽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의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읽고 두고두고 읽으면서 그 가르침을 되새겼습니다. 그렇게 신앙의 권고를 담은 편지가 오늘날까지 성경이 되어 남았습니다.

로마서도 ‘로마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로마교회는 로마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로마는 대표적인 세계도시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미국 뉴욕 같은 도시지요. 온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살고, 모든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로마교회 안에도 다문화가 공존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미성숙한 교회 내적인 갈등에다가, 문화적인 갈등까지 더해져서, 갈등이란 갈등은 다 있는, 갈등의 집합체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모습을 보고서,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그 갈등이 워낙 다방면으로 깊고 넓어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걸로는 해결되지 않아요. 그래서 로마서의 첫 부분을 보면, 바울은 ‘복음이 뭐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아주 길고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왜냐면, 복음이 뭔지, 그 복음의 근본을 제대로 아는 것이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치료책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2.

특별히 오늘 읽은 8장의 말씀에 갈등을 해결하고 회복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적혀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를 비롯한 위기의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고, 세대간의 갈등, 남녀성별 간의 갈등, 경제적인 갈등, 문화적인 갈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오늘날의 갈등과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회복은 성찰에서 출발한다’고 가르칩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위기가 와도 그런가 보다 하고, 기회가 와도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아요.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주어진 대로 그냥 숨만 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생각을 주고 이성을 주셔서,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살면 안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이죠. 그래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 생각없는 사람보다는 뭐라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생각을 아무 생각이나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그냥 아무 생각이라도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것을 생각해야 하지요.

처음에는 누구라도 ‘자기 생각’이 떠오릅니다. ‘자기 생각’, ‘내 생각’, ‘내 마음’ 말이죠. 내 의지, 내 목적, 내 욕심,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 생각이 발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생각 자체를 들여다보는 더 높은 생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일컬어서 ‘반성적인 생각, 성찰’이라고 합니다.

8장 5절과 6절을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언뜻 읽으면 ‘육신의 생각이 따로 있고, 성령의 생각이 따로 있는데, 육신의 생각을 하지 말고 성령의 생각을 해야 한다.’ 이런 말로 들립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죽음이고 성령의 생각은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생명과 죽음이 대조되는 것 같지만, 생명은 죽음의 반대가 아닙니다. 죽음을 죽지 않게 하고 살리는 것이 생명입니다. ‘같은 수준에 죽음도 있고 생명도 있어서, 죽음에 반대되는 것이 생명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생명은 죽음의 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차원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초월하고 죽음을 살려내는 개념입니다. 죽음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생명입니다. 성령의 생각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다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차원에 갇혀있는 생각들을, 미처 상상도 못했던 생명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성령의 생각입니다.

바울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모든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하고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세상을 죽음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니까, 그 생각의 결론들이 허무이고, 고난이고, 절망일 뿐입니다. 소망을 가지고는 있지만, 죽음의 차원에서만 소망하니까 그 소망의 내용이란 것이 기껏해야 눈에 보이는 별 볼 일 없는 소망에 그치고 맙니다.

바울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 소망 말고, 그런 생각 말고, 육신의 생각 말고, 성령의 생각,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소망을 하라는 겁니다.

사실은 그게 제일 어렵습니다. 상상해 봅시다. 당장 생활비가 똑 떨어졌습니다. 다음 주가 되면 다행하게도 돈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먹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굶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자, 다음 주에 돈 생기면 맛있는 것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오늘 내일 굶더라도 배고파하지 말자~’ 하면, 그렇게 됩니까? 진짜로 배가 안 고픕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인가요? 우린 인간이니까 그렇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넘어선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육신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한계를 계속 넘어서라고만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야속하고 불가능한 요구 같기도 합니다. 성령에 속한 생각을 한다고 해서 육신의 형편이 당장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에이, 아무 소용없네!’ 하고 성령에 속한 생각을 포기합니까? 아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에 속한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에 속한 생각을 하려고 해도, 육신에 속한 생각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육신에 속한 생각이 솟아납니다. 그렇다고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고 좌절해 버려도 될까요?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하면 될까요? 스스로를 포기하고 자포자기해버리면 되나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으로 가득한 나이지만, 감사하게도 성령에 속한 생각이 나에게 있어서, 그 성령의 생각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고, 나를 돌보고, 나를 위로하고, 나를 바꿔 가는 것, 그것이 회복으로 가는 첫 단계입니다.

3.

둘째로는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우리를 회복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만 읽으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영웅 같은 존재가 짠~ 하고 등장해서 피조물들을 구원해주는, 그런 영화 같은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피조물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입니까? 그것도 바로 우리들입니다. 21절을 보면 확실합니다.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회복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굽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만 합니까? 그래서 모든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과 함께 누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현실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존재,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순종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명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또 누굽니까? 피조물이기만 합니까?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딸이요, 아들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구원의 미래를 확신하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라고 해서 무슨 노예처럼 하인처럼, 그저 머리를 조아리고만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이런 정체성을 올바르게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현실로 온전히 회복될 수 있습니다.

4.

셋째로는 함께하는 탄식이 회복을 가져옵니다. 22절의 말씀을 보면, 특별한 표현이 우리의 이목을 끄는데요. 그것은 바로 ‘모든 피조물이 함께’라는 말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개인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내가 하나님을 믿고, 내가 구원을 얻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첫 번째로는 우리 개개인을 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 개개인을 넘어서서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간생명도 넘어서고, 동식물 모든 생태계도 넘어서고, 온 지구, 온 우주, 온 역사를 아우릅니다. 그런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에 응답하는 우리들의 대답이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함께!’

세상의 고난을 인식합니다. 그런데 나 혼자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이 함께!’ 온 세상의 고난을 인식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세상의 고난으로 인해 탄식하고 아파하는데, 나 혼자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요? ‘모든 피조물이 함께!’ 세상의 고난을 넘어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데, 나 혼자만 소망해서는 부족합니다. 어떻게요? ‘모든 피조물이 함께!’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누리는데, 나 혼자 누립니까? 아니죠. 어떻게요? ‘모든 피조물이 함께!’

피조물이 누구입니까? 예,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함께,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고, 노래하고, 기뻐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함께,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탄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회복은, ‘모든 피조물이 함께’ 이루는 현실입니다.

5.

오늘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구원은, 피조물된 우리가,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올바르게 성찰하고, 그 현실을 구원으로 인도해 갈 이 땅의 구원자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고, 함께 하나 되어 깊은 탄식으로 구원의 길을 갈 때, 그럴 때 이룰 수 있는 현실임을 깨닫습니다.

어두움은 빛이 없는 상태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빛이라는 존재를 가장 깊이 느낄 수 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어두움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두움 한복판에서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있는 주님의 빛을 느끼고, 그 빛과 하나 되고, 그 빛으로 이 땅을 비춰나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