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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울이 아닌 다윗인가?나는 화려함을 버렸다(사무엘상 16:6-7)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10.30 05:09
▲ Ernst Josephson, 「David and Saul」 (1878) ⓒWikipedia
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들어가는 말

이번 주일은 창조절 아홉째 주일이며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또 10월의 마지막 주일로 이제 2022년도 두 달만이 남은 시점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이기에 종교개혁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드려도 괜찮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예전에도 몇 번 드렸습니다.

종교개혁은 결국 옳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던 종교의 흐름을 다시 되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개혁의 내용이 정말 올바른 신앙으로 이어졌는지는 하나씩 따져봐야 하겠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는 우리가 중요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국 교회가 잘못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드렸었는데, 그것이 꼭 교회의 잘못, 목회자의 잘못이라고 한정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신앙을 요구해왔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요구해왔는지에 따라 교회가 그렇게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주일에 우리는 이 시대 종교가 잘못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따져볼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신앙을 품고 살아왔는지,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며 신앙생활을 해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으며,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모습인지,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 우리의 요구와 맞는지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다윗의 등장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남왕국 유다 단일 혈통 왕조의 시조가 되는 사람이 다윗이기 때문에 그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왠지 남다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서 다윗은 그다지 멋지게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새의 아들 중 막내였고, 이야기의 흐름상 그의 형들에 비해서 조금 왜소해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16장 12절은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장 1-13절까지 다윗의 첫 등장 장면에서 다윗에 관한 이야기는 12-13절 두 절에만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은 남왕국의 시조 다윗이 첫 등장하는 장면으로는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시조 다윗을 칭송하는 듯한 측면이 조금은 약해보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골리앗과의 전투 이야기가 첫 등장 장면이었다면, 다윗의 멋진 모습을 더 부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오늘 본문은 사울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로 인해 슬퍼하고 있는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십니다. 사울을 대신할 왕을 택하셨으니 그에게 가서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골리앗과의 전투 이야기가 다윗의 첫 등장이었다면,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전투에 임한 신예 장수로 그려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다윗을 하나님께서 어린 시절에 이미 택하신 자로 읽도록 만듭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에 중점이 놓여있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에 중점이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흐름은 그저 다윗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윗을 사울과 비교하면서 생각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 역시도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도록 만드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형제들을 보며 감탄하는 모습들이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사울과 다윗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외형적으로 꽤나 돋보였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무엘상 9장 2절과 10장 23절을 보면, 사울은 이스라엘 자손 중 가장 준수한 인물이었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다고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키가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울은 그들보다는 훨씬 키가 큰 인물이었습니다. 아마 덩치도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울은 자신보다 더 큰 인물, 키가 여섯 규빗인 골리앗 앞에서는 전투에 나서지 못하고 쩔쩔맬 뿐이었습니다. 한 규빗을 45cm로 보았을 때, 여섯 규빗은 270cm입니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아파트 2층 베란다에서 얼굴이 보이는 키입니다.

골리앗 이야기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다윗을 돋보이게 만드는 전승입니다. 역대상 20장에는 다윗의 수하인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누가 골리앗을 죽였는가와 상관없이, 사무엘상에 나타난 골리앗 이야기는 다윗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오늘 본문이 없이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만 있었다면, 이 이야기는 다윗만을 중점적으로 비추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며 읽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외형이 뛰어났던 사울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 앞에서는 아무 일도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집에서 그의 아들들을 보며 그들의 외형에 감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개역성경에는 ‘버렸다’로 되어있고, 새번역은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로, 공동번역은 ‘그는 이미 내 눈 밖에 났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마아스(מאס)’, ‘거부하다’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러 형태로 번역되고 있습니다만, 70인역 성경은 이를 ‘엑소우데네오(ἐξουδενόω)’, ‘경멸하다, 업신여기더’라는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마아스’도 ‘경멸하여 거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도대체 다윗의 형제 엘리압은 무슨 잘못을 했길래 하나님께서 그를 경멸하고 거부하셨던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말씀은 엘리압을 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1절에서 ‘마아스’라는 히브리어가 7절과 똑같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은 외형에 따라, 체격에 따라 이스라엘의 왕을 선택하셨던 자신의 기준입니다.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셨던 자신의 판단을 버리셨다는 의미도 됩니다. 뛰어난 외모도 중요하지 않고, 좋은 체격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왕을 선택하시는 기준은 그의 마음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울과 다윗의 마음은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앞선 15장은 사울이 왜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강조하는 점은 한 가지입니다. ‘순종’입니다.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펼쳐나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6장 14-23절은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사울에게는 악령이 씌여있었고, 다윗이 수금을 탈 때는 악령이 떠났다고 말합니다. 또 16장 13절은 다윗이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대비는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울은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골리앗에게 대항합니다. 다윗의 마음이 체격 차이에 의한 두려움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담대함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다윗이 훌륭한 인물이었다던가, 다윗을 본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다윗의 잘못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또 역사적으로 보자면 다윗은 멀쩡한 지파 동맹 체계를 무너뜨리고 독자적인 국가를 수립했다가 지파 동맹을 병합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주일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할 때, 훌륭한 다윗 왕의 이야기만을 전합니다. 다윗과 같이 용맹한 어린이가 되자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대상이기에 단편적이고 기억하기 쉬운 이야기를 전하는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일학교 뿐만 아니라 성인 대상의 말씀에서도 다윗과 같이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전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다윗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안 될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처음 다윗에 관한 전승이 형성되었을 때나 이런 전승이 수집되어 기록되었을 때는 조선의 용비어천가와 마찬가지로 다윗을 칭송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손에 놓인 성경은 우리에게 다윗을 칭송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읽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겉모습의 화려함을 버리십니다. 원어의 느낌을 더 살린다면, 오히려 그런 모습을 경멸하시고 거부하십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훌륭한 제사보다 순종함이 더 낫다고 이야기한 것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겉이 화려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을 향한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마음,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펼치려는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이 있기에 어떠한 순간에도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모습을 바라며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말씀을 정리하는 동안 이태원 할로윈 축제를 하던 중 최소 30명이 압사로 인한 심정지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많게는 100명까지 추정하고 있는 듯 합니다. 요즘 하는 말로 인싸가 되기 위해 할로윈 축제에 참가하려고 이태원을 찾은 인원이 10만명이라고 합니다.

인싸라는 단어가 가진 그 화려함에 이끌려서, 또 할로윈에는 이태원에서 놀아야 한다는 그 화려함에 이끌렸다가 너무도 어이없게 수많은 젊은 생명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시대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그러면서도 더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겉이 화려해 보이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내가 화려해질 수 있는 그런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쫓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화려함을 쫓지 말고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이를 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한 해를 두 달 남겨둔 시점에서, 또 종교개혁주일에 우리의 신앙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함께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세상의 화려함을 쫓고 있진 않았는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하나님의 말씀만을 쫓으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려함을 주시진 않을지라도,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또 우리가 화려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게 하시진 않을지라도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주시며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마음에 품으시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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