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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만든 신화를 넘어 참된 에클레시아로『코로나19 문명 전환기의 생명망 목회와 돌봄 마을』 (나눔사, 2022) ⒂
이원돈 목사(부천새롬교회) | 승인 2022.11.08 02:25
▲ Jan Matsys, 「The Apocalypse of Saint John the Evangelist on the Island of Patmos」 (1563) ⓒWikipedia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은 오늘 디지털 온라인시대를 맞이하는 우리 교회에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있다. 요한계시록 하면 우리는 666 그리고 신천지 때문에 유명해진 144,000명이라는 숫자나 애니메이션에도 등장하는 아마겟돈 전쟁, 사이비 이단이나 공포 괴담 혹은 SF 부류의 영상들을 연상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바로 로마제국의 멸망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하나님이 지배하는 새로운 문명에 대해 우리의 시작 청각 미각을 통해 총체적으로 그려낸 신앙고백을 체험하게 된다.

‘666’은 7이라는 완전수에 못 미치는 6으로서 괴물이 된 로마제국을 상징하고 있고, 14만 4,000명은 로마의 짐승 문화(우상 문화)에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는 ‘구별된 성도들,’ 다시 말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흠 없는 자들’이 그런 로마의 제국주의 짐승 문화에 저항하며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독재적 제국들이 바다의 용과 같은 괴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 로마제국에 저항하고 대항하기 위해 우리 신앙인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드러내기 위해 이 제국들이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약화시키고 무기력하게 하는가를 치열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고대 제국들은 신화와 상징으로 백성을 지배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가 지배하는 식민지 곳곳에 도시의 사람들이 날마다 보고 감탄하는 성전, 기념비, 동상, 축제, 연설, 동전, 그리고 운동경기장을 세우고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대신에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이고 가장 사악한 가짜뉴스인 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다, 바울의 신학의 주 과제는 로마의 가짜 신인 황제를 섬기는 우상숭배의 허위의식을 벗겨내는 것이고 로마 사회의 가짜뉴스와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의 첫 번째 목표는 로마의 황제라는 가짜 신과 로마 사회의 미신들 즉 가짜뉴스에 대해 사도 바울이 대항하여 새로운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이 바로 바울의 서신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은 이 문명 전환기에 서신이라는 대안 미디어를 세웠으며, 그 새로운 서신을 가지고 바울의 제자들이 유럽 전역으로 그 서신을 전달하였고 서신이 어느 지역에 도착하면 다른 지역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읽었던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모든 서신에서 그 교회에 침투해 있는 거짓 사도들에 대한 경고와 경계 곧 가짜뉴스와의 싸움을 보게된다. 초대교회 시대에 바울의 사역을 반대한 대적자들은 초기 기독교의 미디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열을 내뿜었으며,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초대교회의 네트워크와 인터넷 사이에 퍼져있는 잘못된 가짜뉴스들과 경쟁하며 가짜뉴스를 바로잡는 바이러스 퇴치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바울은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여러 사람 앞에서 굿 뉴스 즉 복음을 선포하듯 편지를 썼으며, 이 에클레시아 소통 전략이 크게 성공하여 국제적 서신 네트워크를 창조한 오늘날로 보면 일종의 새로운 서신 매체의 스타 언론인이 되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당시 헬라의 도시 시의회의 이름으로 예배하며 기도하는 모임을 일컫는 교회의 이름으로 차용하여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부르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이에 있어 오늘 우리의 본문과 연관되는 중요한 이야기가 여기 있다. 이러한 이방인과의 연대와 동맹의 의미가 있는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대대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서부터라는 것이다. 

유대 중심적 예루살렘 장소 신앙이 결정적으로 붕괴된 AD 70년 이후 당시의 로마제국은 로마 시대에 정치범들을 밧모섬으로 유배시켰던 이 유배지에서, 대략 AD95~96년경으로 당시 로마의 황제인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말기에 쓰인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때 로마제국은 유발 하라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신화와 상징으로 백성을 지배했기에 소아시아 지역 전역을 로마의 황제상 깃발 그리고 구원 평화 등 제국의 복음으로 도배하였는데, 이러한 레거시 미디어에 대항하여 팟캐스트와 유튜브가 등장하듯이 대항 미디어 등장하는데 첫 출발이 바울의 서신이라면, 요한계시록은 공포 영화, 종말 영화, SF, 괴담, 종말론 등 짐승 바다 나팔 촛대 등등 온갖 상상력과 형상을 통해 폭발적인 새로운 대항 미디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에베소에서 보낸 일주일』이라는 책에는 소아시아의 일곱 도시엔 로마의 황제들에게 봉헌된 신전과 제단이 있었고, 황제 제의를 주관하는 사제들이 있었음이 언급된다. 황제 제의는 소아시아의 시민들을 로마제국에 통합시키고 충성하게끔 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소아시아 지역 시민들은 로마제국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과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황제 숭배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로마제국이라는 신화는 이와 같은 우상숭배를 정당화하였으며 로마제국에 충성하는 자들은 신앙을 가진 자로 간주되는 반면에, 황제를 믿지 않는 자들은 무례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로마의 지배자들은 로마제국의 존속이 영원할 것이라는 신화를 창안하였던 것이다.

제국의 신화들은 핵심은 제국, 승리, 평화, 신앙, 구원, 그리고 영원이었다.(1) 다시 말해 이 신화는 영원한 황제, 영원한 로마, 그리고 영원한 로마제국을 선전하였으며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영원한 존속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요한에게 있어서 로마제국에 협력하는 자는 신앙이 없는 자이며(21:8), 제국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자는 신앙이 있는 자였다. 믿음이 있는 자의 표준은 예수님이셨다. 요한은 천상적 환상들의 반제국적 대항 이미지를 통해서 현실을 덮고 있는 제국의 신화들을 뒤집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천상적 관점으로부터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도 우리는 제국과 초대교회의 에클레시아와 미디어 전쟁 가운데 살고 있다. 오늘날도 우리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 미디어에서 활동하는 사회 평론가들, 리포터들, 그리고 다양한 전문가들이 누구이고,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가를 물어야 하며, 그들을 고용한 미디어 기업의 동기, 미디어 기업과의 그들의 관계, 그리고 미디어 기업과 정부와의 관계를 파악하여 미디어가 전하는 정보와 선전의 근원을 분석하고 비판해야만 한다.

교회는 물신 숭배를 조장하는 미디어 문화에 저항하는 대항 미디어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이 미디어 전쟁의 중심에 서 있었고, 그 미디어 전쟁의 그 한가운데가 바로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바로 예배였던 것이다. 일곱 교회에 관해 이야기하는 요한계시록은 물신 숭배에 찌든 제국의 신화를 선전하고 숭배하는 제국의 미디어 권력에 맞서 싸우며 약자를 위한 새 예루살렘 예배공동체와 제국의 미디어에 대항하는 새 미디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휴거와 아마겟돈 전쟁을 외치는 소종파의 그릇된 종말 이해가 아니라, 종말에 새 예루살렘은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며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옴을 강조한다.

약자들이 서로 연대할 뿐 아니라 산 자들로 하여금 의를 위해 살다가 박해받은 죽은 자들과 영적으로 연대하여 펼쳐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종말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특별히 코로나19 이후 교회의 예배란 단순히 교회 안에 모여있는 회중만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교회라는 건물을 넘어서서 지역과 마을 도시를 전체를 향한 대항 미디어 매체로서의 초대교회 서신과 계시록과 같은 에클레시아 매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학자들은 바울 서신에선 여성과 노예와 그리고 이방인에게 열린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주로 유럽의 이방 선교지역의 교회를 부를 때 쓰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도행전과 후기 제자들이 쓴 후기 바울 서신에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이방인들과의 연대와 동맹의 상징인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다.(2) 또한 바울도 로마서에서는 의도적으로 이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대 놓고 쓰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에는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다.

바울 생전에는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파가 강하게 존재하였으므로, 이방인을 받아들여 이방인 지역에서 이방인들과의 연대함을 강조하는 이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바울의 에클레시아는 좁은 의미의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우주적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요구받는 공동체를 의미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중심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던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헬라 도시의 시의회의 법적 집회를 에클레시아라고도 말하였는데, 이러한 헬라의 도시 의회를 나타내는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교회가 예배하며 기도하는 모임을 말하는 데에도 썼기 때문에 더욱 유대적 그리스도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은 왜 이 에클레시아를 자신이 세운 지역교회을 나타내는데 적극적으로 사용했을까? 그 이유는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지역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되지 않는 공적인 시민사회의 위상을 갖기를 원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이방인과의 연대와 동맹의 의미가 있는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쓰는 것이 초대교회 시에는 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양측의 반발을 일으켜 의도적으로 사용되지 않다가 이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이러한 장벽을 넘어서서 대대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노래는 예루살렘 성전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다시는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는 새 세상이 되는 사건이기에, 여기서는 유대인 이방인 노예와 주인, 남과 여의 모든 차별과 배제가 무너지며 새로운 연대와 동맹의 공동체가 이뤄져야 하는 곳으로, 바울이 그토록 원하던 이방인과 유대인과 주인과 노예와 남과 여가 하나 되고 연대하고 동맹하고 환대하는 새하늘과 새땅의 꿈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19 이후 땅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을 때 하늘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이 땅으로 내려오는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함과 같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그날이 올 줄로 믿고 코로나19 이후 교회가 마을의 마당과 플랫폼이 되길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인 줄로 믿는다.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 21장의 예루살렘 성전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며 다시는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는 새 땅이 되는 이 요한계시록의 예배 사건을 바라보면서 이 코로나19 재난기에 대면으로 비대면으로 동시에 드려지는 새로운 예배는 주인과 노예와 유대인과 이방인과 남과 여가 하나가 되고 연대하고 동맹하고 환대하는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의 꿈이 이루어지는 사건이어야 함을 분명히 배우게 되었다.

이제 온 ․오프라인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이 코로나19 이후의 예배는 더 이상 교인들만이 아니라 주인과 노예 유대인과 이방인을 넘어 마을공동체에 온․오프라인으로 활짝 열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는 힘써야 할 것이다.

미주

(1) 이병학 “제국의 미디어와 대한 미디어로서의 교회” 에큐메니안
(2) 박영호 “에클레시아” p267.  새물결플러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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