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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죄부 살 돈으로루터도 종교개혁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교회
허호익 퇴임교수(대전신학대학교) | 승인 2022.11.02 15:33
▲ Edward Matthew Ward, 「Luther’s first study of the Bible」 ⓒWikipedia

지금 죽으면 지옥 갈지도…

살아오면서 “내가 지금 죽으면 지옥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 잡혀 본 경험이 있습니까? 청소년기의 루터는 심한 죄의식으로 인해 여러 번 “지금 죽으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발작적인 공황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자기 영혼을 지옥 형벌에서 구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갔고, 자기 영혼을 지옥 형벌에서 구하기 위해 12년 동안 필사적인 사투를 벌였습니다.

첫째로, 당시 중세교회는 세례를 받으면 세례 이전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세례 후에는 다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한 일이라면 남김없이 실천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수도원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철야 기도와 금식 등에 매진했습니다. 한편으론 정말 제대로 선행을 하고 있는지 늘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금욕적이며 고행에 가까운 선행을 통해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의 더러운 죄성을 더욱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후일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난 성실한 수도사였어. 내 종단의 규칙을 얼마나 꼼꼼하게 지켰던지 그 놈의 수도사 생활로 수도사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면 그건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일 거야.… 내가 철야, 기도, 독서 같은 고행을 계속했더라면 아마 죽고 말았을 지도 몰라.”

루터는 철저히 선행을 해 보았기 때문에 인간이 절대적이 선행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당시의 로마교회는 세례 이후의 지은 죄에 대해서 잉여 공로사상과 천국의 열쇠 이론에 근거하여, 사제 앞에 가서 고해하면 이 땅에서 사죄를 받을 수 있거나, 지옥 대신에 연옥으로 유예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는 행여 부지불식간에 지은 죄가 있을까 하여 고해성사를 통해 그 벌을 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는 5가지 감각의 죄, 십계명의 조목조목을 훑어 내려가면서 고해했습니다. 심지어는 고해 후 빠뜨린 죄가 없는지 기억을 뒤져 보충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내리 6시간 고해하는 것을 듣던 고해 신부가 참다 못 해 화가 나서, “여보게, 사죄를 받고 싶거든 그런 자질구레한 죄가 아니라 부모살해나 간통과 같은 죄를 짓고 오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가 고해를 할수록 고해해야 할 죄가 늘어난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되어 더욱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영혼을 지옥 형벌에서 구하기 위해 루터처럼 윤리적 행위인 선행과 성례전적 행위인 고해를 철저히 행한 인물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루터처럼 자기 행위로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루터가 고행적인 수도원 생활과 고해 성사의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비텐베르크 대학의 스타우피츠 학장은 루터에게 몇 가지 근본적인 통찰을 제공해 줍니다. 그는 루터에게 “참된 고해는 벌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시작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죄를 죄로 깨닫고 고해를 하려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이고, 선행을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두 종류의 의 - 나의 의와 하나님의 의

루터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배운 후 성경 원문을 읽다가 성서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30세가 된 1513년 성서학 교수가 되어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시편 강의를 하다가, 시 31편 비롯한 여러 참회시를 접하게 됩니다. 특히 시 31편 10-11절의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울다 지쳐, 내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내 몸과 마음도 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는 슬픔으로 힘이 소진되었습니다. 햇수가 탄식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근력은 고통 속에서 말라 버렸고, 뼈마저 녹아 버렸습니다.”라는 말씀을 통해 루터는 ‘자신이 청소년 시절 여러 차례 겪었던 영적 고통을 히브리의 위대한 신앙인들도 겪었구나’하는 생각에서 동병상린의 위로를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31편 1절 후반부의 말씀이 루터에게 강하게 닥아 왔습니다. 표준새번역에는 “주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나를 건져 주십시오.”라고 되어 있지만, 다른 여러 번역에는 “당시의 의로 나를 건저주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루터는 히브리어 본문에서 “하나님의 의로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구절은 시편에 5번 정도 나옵니다. 루터는 수도원의 가르침에 따라 세례 이후는 죄를 짓지 않고 선행을 해야 하고 그래도 죄를 지으면 철저히 고해하여 ‘나의 의로 내가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12년 동안 고행과 고해에 몰두 했는데,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내가 구원을 받는다니 이게 뭔 말인가? 시편 31편 1절의 말씀은 구원에 대한 이제까지의 사고를 완전히 혼란 속에 몰아넣고 뒤집어 놓았습니다. 시 31편 1절에 이런 깊은 의미가 있다고 발견한 사람은 루터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시편 강의에 이어 다음 해에 로마서 강의를 하면서 저 유명한 로마서 1장 16-17절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16절의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의가 최후심판 때에 나타나 죄인의 영벌로 의인은 영생으로 인도하신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루터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최후 심판에 나타날 하나님의 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의가 최후심판에 나타나서 ‘자기의 의로운 행위’ 즉, 선행이라는 윤리적 행위와 고해라는 성례전적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루터는 나중에 “두 종류의 의“라는 논문을 씁니다. 복음의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최후심판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가 왜 다른가? 최후 심판의 나타날 하나님의 의는 ‘의로운 행동을 한 의인만을 의롭게 하는 것’이고, 복음의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죄인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하시는 것’이라는 저 유명한 칭의론의 원리를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훗날 루터는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도 회상했습니다. 소위 탑상체험으로 일컬어지는 이 말씀의 빛을 통해 지금까지의 무수히 겪었던 영적 공황장애에서 벗어나는 새롭게 태어나는 구원을 체험합니다.

회개와 고해 성사는 다르다

루터는 중세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12년 동안 철저히 선행과 고해를 했는데 그것으로는 구원을 체험하지 못했는데, 시편과 로마서에 나타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구원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교회와 가르침과 성서의 가르침의 근본 차이가 무엇인가를 곰곰이 분석하고 이를 95개조의 항의서로 요약했습니다.

혹시 루터의 95개항을 읽어 보신 분들이 있습니까? 1-2조항에 뭐라고 주장했을 까요? 면죄부 폐지하고, 교황권 제도 없애고, 연옥 교리 폐지하라고 했을까요? 루터는 면죄부, 교황권의 사죄권, 연옥 교리는 모든 고해제도라는 근본모순에서 근거한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루터는 마태복음 4장 17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최초의 선포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가르쳤는데, 중세교회 ‘신부 앞에서 고해하고 면죄를 받으라’고 가르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교회의 가르치과 성서의 가르침이 다르다는 이 위대한 통찰이 95개조 1-2조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1. 우리들은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회심(repent)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이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전적 고해(penance) 곧 사제의 직권으로 수행하는 고백과 사죄로서 이해할 수 없다.

루터는 회개(repent)와 고해(penance)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회개’ 즉, 희랍어 메타노이아(metanoia)는 신약성서 53번 나오는데, 이 는 구약 성경에 총 1,059회 나타나는 히브리어 슈브(shub)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전 생애를 통해 삶의 기본 방향을 전적으로 전환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고해시간에 신부 앞에서 과거의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 단지 과거의 잘 못만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고 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론은 구체적으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삶의 원리입니다.

면죄부 살돈으로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라

그래서 루터는 95개 조항 중 43조에서 46조에 걸쳐 면죄부 구입과 가난한 이웃 구제를 통한 사랑 실천을 대비시켰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도 선한 일이라는 것을 크리스찬들에게 가르쳐야 한다.”(43조)

“그리스도인들이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은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본 체 만 체 지나쳐버리고, 면죄부를 위해서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를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다.”(45조)

루터가 95개조를 통해 면제부 구입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론 만큼 강조한 것은, ‘면죄부 살 돈이 있으면 이웃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루터가 살았던 집 '루터하우스'에 ‘공동금고’라는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이 자발적 헌금은 절대로 교회의 경상비 지출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교회가 있는 지역에 갑작스런 재난을 당한 주민 또는 홀로 된 여인과 고아, 그리고 은퇴한 목회자를 위한 기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더 특이한 건 목사대표, 평신도 대표, 시민사회대표 각각 열쇠 세 개를 동시에 넣어 헌금함을 열어 헌금의 사용처를 함께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중세 교회는 면죄부를 팔아 교회를 크게 짓고, 성직자들이 호화호식하는 데에 사용했는데, 루터는 교회의 헌금은 외부 시민사회까지도 납득할 만한 용도로 사용해야 하며, 면죄부를 살 돈으로 지역 주민과 재난 당하고 소외된 이웃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최근 명일동의 모 교회가 800억 원의 비자금을 모아두었고, 1600억 원 정도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방송보도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1980년부터 3월과 9월에 특새 즉, 특별새벽기도를 시작하여 한국교회에 특새 열풍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40일 특새 기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한 교인들에게 상패를 주고, 이 상패를 신앙의 유산으로 자녀들에게 물려주면 자녀들이 축복을 받으며,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고 거실에 진열해 두라고 가르쳤습니다. 참석자들에게 기도제목을 제단에 바치게 하고, 특새 기간 중 기도가 응답된 간증문을 받아 우수 성공 사례를 택해 시상했습니다. 새로운 참석자를 많이 인도했거나, 특새 봉사를 잘한 교인에게도 시상을 했습니다. 특새에 출석하여 축복의 유산을 물려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2000년부터는 상패를 받는 교인이 1만 명이 넘게 되자 상패 수여를 중지했습니다. 그리고 특새 기간 동안 매일 구제와 선교에 사용하겠다고 특별헌금을 거두었습니다. 아마 이 헌금을 온전히 구제와 선교에 사용하지 않고 적립한 것이 800억 원이나 된 것 같습니다. 800억 비자금이 문제가 되자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하고 머슴정신으로 봉사하는 훈련을 목적으로 시작한 특새가 출석 상패라는 수단을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유난히 성취동기가 강하고 이기적인 강남의 중산층 6만 명을 끌어 모았으나, 결국 이들에게 세속적 성공신앙과 이기적 기복신앙을 강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수단이 목적을 변질시킨 사례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의 특새 출석상패는 현대판 면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교회의 면죄부는 죽은 조상의 특별한 축복을 위한 것이라면, 한국교회의 특새 출석상패는 살아 있는 후손의 특별한 축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면죄부 살 돈으로 구제하라 했고, 칼빈은 교회 예산의 25%로 구제에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2006년 발간된 한국기독교사회복지총람의 통계를 보면 한국교회의 구제 및 사회봉사비는 전체 예산에 10%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서울과 광역시 등 대도시는 평균 4% 미만인 반면에 리(理) 단위 시골교회는 9%로 부자교회가 더 인색했습니다. 예산의 0.4%만 구제에 사용하는 대도시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면죄부 살 돈으로 구제를 하라”고 루터가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지도, 가르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거룩한 헌금을 화려한 성당이나 성직자의 사치를 위하여 사용한 것을 중세 교회의 근본 모순이라면, 거룩한 헌금을 거룩하게 사용하는 교회가 거룩한 교회이며, 면죄부 살 돈으로 이웃을 구제하고, 교회예산은 25%로 구제에 사용하라는 것이 종교개혁의 개혁신앙의 골자입니다. 교회가 교회만을 위해 존재하면 교회는 부패한다는 개혁자들의 외침을 되새겼으면 좋겠습니다.

허호익 퇴임교수(대전신학대학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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