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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립시다”듣고 싶은 말씀, 들어야 할 말씀(사30:9-13)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11.08 02:23
▲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는 됐는지, 그 음성을 기다리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Getty Image
이 백성은 반역하는 백성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손으로서, 주님의 율법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자손이다.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미리 앞일을 내다보지 말아라!" 하며, 예언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사실을 예언하지 말아라! 우리를 격려하는 말이나 하여라! 가상현실을 예언하여라! 그 길에서 떠나거라! 그 길에서 벗어나거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이야기는 우리 앞에서 제발 그쳐라" 하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억압과 사악한 일을 옳은 일로 여겨서, 그것에 의지하였으니, 이 죄로, 너희가 붕괴될 성벽처럼 될 것이다. 높은 성벽에 금이 가고, 배가, 불룩 튀어나왔으니, 순식간에 갑자기 무너져 내릴 것이다.(이사야 30:9-13)

1. 기도 없는 신앙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다른 한편 가장 소홀하게 여겨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신앙인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도에 대해 말할 때마다 아쉬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신앙생활의 근본인 줄은 알지만, 실제로 기도 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과 기도는 상호 필수불가결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급할 때면 기도를 합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힘들어요!’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신앙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거꾸로 기도 없이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없으면 그 신앙생활은 참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적인 신념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할 뿐이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지는 못합니다. 신념의 차원에서 신을 인정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철학자들도 신적인 존재에 대해서 이러니저러니 대단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다 맞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과 구체적인 삶의 차원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그들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지식인일 뿐입니다.

신앙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실제로 영향력을 주시고 그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들어가 사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첫 단계가 기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역사하심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기도의 출발은 섭리의 인정, 섭리의 인정은 기도

기도의 출발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면 기도하지 못합니다. 삼시세끼 밥 먹을 때마다, ‘이건 내가 뼈 빠지게 일하고 힘들게 수고해서 먹는거야’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일용할 양식이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들이 술술 풀려나면, 내 힘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감사의 기도가 없습니다. 일들이 꼬이고 망쳐지게 되면, ‘뭘 잘못했을까? 무슨 노력을 더 해야 할까?’ 생각할 뿐이지 하나님께 맡기고 의탁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까?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구나’라고 인정할 때 기도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렸구나’ 하고 깨달을 때 하나님 앞에 무릎꿇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없구나,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깨달을 때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할 수 있습니까? 내 맘대로 안 되는 그런 한계를 경험할 때일까요? 막막할 때일까요? 답답할 때일까요? 아니면 내 생각을 넘어선 초월적인 일들을 경험하게 될 때일까요? 아닙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상황 앞에서 기도할 때입니다.

그렇게 기도해 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게 됩니다. 기도해봐야 압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해 간절히 기도해 본 사람이, 지금 내 앞에 허락된 양식이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양식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육신의 아픔을 두고 간절히 기도해 본 사람이, 지금 나에게 허락된 건강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건강한 하루하루를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지요. 죄, 우리의 근원적인 죄,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내 안의 본성들, 나의 깊은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그것을 없애 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넘어서게 해 달라고 뜨겁게 기도해 본 사람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지식으로 지적으로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 닥치는 모든 문제들을 놓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과 실제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과정입니다.

제 말을 자세히 들으신 분은 이상한 점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기도해봐야 섭리를 인정할 수 있고, 섭리를 인정해야 기도할 수 있다’니 이건 도돌이표 말장난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신앙은 신비입니다. 인간적인 논리로 착착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으로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신비한 과정을 경험해 가는 것입니다.

3. 기도가 잘 안 되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을 모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기도가 잘 안될까요? 이렇게 중요한데 왜 그럴까요? ‘기도를 해야지’ 생각만 하고, 기도를 안 하는 자기 자신만 자책하고 회개했을 뿐이지, 정작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나는 기도가 안 될까?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지, 기도가 무엇이지? 내 기도를 막는 것이 뭘까?’ 깊은 고민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지는 않고, 어설프게 곁눈질로 배운 기도만 그저 입속으로 되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못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많이 있지만, 첫째 요인은 우리가 하나님이 누군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 입니까? 하나님은 누구인지 우리가 왜 모릅니까? 성경 말씀 속에 있고, 설교 시간에 들었고, 열심히 공부했고, 그렇게 많이 배워서 아는데 왜 모릅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그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하나님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식말고 ‘만남’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듣기만 했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들어서 배워서 아는 하나님 말고 만나서 아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연예인들이 티비에 나와서 하는 말이 있어요. 길을 가다 보면, 유명한 사람이니까 많이들 알아보잖아요. ‘아이고 반가워요. 오랜만이에요’ 하면서 반색을 하고 아는 척을 해요. 그러면 ‘아, 예,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를 받습니다. 인사하기는 하는데, 사실 전혀 모르는 사람인거죠. 그렇게 만나고 나면 ‘내가 뭐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방송인 유재석 씨를 길에서 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알아볼까요? 당연히 대번에 알아보죠. 티비만 틀면 하루 종일 나오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가 유재석 씨를 진짜로 압니까? 아니요. 전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들어서 알 뿐이지, 솔직하게, 우리는 그 사람을 전혀 모릅니다. 당연히 그 사람도 우리를 전혀 모릅니다.

그런 만남에서 무슨 말을 나눌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자, 지금 당장 예배 마치고 집에 가다가 길에서 만났어요. 유퀴즈라는 프로그램 아시죠? 길거리에서 시민들 만나는 프로그램말입니다. 큰 길 맥도날드 앞에서 촬영 중입니다. 딱 마주쳤습니다. 인사도 했습니다. 이제 무슨 이야기를 나눌 것 같습니까?

겉으로는 서로 즐거운 듯한 대화를 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 대화 속에 우리 삶의 진심이 하나라도 있을까요? 내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내가 아니라, 그 누구하고 나눠도 상관없을, 그런 하나마나한 수박겉핥기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요? “아이고, 반가워요. 티비 잘 보고 있어요. 티비에서 보는 거랑 똑같아요.” 그러면 상대방도 기껏해야 “건강하세요. 힘내세요. 행복하세요” 그러지 않겠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도, 사실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허망한 겁니다. ‘아이고 오랜만이에요’ ‘네, 잘 계셨죠?’ 하고 하나마나한 헛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뿐입니다.

진솔한 대화가 오고 가는 관계란 어떤 관계일까요? 사소한듯한 만남이 계속 이어지고, 그 만남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하나하나 쌓이고, 관심이 커지고, 그래서 그 성품도 알고 장점도 알고 단점도 알고, 근황도 알고, 인생의 아픈 일도 알고, 바라는 소망도 알고, 그래서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사랑도 커지고, 이런 것들이 서로 쌓이고 쌓여야 비로소 진짜 대화가 오고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이렇게 되어야, 진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하나님

그럼 하나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친밀한 사이가 될까요? 아까 앞에서 섭리와 기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도해봐야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할 수 있고, 섭리를 인정해야 기도할 수 있다.” 말꼬리 잡는 것 같지만 그것이 신앙의 신비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제대로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연예인 만난 것처럼, 하나마나한 그런 대화에 그쳐버리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를 이어가야 합니다. 그런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나를 하나하나 하나님께 알려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고백의 기도입니다. 기도의 기본이 되는 첫 단계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 단계는 잘 합니다. 연예인 만났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혹시 이야기가 길어져서 제대로 인터뷰라도 하게 된다면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할 겁니다. ‘나는 누구고, 어떻게 살아왔고, 이게 힘들었고, 이게 기뻤고, 이게 아쉬웠고, 앞으로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고, 이런 소망이 있고...’ 나를 알리는 것, 나를 내놓는 것은 할 줄 압니다.

문제는 우리의 기도가 매번 이런 이야기에만 머물러 버린다는 것입니다. 연예인 만나서 이런 인터뷰를 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나와 그 연예인이 서로 속이야기를 나누는 절친이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나의 일방적인 이야기를 알려줬을 뿐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고 헤어지면 끝입니다.

절친이 되려면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내 이야기를 하고 네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아, 그러세요. 사실 저도 이렇게 살았어요.” ‘나는 이렇고 너는 이렇고, 너도 그랬구나, 나고 그랬어’ 하고, 함께 웃고 함께 울고, 술도 한 잔 하고, 하늘 보며 신세 한탄도 해보고, 서로 어깨동무하고 으쌰으쌰도 해보고, 그런 시간이 쌓여야 절친이 됩니다.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나는 누구고, 어떻게 살아왔고, 이게 힘들었고, 이게 기뻤고, 이게 아쉬웠고, 앞으로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고, 이런 소망이 있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이제 인사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아무 말씀 없이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버리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도 무척이나 아쉬워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한 것보다 더 자세히, 더 상세히, 하나님의 소원을 하나님의 아픔을, 우리를 향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열망과 노력을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내 이야기가 다 끝났다고, 이제 기도 다 했다고, 하나님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일어서 버립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진짜로 해야 하는 일은 바로 그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5. 듣고 싶은 말씀, 들어야 할 말씀

오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는 백성들에 대해 탄식하십니다.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정작 제대로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이야기에는 귀막고 있는 백성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선지자들에게 이렇게 요구합니다. “사실대로 말하지 마시오. 우리 앞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시오. 그저 좋은 말로 격려나 해주시오. 부드러운 말이나 해주시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제대로 기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이야기는 하겠지만, 하나님의 이야기는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걸로 만족하라’고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입니다. ‘내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내가 원하는 대로 되겠지요? 자, 내 말대로 되는 줄 알고 나는 갑니다’ 하고 은근 협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런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말하면 안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런 말 하지 말아라. 그런 기도 하지 말아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 기도는 해도 됩니다. 아니, 해야 됩니다. 원하는 것, 바라는 것, 아쉬운 것, 원망스러운 것, 다 토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다 내어놓아야 합니다. 오히려 감추면 안 됩니다. 기도라고 해서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겠습니다. 힘주십시오...’ 그렇게 마냥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아름다운 마음들 뒤에 감추어진 내 솔직한 내면을 드러내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과, 소망과 결단과 함께, 욕심과 탐욕과, 미움과 질투와, 원망과 저주와, 좌절과 고통도 다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만 하는게 아니라, 원망하고 따져야 됩니다. 투정도 부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 위에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내 말을 다 듣고 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말하려고만 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기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어떻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만 가르치고 공부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내 이야기를 잘할까?’ 그것만 고민합니다. ‘자, 기도는 이렇게 합니다. 먼저 내 회개를 이야기 하고, 내 잘못을 고백하고, 내 소원을 말하고, 내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완전하신 분께서 아쉬워 하시는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께도 소원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바라고, 우리 마음을 내려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게 끝일까요?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그것 말고도 더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믿음의 순교자도 되고...’ 그런데 그런 것보다 먼저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중하게 듣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즐겁게 듣는 겁니다.

18절의 말씀에서 이사야가 복되다고 찬양한 바로 그 사람은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 엄청난 종교적 업적을 이루는 사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무슨 말을 하시는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뭐라고 하시는지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건네시는 말씀을 듣고 주님과 친밀해 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입니다.

기도의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말하고 나서 휙 하니 등 돌려 돌아가 버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귀 기울이는 사람, 내 삶에서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 듣기 위해 귀기울이는 사람,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서 몸부림치는 사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고, 주님의 생각을 알고 싶다고 매달리는 사람, 그렇게 어렴풋이 듣게 된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복된 사람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매달릴 때, 주님께는 절대로 내가 듣고 싶은 말씀만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 귀에 달콤한 말씀만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딸이다.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 내가 너에게 은혜를 내리겠다. 너에게 복에 복을 내리겠다. 너의 모든 어려움 아픔을 해결해 주겠다.” 이런 말씀도 하시겠지만, 차마 듣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진짜로 들어야 할 말씀은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듣기 싫었던 말씀, 그러나 나도 사실 듣게 될 것을 예상했던 말씀, 내 안에서도 이미 나에게 스스로 하고 있던 말씀. 삼키고 삼키려고 해도 솟아나던 말씀.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는 ‘자, 들어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듣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그 말씀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만 들으려고 하지 맙시다. 들어야만 하는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을 기다립시다. 주님께서 내 안에 그 말씀을 해주시기를 기다립시다. 그리고는 그 말씀을 하나 하나 들어갑시다. 그리고는 눈물 흘려봅시다. 그 눈물을 다 닦고 나면, 듣고 싶었던 말씀이 우리 귀에 메아리치고 있을 것입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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