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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과 교회의 책임공공신학과 인식론적 패러다임 (5)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 승인 2022.11.12 15:25
▲ 전적 타자인 하나님에게로 우리를 개방하듯 열린 교회로 타자에게 개방하는 책임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Getty Image

공공신학은 포스트콜로니얼 근대성을 재구성한다

푸코의 고고학은 역사의 자리는 일직선 상의 진보의 진행과정과 동질화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고고학은 유효한 역사위해 실종된 시간의 계기들을 충만하게 채우고 과거에 묻혀버린 자료들을 독해하고, 지배담론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현재사를 다시 쓰려고 한다. 고고학은 생활세계의 해석학과 더불어가며 단순히 텍스트의 이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조건들과 권력의 관계로부터 밀려나간 유효한 역사의 자리를 독해한다. 별자리와 같은 역사는 승자의 것으로 구가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승자의 부담으로 남는다. 이것은 모든 것을 동질화해버고 일직선적인 진보로 다름의 역사를 공허한 시간 안에 갇두어 버리는 식민주의 근대성 1의 시도를 문제틀한다.

이런 측면에서 유럽중심주의로부터 인식론적 단절 내지 파열 그리고, 탈중심적 기술과 새로운 구성원리가 강화된다. 물론 하버마스는 미완의 근대성을 통해 계몽과 근대성이 아직 성취하지 못한 내용들을 대안 근대성으로 기획한다. 그러나 그의 소통이론이나 푸코에게서 포스트 콜로니얼 조건에서 요구되는 후기 근대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 지점에서 나는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에 주목한다. 벤야민에게서 순전한 희생자들의 유효한 역사는 지배의 역사에 단절을 고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메시야의 정치에 관련된다. 역사 철학에 대한 밴야민의 아남네스적인 이성은 밀려나간 자들의 한숨과 투쟁을 경청하며, 십자가 신학에 대한 포스트콜로니얼 전망을 열어놓는다.

벤야민의 세번째 역사철학 테제에 의하면, 과거 역사에서 일어난 어떤 것도 실종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역사가들만이 과거에 대한 희망의 불꽃을 일으키는 재능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죽은 자들도 적수들의 승리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비판적 역사가들은 확신한다. 이러한 유효한 역사에 대한 아남네시스(Anamnesis)적인 접근은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후기 근대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는다.

생활세계는 화해의 상징과 접합된다

벤야민이 주는 유효한 역사의 계보학에 대한 통찰은 종교와 문화의 세계로 확장될 수가 있다. 프린스턴 대학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클리포드 기어츠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대한 기념비적인 연구를 남겼다. 인도네시아와 모로코의 이슬람에 대한 비교연구는 종교와 혁명의 관계에 대한 문화적 측면을 부각시킨다. 문화는 의미를 부여하는 텍스트와 같다. 종교는 상징체계이며 삶의 사실주의와 아우라에 관련된다.

기어츠의 문화인류학애서 종교의 상징과 문화적 실천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행해지는 투계는 로컬의 주민들에게 삶의 의미있는 방식으로 채택된다. 이것은 섹스피어의 고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문화시스템으로서 종교는 의미론적 텍스트의 앙상블로 정의된다. 이것은 두터운 기술을 요구하며, 그 의미와 진리는 화란의 식민지 권력의 지배에 대한 저항을 담고있다. 이것은 현상학의 생활세계의 차원을 제시하며, 문화란 텍스트의 앙상블이며 이러한 콘텍스트 안에서 로컬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사회를 만들어간다.

종교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과 문화와 종교에 대한 투터운 기술은 하나님을 급진적인 타자성과 관계적인 화해를 통해 개념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포스트콜로니얼 조건에서 전적 타자인 하나님은 타자와의 관계 안에 존재하며 윤리적 책임을 각성한다. 하나님의 언어 행위는 관계론적으로 타자의 얼굴을 통해 나타난다.

공공신학에서 전적 타자인 하나님과 관계론적인 화해의 상징은 성서 텍스트와 더불어 사회와 문화를 하나님의 언어행위가 드러나는 의미론적 텍스트로 규정한다. 두 가지 의미론적인 영역이 교차된다. 이러한 교차 텍스트(intertextuality)가 말하자면 성서적인 화해의 상징을 생활세계와의 관련에서 구체화시킨다. 의미론적 서클에서 이해는 책임적 비판과 해방의 과정에 엮어진다. 생활세계는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서 역사의 과정을 통해 편견과 왜곡으로 침전되어 온 억압과 위계질서와 지배로부터 책임적인 수정과 해방의 기획을 가능하게 한다.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말하는 행위(살아있는 담론)와 말해진 것(기록된 텍스트)을 구분짖고, 관계론적인 전적 타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포스트콜로니얼적인 접근을 열어놓는다. 하나님은 타자의 얼굴을 통해 말씀하시며 자아의 윤리적 책임을 각성시킨다. 히브리 개념에서 다바 르는 말하는 것, 또는 드러냄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언어행위는 약속, 희망, 그리고 미래로  나타난다.

이것은 바르트에게서 유비-변증법적 방법과 윤리적 해석으로 나타난다. 프리델 마르크바르트는 레비나스의 타자성과 바르트의 전적타자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유대교 기독교의 해방의 프로젝트를 전개했다. 히브리적인 개념에서 다바르는 유비와 변증법적인 차원을 포함하며 이것은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비판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을 옹호한다.

유비의 언어는 예수의 비유에서 잘 드러나며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에 다가가는 근사치적인 접근, 임시성, 그리고 끊없는 개방성을 요구한다. 예수는 죄인으로 취급된 멸망할 자들  (massa perditionis)인 공적 죄인들과 세리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세속적인 비유와 네러티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다스림을 통전시켰다. 여기서 전적타자로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새롭고 다르게 변혁하는 하나님의 혁명-새하늘과 새땅-에서 나타나며 하나님의 은혜는 시류를 거슬로 올라간다.

바르트는 장자크 루소의 비판적 민주주의를 공론장에서 매우 진지하게 취급했다. 그의 화해론의 윤리에서 주인없는 폭력들을 분석하면서 정치 절대주의(리비아단), 맘몬주의, 문화의 영역들을 검토한다. 특히 그는 루소의 정치이론과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을 만남을 예비하고 관료제에 대한 날카로은 분석을 힌다.

마르크스는 여전히 교회가 자본주의의 첨병노릇하는 타락에 날선 예언자의 비판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오는 새하늘과 새땅의 가치와 실현을 향한 교회의 메타노이아는 매우 시급한 과제가 된다. 물살을 거슬로 가는 바르트의 은혜신학은 공공신학의 새로운 구성과 프레임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공공신학과 포스트콜로니얼 조건

공공신학은 시민사회의 다차적인 공론장에 스며들고 각인된 신식민주의 조건에 주목하며, 이러한 조건에서 드러나는 착취, 침투, 그리고 분열의 논리를 분석한다. 글로벌 제국의 체제에서 1세계 안에 3세계가 들어와 있고, 3세계 안에 1세계가 들어와 있는 혼합과 변종 그리고 열도와 같은 현상으로 나타난다. 생활세계의 파시즘화를 계보학적으로 검토하고, 후기자본주의 안에서 펼쳐지는 세계체제론과 신식민주의 조건에서 나타나는 침투, 착취, 분열과 인종 계층구성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다국적 기업이나 환경문제 그리고 기후변화에 주목한다.

전적 타자인 하나님은 세계와 관계론적이며 타자들의 얼굴을 통해 교회로 하여금 윤리적 책임감을 갖도록 한다. 여기서 경전을 읽는 인간(homo lector)은 사회적이며 윤리적 존재와 분리되지 않는다. 텍스트의 세계 안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반응은 이미 도덕적인 성격을 가지며 합리적인 책임성으로 인도된다.

차축시대의 원리는 기존질서에 대한 초월적 비판, 사회정의, 그리고 연대로 나타나며, 이것은 위계적인 사회의 시스템과 권력독점, 그리고 경제적 부정의를 폭로한다. 민주적으로 다원화되는 시민사회안에서 비교종교는 돈으로 측정된 물신숭배적 존재와 남성주의 지배체제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있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성서의 네러티브에서 나타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에 서 있다. 성서적 화해의 상징은 공공 신학자로 하여금 의미있는 담론과 지혜 그리고 영성을 타종교의 텍스트를 통해 발견하고 이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한다.

칼 바르트는 화해론의 빛들의 교리에서 하나님은 교회 울타리 밖에서 끊임없이 말씀하신다고 강조한다. 물론 그의 화해론은 말씀행위 신학에 기초되며 하나님은 발람이나 고레스 그리고 불타는 가시덤불과 모짜르트의 플루트 연주를 통해 그리고 러시아 공산주의와 심지어 헤겔 좌파들에게 죽은 개로 취급당했던 헤겔을 통해 여전히 말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의 정토종에 대한 비교신학적인 독해는 구원을 향한 급진적인 갈망과 은혜는 여전히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에 속하며, 개신교의 의인론과 화해론의 틀안에서 진지하게 취급한다.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구체적이며 보편적인 틀을 견지하고 차이와 다름은 배격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생활세계안에서 정당한 자리를 차지한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메타노이아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디트리히 본회퍼의 유명한 죄책고백에서 들을 수가 있다:

교회는 잔인한 세력의 불법적인 적용을 보았다. 그것은 수많은 순전한 사람들에게 신체적이며 정신적인 고통을 가져왔고 억압과 증오 그리고 살해로 나타났지만 희생자들의 편에서 교회는 비판의 소리를 제기하지 않았고 이들을 도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교회는 가장 연약하고 자기 방어조차 할수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들의 죽음에 책임을 가지고 있다.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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