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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세계정세 속 한반도의 미래 그리고 한국 교회의 과제좌우를 넘어 민을 위한 한국기독교가 되기를 촉구하며
이정배 교수(현장아카데미) | 승인 2022.11.14 15:31
▲ 미중 대결은 전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대전으로 몰아넣고 있다. ⓒSBS
이 글은 한국 교회를 위한 평화포름(11월 21일)을 위해 작성한 것이나 사정상 모임이 취소되어 본지에 실었다.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대가 주간하고 NCCK와 한국 교회 총연합회가 협력하여 주선한 모임이었으나 안타깝게 무산되었다. - 저자 주

평소 위 주제를 생각하며 뭇 기사를 접하고 있었지만 막상 강연을 수락한 후 현실을 성찰, 정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우선 우크라이나 전쟁을 조망하는 시각들 편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미국과 러시아 어느 한 쪽에서 상대를 바라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글들이 대세를 이뤘다. 다수 주류 여론은 러시아 비판적인 글들을 쏟아냈고 마이너 언론들 중에 미국을 탓한 글도 더러 있었다. 반면 대부분 기독교 언론은 미국중심의 관점만을 부각시켰다.

저마다 일리 있었으나 진실을 옳게 담아내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푸틴의 광신적 팽창주의만큼이나 NATO의 과도한 세 확장도 전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하 한반도 상황에서 바랄 볼 때 유럽의 NATO처럼 동아시아지역을-기술 동맹의 이름하에-블록화하려는 미국의 의도된 계획이 노출되었으니 걱정스럽다. 동맹이 안보를 보장할 수 있겠으나 동시에 전쟁을 야기 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는 탓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향후 대만해협의 전초전일 수 있고 그것이 항차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 수 있다는 판단에 입각하여 부족한 이 글을 썼다. 상세한 레퍼런스를 달지 않았다. 물론 이후 한편의 논문이 되려면 필요한 작업이겠으나 여기서는 뜻을 전달하는 일에 주력했다. 주로 아래 언급된 여러 책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책들을 읽고 나름 소화하여 자유롭게 생각을 펼쳐낸 것이다. “따옴표”을 사용하여 정확하게 본문을 인용하는 대신 독서 후 남은 머릿속 잔상을 글로 표현했음을 사전에 밝힌다. 본 강연을 위해 필자가 읽은 책은 대략 아래와 같다.

길윤형 외, 《미중경쟁과 대만해협 위기-남북한은 동맹의 체인에 연루될 것인가?》 (갈마바람, 2022); 최계영, 《차가운 평화의 시대-우크라이나 전쟁이후 미중 기술패권》 (인문공간, 2022); 김영호 외, 《푸틴의 야망과 좌절-세계 판도를 바꾼 우크라니아 전쟁》 (글통, 2022); 데이비드 하비, 《자본주의는 당연 하지 않다-어쩌다 자본주의는 여기까지 온 걸까?》 (선순환, 2020); 한청훤,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왜 지금 중국이 문제인가?》 (Sideways, 2022); 박명규 외, 《한반도 평화 신 로드맵》 (나남출판사, 2022); 한민족통일신학연구서 편, 《원초 박순경의 삶과 통일신학 톺아보기》 (IYAGI, 2022); 이은선, 《동북아 평화와 성. 성. 성의 여성신학》 (동연, 2020); 현장아카데미 편, 《한국전쟁 70년과 ‘이후’ 교회》 (모시는 사람들, 2020); 신한대학교 탈분단경계문화연구원 편, 《경계에서 분단을 다시보다》 (율력 2018), 그 외 상당수 <사사저널> 기사 및 통일연구원, NCCK 자료집 등.

1.

구 소련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탈냉전시대가 도래했던바 이후 세계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신자유주의 이념을 추종했었다. 하지만 이 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로서 WTO(국제자유무역기구)의 회원국으로서 G2의 위상을 갖게 된 중국은 지금 미국 패권주의에 반기를 들면서 대륙(일대일로)과 해양(남태평양)을 통해 세상을 다시 나누고 있다. 바이든 정부의 미국역시 제조업을 넘어 기술대국(4차 산업)을 꿈꾸는 중국 부상을 경계하며 정치, 경제적 차원의 보복을 가속화했다. 코로나 사태 후 인플레이션 탓도 크겠지만 종래의 신자유주의체제를 붕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서 대만(해협)은 핵무기를 지닌 북한을 능가, 압도 할 만큼 새 전쟁터로 급부상했다. 우수 반도체 및 전기 배터리 기술을 지닌 대만을 누가 치리, 정복하는가가 미중 싸움의 승패를 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미국 내 정치서열 3위인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했고 이에 반발한 중국은 국제기구의 제제 없이 대만 해협에서 힘껏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일종의 전쟁 예행연습이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이곳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반도내 남과 북은 모두 이들 싸움에 관여치 않을 수 없다. 이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에게 타산지석일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가 지정학적으로 대만이나 한반도와 유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까닭이다.

세계가 대만해협을 주목하고 있을 때 다행스럽게(?) 미/러시아 간 대립이 우크라이나에서 점화, 촉발되었다. 주지하듯 유럽에는 미국 중심 군사동맹체(NATO)가 세계대전 이후 바르샤바 조약 해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세(30여 개국)를 확장해왔다. 마지막 남은 동유럽 국가인 우크라이나마저 NATO 가입의사를 밝혔고 미국을 위시한 유럽 나라들이 이를 돕자 급기야 러시아가 ‘유라시아(슬라브)주의’를 표방하며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본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민족적, 언어적 공통점을 지녔기에 이런 명분 역시 낯설지 않다.

혹자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신제국주의를 표방한 러시아의 침략전쟁으로 여긴다. 여기서 ‘침략’이란 단어는 외형적으로 타당할 수 있겠으나 미국의 정치, 경제적 계산(이득)을 고려할 때 전적으로 옳은 개념만은 아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 역시 미국 주도의 앞선 전쟁들,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 성격과 근본에서 같은 탓이다. 따라서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강대국들도 전쟁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외 푸틴의 정치적 도박, 우크라이나 내부 사정 등이 전쟁요인으로 언급되는바 일리 있는 참고사항이겠다.

이처럼 미국이 주도했고 러시아가 실행에 옮긴 이번 전쟁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불행한 결과를 산출했다. 말했듯이 세상이 재차 둘로 나눠진 것이다. 미국과 서유럽의 민주주의 체제와 중국, 러시아 중심의 억압(독재?)체제로, 문명사적으로는 기독교 이념(가치)과 유교이념으로 대별된 것이다. 그 속살을 보면 서구의 금융체제와 러시아의 원자재 산업 간의 투쟁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와중에서 시장대신 국가가 전면에 나섰고 저마다 자국 이익을 위해 강한국가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하여 신냉전시대의 도래라는 말과 함께 다극체제라는 언어도 회자되는 중이다. 이에 더해 연료와 식량을 무기삼은 전쟁이란 것도 부인 못 할 특징이다. 외형상 무기를 동원했으나 실질에 있어 경제 전쟁이란 것이다. 주지하듯 우크라이나는 물론 러시아 또한 곡물의 생산, 유통이 어려워졌고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한 탓에 서구로부터 금융제재를 받고 있다.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 공포를 겪는 것도 이번 전쟁 탓이 너무 크다. 무엇보다 기후위기를 극복해야 할 카이로스적 시점에 그간의 국제적 노력을 물거품 만든 것이 절망스럽다. 유럽 각지에서 폐쇄된 핵발전소를 다시 가동시켜야 할 이유와 현실도 생겨난 것이다.

이번 전쟁은 지구적 차원의 대공황(?)- 대소의 차가 있을 수 있지만-을 초래할 것인바 기후붕괴와 맞물려 인류의 미래를 사실적 종말로 치닫게 할 공산이 크다. 더욱이 상대를 악마화 하는 가치(규범)전쟁이 되었고 동시에 식량과 에너지 그리고 기술을 무기로 하는 경제 전쟁이기에 우리 사는 세상은 앞선 냉전시대보다도 증오와 혐오, 갈등, 경쟁이 대세를 이룰 것이다. 이렇듯 세상을 선/악, 민주/독재로 대별하여 양극화시키는 재주는 미국식 보수 기독교의 전매특허였다. 자신을 유일무이한 가치로 인정하는 배타적인 기독교가 영원한 제국을 표방한 미국 이기주의와 결탁한 결과였다. NATO를 통해 러시아를 배척했듯이 중국 고립을 목적하여 친미 기술동맹국을 결성, 동아시아 위기를 부추겨온 미국은 기독교를 대변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반공, 친미적 사유에 익숙한 한국 개신교인들은 불행히도 이런 관점을 습득, 강화시켰고 목하 남북관계를 이런 시각에서 조망하고 있다. 이런 후경 하에서 윤석열 정부가 소위 ‘담대한’ 통일정책을 선포했던바 실상 기존 흡수통일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위기억제에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 북 핵의 발사자체를 원천봉쇄하는 기술력을 갖고 북을 무력화하겠다는 한미공조의 전략이 발표되었던바, 이는 추운 겨울날 오로지 바람만으로 옷을 벗기려는 무모한 행위와 다를 수 없다.

2.

여하튼 신 냉전이란 화두가 신자유주의 체제의 (비극적) 결과물인 코로나 이후의 정치적인 ‘뉴 노말’로서 부상했다. 선악의 가치, 즉 민주와 독재, 금융과 산업, 기독교와 유교, 유로피안(서구) 중심주의와 유라시아(슬라브) 제국 등으로 세계를 블록(Block)화 시켜 미중경쟁체제에 돌입한 것이다. 사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들이다. 자국 본토를 전쟁터로 삼지 않고 우크라이나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미국의 경우 항차 군수산업의 활성화는 물론 식량과 에너지 수출로 부를 쌓을 수도 있다.

러시아로부터 전쟁 참여를 요청받는 중국은 현재로서 중립을 표방하여 유럽과의 갈등을 애써 최소화시키고 있다. 유럽을 잃는 것이 중국에게 득보다 실이 큰 탓이다. 그들로선 미국의 군사력이 중국과 러시아로 분산되는 것 자체가 큰 소득이다. 비록 중국과 러시아 양국이 미국 패권주의와 맞설 공동의 목표를 지녔지만 각기 자기 이익에 따라 처신하고 있다. 지난 9월 말 어느 만큼의 진정성을 지녔는지 모르겠으나 시진 핑은 수세에 몰린 푸틴에게 전쟁 종료를 권했다고 한다.

주지하듯 유럽에는 NATO가 있기에 러시아의 팽창은 애시 당초 한계가 있었다. 연료와 식량 부족으로 역경에 처할지라도 대다수 유럽 국가들은 구소련에 대한 악몽 탓에 러시아 세력과 맞설 강한 의지를 학습해 왔다. 이에 착안하여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껏 NATO 동맹을 강화, 확산시켰던 것이다. 이에 반해 대만해협을 중심한 중국 인근에는 아직 그런 동맹이 형성되지 못했다. 미국이 호주, 일본, 한국은 물론 대만까지 합류시켜 블록형성에 몰두한 이유이다. 이 경우 앞서 보았듯이 군사뿐 아니라 경제봉쇄를 위한 기술 동맹의 성격을 지녔다. 오로지 서태평양 지역에로 확산, 팽창하려는 중국세력을 막을 속셈에서다. 한반도에 관한 미국의 관심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이런 미중 경쟁의 핵심에 바로 대만이 있다. 대만은 지정학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전기자동차, 로봇 생산 등 4차 산업을 위한 반도체 생산국으로서 경제적 차원에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삼성을 비롯한 국내 반도체 생산의 목줄을 움켜쥔 미국은 대만의 정치상황을 이용하여 4차 산업을 지향한 중국의 미래를 빼앗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신 냉전체제 하에서 대만해협이 미중갈등의 최전선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침공이 적시하듯 중국 역시 대만을 유럽의 우크라이나처럼 생각할 개연성이 크고 많아졌다. 미중 두 나라 중에서 누가 대만을 손에 넣느냐에 따라 이들 두 나라의 미래는 물론 세계 지형도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을 따라 잡고 미국은 중국을 압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결국 이 갈등은 미군을 주둔시킨 한국에게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고 북의 경우 전쟁 발발 시 즉시 중국과 공조해야 할 운명인바 결국 대만해협의 위기는 자연스레 한반도 평화를 위협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싸움이 선과 악의 대결, 민주와 독재의 가치 투쟁으로 포장될 것이기에 남쪽 지역 다수 기독교인들의 경우 이 전쟁을 흡수통일을 위한 ‘거룩한 전쟁’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실제로 20여년 함께 필자와 같은 대학 강단에서 강의했던 한 성서학자가 공산주의를 실종시킨 흡수통일을 믿고 자기 소신을 제자들과 뭇 교회에 전파하고 있다.

3.

이렇듯 세계는 지금 미중패권주의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서로 1등 되기 위한 G2 국가들 간의 각축장이 된 것이다. 이를 신 냉전체제라 일컫는바 신자유주의가 후퇴하고 자국중심주의가 부상한 결과였다. 가치(규범)를 앞세워 미중이 각기 자신들 동맹을 구축하고 있지만 결국 자국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위 기독교 강국인 이 땅의 경우 친미/친중, 혹은 반미/반중의 시각차로 내홍이 크다. 지난 정권을 친중 공산주의 정권으로 매도하며 갈등을 부추겼던 주체가 남쪽의 대형교회였음을 익히 알고 있다. 사드 배치로 남쪽에 가했던 경제적 보복, 동북공정이란 이름의 역사왜곡, 한류차단 등 일련의 사건들 탓이겠으나 한국전쟁 이후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 더 근본적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해방 전후 공간에서 친일세력과 결탁했고 5.18 광주혁명의 무력진압을 묵인, 방조했으며 군사 작전권 반환을 거듭 미뤄왔던 미국, 최근 반도체 생산 공장의 이전을 강요, 압박하는 그들의 주권찬탈 행위는 중국에 견줄 때 그 혐오스러움이 덜하지 않다. 동맹국 힘으로 정치/군사적 위상을 지키고 자국의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는 면에서 이들 두 나라는 조금도 다를 수 없다.

그렇기에 지난 정부는 앞선 개념 쌍 대신 用中用美(용중용미)란 말을 선호했지만 신 냉전체제와 함께 찾아온 경제 한파 속에서 본 정책의 효과 역시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더구나 새 정권이 미국의 동맹 구축 전략에 휘말려 NATO 들러리를 자처하게 되었으니 상극적 관계로 치닫는 미중의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향후 반도체 산업과 결부된 이들 간 군비경쟁은 한반도의 경제와 통일을 더욱 어렵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럴수록 중국에 대한 더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중국이 북한을 제치고 대만침략이란 ‘중국 리스크’를 무릅쓰는 이유를 깊게 살피면 우리의 갈 길과 할일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모택동과 같은 반열에 놓고 싶은 시진핑은 등소평과 후진타오에 이르는 ‘선부론’에 제동을 걸고 ‘공동부유’란 새 목표를 세웠다. 도농 간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자 격차사회 극복을 위해 부의 공유를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부패와의 전쟁, 기득권자들의 과한 교육열 철퇴, 소수에게 독점된 부동산 과세 그리고 오락산업의 검열 등이 이를 후견한 정책이었다.

주지하듯 중국은 연평균 GDP 성장률 8% 미만을 크게 걱정하던 나라였다. 하지만 2천 년대 초 미국 금융사들 파산을 지켜보며 중국은 서구의 종말을 내다봤다. 당시 지구적 차원의 금융위기를 초래한 서구를 살린 것은 중국의 내수였기 때문이다. 이 경험 속에서 중국은 서구를 능가할 자신감을 얻었다. 코로나 위기를 서구와 견줘 자신들 방식으로 잘 극복했다는 평가도 한 몫 했다. 해서 이런 사건 전후로 시진핑은 ‘동승서강(東乘西降)’ 즉 ‘중국(동양)이 떠오르고 미국(서양)은 진다’는 말을 공론화시켰다. 서세동점 시기 자기 방어적 소극표현이기도 했던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구체적 실현이자 완성을 선언한 셈이다. 이로써 중국은 서세동점의 시기를 접고 중화제국시대를 열어젖혔다. 홍콩 수복에 이어 대만침략을 서세동점 시기를 끝내는 최후 행위로 여긴 것이다. 이로써 시진핑은 자신을 모택동과 같은 인물로 각인시키고자 했다.

흔히 중국의 대만 침략이 향후 5년 이내에 이뤄질 것을 예상한다. 인구수 감소와 고령화로 중국의 역동성이 앞으로 축소될 것을 우려해서다. 이렇듯 대만정복은 미소경쟁 실상이자 시진 핑의 야망이며 중국적 자존심이고 시기를 늦추면 기회가 없다는 상황판단의 결과인 것인데 이것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이 지대하다. 이렇듯 서구멸망이란 중국의 예언이 백성들까지 확산될 경우 중국은 미국 눈치 상관없이 자신들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 그럴 경우 用中用美(용중용미), 소위 ‘안미경중(安美經中)’,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란 우리들 희망 역시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4.

말했듯이 유럽에서는 러시아와 미국 동맹국들인 NATO가 싸움 중이고 아시아에서는 대만해협 주변에서 중국과 한국, 일본을 위시한 미국 동맹국들 간의 대치 상황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미국이 가치론(민주주의)을 내세워 블록화를 추동한 반면 러시아와 중국은 유럽문명 타파, 서구종말을 내걸고 맞서는 양상인 것이다. 종래의 어떤 전쟁보다 문명충돌의 성격이 짙게 드리웠다. 아시아의 화약고인 대만, 더더욱 한국의 경우 문명충돌의 장이 될 수밖에 없다. 유교문명의 잔류량이 가장 많고 종주국보다 더 강력한 기독교 세를 지닌 곳이 이 땅이다. 남북 간의 자본주의/사회주의 대립도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대만해협의 위기가 한반도 상황에 미치는 직접적 영향이 아주 클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대만침략이 곧 한반도를 전쟁터로 내몰 수 있는 탓이다.

우선 대만 침략전쟁이 시작되면 주한 미군을 보유한 남쪽 땅은 전쟁기지가 될 것이 명확하다. 인력을 비롯한 일체 군수물자가 이곳서 공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산 평택의 공군기지, 평화의 땅 제주에 건설된 강정 해군기지가 이런 용도로 사용될 것이다. 이럴 경우 남쪽 땅은 필히 중국의 공격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으로선 적(미국)의 군수기지를 선제 타격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지금껏 미국은 자신들 본토에서 전쟁을 해본 경험이 없다. 남의 나라를 희생양 삼는 익숙한 경험을 축적해왔다. 무엇보다 대만 해협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주한 미군이 대만해협으로 파견, 이동될 것이다. 주한미군이 인도태평양 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보조군대인 까닭이다. 그럴 경우 이 땅에 병력 공백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미국은 군사력 보충을 위해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파병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번 동해에서 실시된 한미일 합동 군사훈련은 그 때를 위한 예행연습일 수도 있다.

물론 미국은 유럽 및 여타지역의 군사력을 이동시키겠다고 말하겠지만 거리상으로, 그리고 타 지역(유럽) 역시 긴장이 고조되어 있기에 실현되기 어렵다. 이 경우 가장 쉬운 것이 바로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파병인 것이다. 이때를 상정하여 일본은 아베 내각 이후 줄곧 평화헌법 9조를 수정하려 했던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아베사후 개정안 찬성 비율이 높아지는 현상에 주목할 일이다.

최근 일본서 개최된 어느 세미나에서 한국전쟁 연구가로 유명한 와다 하루키 교수는 미국과 일본의 공조에 의한 제2의 한국전쟁 발발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미중싸움 이상으로 영토문제로 불거진 중일 간 갈등이 선점되었던 탓이겠다. 여하튼 이런 정황에서 대일 관계에서 저자세를 취하는 새 정권의 무능한 현실인식이 걱정스럽다.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가자는 것인데 우리에게 닥칠 미래가 바로 상술한 상태인 것을 애써 부정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동향은 어떠할까? 최근 NLL남쪽으로까지 장거리 미사일을 거듭 쏘아대고 있고 ‘북은 남쪽이 아니라 전쟁 자체가 주적인 것’을 누차 언급했다. 북이 지닌 핵은 전쟁 억지력 차원에서 자기방어용이지 공격무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간 분단체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정치세력 탓에 이런 인식이 널리 파급되지 못해 유감이다. 지금껏 미국과 남쪽이 주장했던 북 핵 선제 포기가 아니라 한반도 전역의 비핵화 추진도 한껏 공론화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최근 윤석열 정부는 이에 어기 짱을 놓았다. 오히려 미국 전술핵 배치를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장거리 미사일에 탑재될 핵에 대한 두려움 탓이겠지만 이 역시 외교적 협상용인 것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미중 간 전쟁의 발발 전의 상황일 뿐이다. 우리의 걱정은 미중 간 전쟁 발발 시 중국과의 협약에 따라 북한이 자동으로 개입하게 되어있는 현실이다. 본 전쟁에서 한미일 블록이 힘을 발휘할수록 북은 중국과 러시아와 더욱 공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들의 살 길인 탓이다. 이 경우 주한 미군이 부재한 상태의 남쪽을 향한 북의 공격도 예상할 수 있다. 북으로선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상륙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군 군사력에 대한 한국의 주권적 통제가 어려운 것도 참으로 난감하다. 이런 시나리오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힘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가치 투쟁을 명분삼아 동맹의 힘을 걸머진 대국들 간의 전쟁인 탓에 자국 승리를 위해 핵무기까지 사용될 개연성도 없지 않은 상황인줄 알면서 말이다. 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산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을 만큼 위험스럽다. 대만침략 전쟁이 결국 블록 화된 여러 동맹국의 합작품인 까닭이다. 그럴수록 이 땅에서 군사 통치권 환수는 화급할 수밖에 없다. 미중 충돌로 휘말릴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막기 위해서라도 미군사력에 대한 주권적 통제력을 선취해야 옳다.

주한 미군이 인도 태평양사령부의 지휘 통제 하에 있는 것도 걱정스럽다. 이렇듯 주한 미군은 부재 시도 문제이지만 유지할 경우도 이 땅을 거듭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혹자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목도하며 한미동맹의 강화를 한반도의 미래를 위한 ‘답’으로 여겼으나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되어 전쟁 위기를 초래할 개연성이 더 크다. 이전처럼 어느 한 쪽 생각만이 절대 옳다는 신념은 편견일 뿐이다. 지금 ‘안미경중’이 난제가 되었듯이 한미동맹 그 자체도 심각하게 고민할 사안이 되었다.

5.

우크라이나 전쟁을 목도하며 북한 역시 군사력을 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중의 일차적 관심이 대만으로 옮겨졌으나 북쪽의 경우 미국뿐 아니라 중국도 견제의 대상인 까닭이다. 숱한 세월 동안 중국과 고구려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주지하듯 동북공정은 주로 고구려(발해)역사 지우기였다.

최근 북한은 핵무기 선제공격을 법제화했다. 미국을 비롯한 어느 나라일지라도, 물론 남쪽도 자신들 방어를 위한 선제적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공포한 것이다. 우선적으로는 미국에 대한 경고겠으나 자국을 전쟁으로 이끄는 중국을 겨냥한 발설일 수도 있다. 선재적 핵사용을 통해 자신들 주체성을 잃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대만전쟁을 겨냥한 사전 포석이라 추측할 수도 있겠다.

여하튼 이로 인하여 북한은 향후 국제적 비난을 더 많이 받게 될 것이다. 미국은 대응차원에서 핵미사일 발사를 원천봉쇄할 고도 기술을 한국과 공유하겠다 말했으나 결국 한국 정부의 미국 의존도를 강화시켰다. 이렇듯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반도를 군비 경쟁 각축장으로 만들었고 이 땅에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한껏 높였다. 한마디로 대미 종속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불거진 군사적 경쟁에 우위를 점하려는 세계현실에 대한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전략적 자산이 된 이 땅의 운명에 대한 성찰이며 마지막으로 지구 공멸의 두려움을 공유할 수 있는 지혜를 찾아 실천하는 일이겠다.

주지하듯 세계 주요국들이 무기 생산 및 구입을 위한 비용을 늘려가고 있다. 미, 중, 러시아 그리고 독일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 곁의 폴란드, 평화협정 폐지를 기정사실화하며 군사비용을 두 배로 확장시킨 일본, 한미군사훈련은 물론 주한 미군 주둔을 위해 거듭 증액할 처지인 한국, 이에 맞서 전술 핵 무기개발에 사활을 건 북한 역시 정도차이는 있으나 모두 경쟁우위 정책을 펴고 있다. 소극적 평화로서 전쟁 억지를 위한 지출이겠으나 배고픈 약자들의 희생을 가중시킬 것이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 이후 세계적 차원의 빈곤-경제침체-을 해결하는 것이 정치가들이 할 일이다.

1945년 이후 해방은 되었지만 일본을 대신한 미국의 지배력이 아직도 종식되지 않았다. 전쟁조차도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발발할 수 있는 상황이자 현실인 것이다. 동맹을 통한 군사외교력이 필요하지만 이 나라를 미중전쟁의 발판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주지하듯 대한민국은 세계가 열광할 만큼 문화강국이 되었다. 이를 뒷받침할 만큼 경제도 대국(강소국)의 반열에 들어섰다. 한마디로 주체성, 자주성을 잃을 만큼 약소국이 아니란 것이다. 자신들 운명을 스스로 책임질 만큼 홀로 서(독립)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은 기후붕괴로 사실적 종말에 처한 인류문명을 구하는 일에 머리를 맞대야 할 시점이다.

인류가 꿈꾸는 4차 산업은 문명전환과 함께 이뤄질 사안이다. 기술혁신은 지구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일 뿐 세계제패를 목적할 수 없다. 이런 미래를 전쟁을 통해 선점하겠다는 발상은 지구를 공멸로 이끌 수 있는 언어도단이다. 이미 세계는 기후붕괴의 전조를 도처에서 경험하고 있다. 이를 위해 세계는 축적된 지혜를 갖고 생존을 위한 ’두려움의 발견술‘을 가르쳐야 옳다. 미래 산업의 핵인 반도체 탓에 인류가 전쟁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들 시공간 전체를 공멸시키는 독배가 될 것이다. 이에 뭇 종교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 자본주의 문명 일탈에 공조, 안주했던 종교들이 자신들 옳음(교리)을 오늘의 세계에서 입증 받아야 할(정행) 시점인 것이다.

▲ 한미 공군이 지난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한미 연합 작전 수행능력 향상을 위해 F-35A 연합비행훈련을 최초로 실시했다. 사진은 미국 편대장이 편대를 이끄는 장면 ⓒ연합뉴스

6.

어떤 주제를 다루던지 신학자, 목회자의 글은 대개 ‘교회의 과제’란 말로 마무리 되곤 한다. 기독교의 행위 주체가 개인에 앞서 교회공동체인 까닭이다. 하지만 분단체제에 길들여진 반공적 기독교가 오늘의 급변정세를 옳게 숙지하여 나름 역할 할 수 있을지 의심한다. 오히려 다수 교회가 평화통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된 듯싶어 이 지면을 메꾸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일찍이 종교사회주의를 표방했던 한 신학자(불룸하르트)가 ‘인류 진보의 가장 큰 적은 기독교’라 일갈한 것과 맥락이 같다. 이념을 비판하면서 스스로 이념의 틀에 갇힌 기독교에게서 복음(하느님 나라)을 찾기 어렵다. 종교성만 부추기며 상투화된 종교언어를 남발하는 기독교적 현실을 <수리남>이란 6부작 드라마가 최근 여실히 적시하지 않았던가?

마지막 장을 메꾸는 필자의 글이 물위에 뜬 기름처럼 교회현실과 이격된 소리겠으나 평화통일을 ‘궁극(하느님 나라) 이전’의 상태로 보고 이 운동에 헌신했던 선배 신학자들을 기억하며 생각을 보태고자한다. 본 글 제목처럼 목하 급변하는 현실-코로나 이후 경제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패권주의, 신 냉전 상황-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동서독의 통일 당시 독일교회의 역할을 소개하는 것으로 실마리를 풀어 보겠다. 주지하듯 유럽 내 다수 나라들이 동서독 통일을 부담스럽게 여겼다. 강대국으로서 주변국을 힘겹게 했던 과거 역사의 재현이 두려웠던 것이다. 하여 지난 세기 독일이 점령했던 이웃 국들의 땅을 되돌리자는 여론이 생겨났다. 통일을 거부하는 주변국들을 안심시킬 목적에서였다. 물론 독일인들의 반대가 국론을 분열시킬 만큼 상당했다. 하지만 교회는 자국민을 설득했고 반환을 성사시켜 통일의 기초를 놓았다. 우리에겐 타산지석이 될 만한 교회의 역할이었다. 필자는 이를 이념과 이득을 초극한 진리사건이라 여긴다.

우리 남쪽도 이념 문제로 좌우대립이 심각한 상태이다. 우익세력만으로 정부가 세워졌고 기독교가 그를 후견했기에 사회주의 이념과 늘상 반목했다.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이 교회 핵심세력이 된 탓도 컸다. 자본주의 현실에서 교회가 자기만의 폐쇄적 공간이 될수록 반공이념의 학습 역시 강화되었다. 본디 자기부정의 종교여야 할 기독교가 타자 부정을 통해 자신 존재를 확장시켰던 것이다. 이런 교회는 과거 유대인 성막처럼 허물어져도 좋겠다. 이 땅에서 이뤄져야 할 하느님 나라와 조금도 닮지 않은 까닭이다.

우리에게도 좌우대립을 비롯해 일체 반목을 넘어섰던 진리 사건이 존재했다. 이념, 종교, 계급, 성별을 초월하여 독립의지를 표명했던 1919년 3.1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의 영향사가 4.19혁명을 거쳐 최근 촛불혁명에까지 미쳤다는 것이 뜻 갖고 사유하는 이들의 기본생각이다. ‘제국’을 ‘민국’으로 바꾼 진리사건은 지금도 발현될 수 있다. 좌우이념으로 나뉜 남북을 ‘영구 중립국’으로 재탄생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는 목하 양국체제론(김상준))/국가 연합론(백낙청) 간의 기존 논쟁을 빗겨(벗어)나 있다. 이 땅을 전쟁터로 만들지 않을 뿐 아니라 문명 전환을 위한 세계사적 역할을 생각한 탓이다. 패전국 일본을 대신하여 분단된 이 땅의 고통에 대한 재의미화 차원이기도 하다. 의당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반대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럴수록 이 일에 교회가 앞장설 일이다. 반공의 기치를 내걸고 자본주의에 기생하며 생존만을 목적하는 교회가 아니라면 이를 꿈꿔야 옳다.

진리사건이기에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는바 거듭 준비가 필요하다. 이 일에 교회가 방해물이 된다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거부, 퇴출되고 말 것이다. 기독교가 ‘자기 부정’의 힘을 상실하면 맛 잃은 소금처럼 땅에서 짓밟히는 것이 순리다. 기독교 교회 그 자체가 거룩할 수 없다. 하는 일이 거룩해야 거룩해 질 수 있을 것이다.

7.

사실 중립화 논의는 우리들 좌절된 꿈이기도 했다. 해방 전후 공간에서 당시 대다수가 지지했던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론’이 그 원초적 형태였던 까닭이다. 따라서 몽양의 꿈을 복기하여 참고할 여지가 충분하다. 그는 민족 주체성(구심력)과 외교력(원심력)을 양 날개 삼아 그 균형을 잡는 일을 신의 뜻이라 믿고 해방 정부의 새 형태로서 좌우합작을 구상했었다. 외교능력을 동원하여 좌우가 공존하는 주체적 세상을 이 땅에서 실현시키는 것을 하늘 뜻으로 여긴 것이다. 이를 이어 혹자는 한/중/러 3국이 맞물린 국경 지대로의 국제연합 이전을 추진했고 어떤 이는 DMZ을 세계 평화공원으로 지정 할 것을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중립화의 세세한 방법과 내용을 논할 여백이 없다. 단지 시작단계인 영구중립화 논제를 한국 교회가 선점하여 초교파적으로 다뤄 주길 바랄 뿐이다. 일제침략과 이념갈등의 세계적 모순이 집적된 것이 한국 전쟁이자 분단의 실상이었기에 중립화 논의는 민족차원을 넘어 세계사의 궤적을 바꾸는 일과 결코 무관치 않다. 이것은 함석헌의 말대로 정치를 넘어 종교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근대국가를 초월하는-자본주의/사회주의를 넘어선-세계시민주의 시각에서 나아가 지구 거버넌스의 차원에서 고려할 미래적 주제인 까닭이다. 이런 중립화론은 연방제(연합론)의 발전적 논의로서 탈 민족을 부추기는 양국체제론의 위험성에서도 빗겨날 수 있다.

이 땅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당시 기독교인들은 세 가지를 원했다. ‘복음적일 것, 한국적일 것, 그리고 생명적일 것’이 그것이다. 이 셋은 기독교의 본질을 잊지 말고 민족의 과제를 해결하며 세계를 살리는 일을 하라는 뜻이었다. 이들 각각은 정치신학적 의미, 기독교의 민족사적 과제, 신 냉전체제하에서의 반제국적 생명연대운동으로 부언, 확대시킬 수 있겠다.

주지하듯 바울에게 복음은 유대인/이방인, 유대인/그리스도인, 유대적 그리스도인/이방적 그리스도인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일체를 아우르는 능력이었다. 이들 세 차원의 사람들은 당시로선 세계 전체를 적시한 것으로 해 아래 존재했던 일체의 분열을 뜻했다. 이를 치유, 복원시키고자 바울은 복음의 실체이자 능력을 ‘마치-가 아닌 것처럼(as if not...)’ 하(사)는 자유라 말했다. 누구에게도 누구처럼 될(살)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 안의 존재(Sein in Christo)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종을 해방시켰고 가부장제 또한 넘어설 수 있었다. 이렇듯 자기 부정의 방식으로 모두와 같아지는 역지사지의 신비, 이를 일컬어 복음의 정치학이라 일컬었다.

주지하듯 이 땅의 최초 신앙인들은 민족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가였으며 교파적 기독교를 버리고 그리스도에게 환원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점에서 타자 부정적이며 반공기독교에 익숙한 목하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반증이다. 가톨릭 교종의 말대로 교회가 먼저 복음 화되는 백사천난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땅의 교회는 민족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 서구의 교회가 아니라 한반도 내 분단된 땅에 위치한 까닭이다. 탈 민족주의자들 말하듯 민족은 결코 허구일 수 없고 공통된 기원과 신화를 갖고 옛 기억을 소유한 (유동적)실체인 까닭이다.

하여 우리는 기독교인이면서 박순경이 말하듯 동아시아인 나아가 동이족의 후예인 것을 긍정해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유대 기독교 문명의 대변자인 미국이 억압적 방식으로 이 땅과 관계하는 현실에서-기독교 신앙을 전복적으로 성찰해야 옳다. 유교(학)에 대한 중국의 오남용 또한 우려할 사안이다 .이런 과정 전체를 국수주의와 변별된 한국화, 토착화라 말할 수 있겠다. 세계문명이 각축하는 한반도에서 우리들 삶의 양식의 주체화를 뜻한다. 그렇기에 이 땅 사람들의 주체성을 북돋는 일이 기독교의 과제이다.

혹자는 항일 민족운동사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섭렵 못한 것을 주체성의 결핍 탓이라 여겼다. 대다수 독립 운동가들이 사회주의자들이었던 것이 명백한 사실이었음에도 말이다. 따라서 1920-30년대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분열을 민족 분단의 시작으로 본 것에 동의한다. 우익 세력만으로 나라를 세운 탓에 후일 친미, 친일 세력과 공조, 종속되었으니 그 지적이 일리 있다. 지금껏 한반도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만든 작금의 현실에 대미 종속적인 기독교 세력들 역할이 지대했다. 국가 보안법이란 족쇄, 곧 주체성을 저버린 반민족적인 종의 멍에를 기독교는 떨 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이를 ‘대죄’로 인식, 고백하는 교회의 죄책고백이 반듯이 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기독교 교회는 기후붕괴 및 불평등 현실에서 반제국적 생명연대를 존재 이유로 삼아야 마땅하다. 종래와 같은 ‘Normal’(구원)에 세상 누구도 목말라 하지 않는다. 1990년 JPIC공의회가 대한민국에서 열렸다는 것의 상징적 의미가 크다. 당시 본 회의 발의자였던 봐이젝커의 말이 ‘New Normal’이 된 까닭이다. “분배문제의 불균형, 핵무기의 과다 보유, 창조질서의 붕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기독교의 구원(정신)은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 말했듯이 이 땅의 분단은 냉전 이념 및 자본제국주의 모순의 결과물이었다. 동시에 일본대신 한반도가 분단된 것은 세상 죄를 짊어진 이 땅의 운명으로 해석된 바 있다. 그럴수록 세상을 구할 힘도 이 땅에서 비롯되어야 옳다.

이점에서 이후 뭇 환경회의를 이끌어 낸 JPIC 공의회의 서울 개최는 참으로 유의미하다. 그것이 이 땅 교회들의 존재양식 변화를 추동할 때 더욱 그리될 것이다. JPIC 실현이–지정학적 정치학이 아니라 생명권 정치학의 이름으로-사실적 종말에 이른 지구를 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JPIC 과제를 위해서라도 이념 및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지구차원의 거버넌스로서의 영구 중립국은 필요 막급하다. 이점에서 통일, 혹은 남북 연합론(고려연방제)의 다른 이름인 영구 중립국은 생명적 세계를 위한 것으로서 하느님 나라 이전의 준 궁극적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가는 글

70년 민족분단의 역사는 샴쌍둥이 모습처럼 기형적이었다. 북은 물론이고 경제대국이 된 남도 정상일 수 없었다. 분단체제에 기생한 정치, 종교, 경제가 온전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는 둘이고 몸통은 하나인 상태로 70년을 고통스럽게 살아왔다. 하나의 머리를 잘라내자는 기독교계의 소리가 그간 컸었다. 하지만 운명 공동체인 탓에 분리와 절단이 답일 수 없다. 서로 다른 머리(체제, 이념, 사상)로 살아왔기에 흡수, 접붙이는 일도 쉽지 않다. 한 몸을 지녔기에 북에게 남은, 남에게 북은 결코 외부적 타자(Object)가 될 수 없다. 어느 한 머리에서 고통을 느끼면 몸 또한 아프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남과 북은 상호 ‘비체적(Abjective)’ 존재일 수밖에 없다. 비체란 주체(Subjective)와 인접하나 그와 동화될 수도 없는 존재를 말한다. 하여 민족 간 재통합을 위해서 각자의 개체를 감소시키는 것만이 서로 살길이다. 그것이 영구 중립화의 길이다. 제국이 민국으로 변했듯이 급변하는 냉전체제의 도래, 한반도가 전쟁터가 더될 개연성이 높아진 현실에서 중립국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비체적 존재란 사실을 자각할 때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한 번도 경험치 못한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한국교회가 복음의 정치학을 수용하여 세계를 견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내부적 갈등을 끝내고 오히려 주변국들을 설득할 만큼의 일치된 주체적인 모습을 교회들이 보여주길 기대한다.

이정배 교수(현장아카데미)  ljbae201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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