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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하게내 안에 이미 심겨진 것(요한복음 4:31-38)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11.15 15:10
▲ 구원은 우리에게 짐을 얹혀 주는 것이 아니다. ⓒGetty Image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께, “랍비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셨다.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된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서 밭을 보아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 추수하는 사람은 품삯을 받으며,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들인다. 그리하면 씨를 뿌리는 사람과 추수하는 사람이 함께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를 보내서,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였다. 수고는 남들이 하였는데, 너희는 그들의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요한복음서 4:31-38)

1. ‘그러는 동안에’

성경 말씀은 한 글자 한 글자, 한 구절 한 구절이 소중하고 귀하다. 오죽하면 ‘일점일획도!’ 라고 말할까? 괜히 그냥 써놓은 말이란 전혀 없다. 오늘 말씀 31절은 ‘그러는 동안에’로 시작한다. ‘그러는 동안에’라는 것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일은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 그 앞뒤 중간에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단지 일의 선후관계만을 뜻할까? 아니다. 앞뒤의 일을 살펴보라는 힌트일 것이다. 앞뒤의 일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고, 특별히 그 중간에 들어가야만 하는 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오늘 말씀의 앞뒤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중일까? 바로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 이야기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시는 중, 사마리아 수가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한낮에 우물가에 앉았는데, 마침 한 여인을 만나 물 한 잔 길어달라고 말을 건넨다. 그리고는 그 ‘물’을 구실삼아서 여인에게 ‘영생의 물’ 이야기를 건넨다. 그렇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진짜 신앙이요. 그렇게 삶으로 예배하는 것이 진짜 신앙이라’고 말이다. 이 여인은 그 진리가 너무나 놀랍고 기뻐서, 온 동네에 예수를 전하러 뛰쳐 나간다. 동네 사람들도 이 여인의 말을 듣고 몰려와서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다.

오늘 말씀(8:31-38)의 자리가 바로 여기이다. 여인이 뛰어가서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사람들이 몰려오는 바로 그 때, 바로 그 사이,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 바로 그 시간에 일어난 일이 오늘 말씀이다.

예수님이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있지 않았다.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다(8절). 그 시이 예수님은 여인을 만났다. 이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이 마을로 들어간 사이, 제자들이 동네에서 돌아와서 예수님께로 온 것이다. 먹을 것을 구해와서는 예수님께 말한다. “배고프셨죠? 저희가 먹을 것을 구해왔습니다. 이것 좀 드십시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괜찮다. 배부르다. 다른 거 먹었다.” 하시는 것이다. 아마 빙긋이 웃기도 하셨을 것이다.

제자들은 속으로 의아해한다. ‘아니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는데? 먹을 게 없어서 우리가 마을에 들어갔다 왔는데?’ 그래서 조심 스럽게 묻는다. “선생님, 그 사이에 누가 먹을 걸 갖다 줬습니까?”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다. “뭐 먹었냐고? 왜 배부르냐고? 내가 왜 배부른지 알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니까 배부르지. 난 사실 그것 먹고 산다. 난 밥먹고 사는 게 아니야. 나는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거 먹고 살아.”

“하나님이 나한테 명령하신 것이 있는데, ‘이거 해라’ 하신 것이 있는데, 그걸 내가 잘하면 배부르다. 아무것도 안 먹어도 그것만 잘하면 배부르다. 지금 너희들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 전했어. 그 여자도 잘 알아들었어. 얼마나 좋아? 얼마나 배불러? 난 지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좋아. 그냥 배가 든든해.”

그리고는 또 말씀하신다. “이미 곡식이 다 익어서 추수할 때가 되었다. 너희는 거두어 들이기만 하면 된다. 누가 심었냐고? 걱정하지 마라. 심는 사람 따로 있다. 내가 심고, 성령이 심고, 하나님이 심으신다. 심는 건 걱정하지 말고, 너희는 잘 거두기만 해라.”

그때 마침 마을 사람들이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몰려온다. 그 사람들이 예수를 또 믿게 된다.

2. 분주함과 단순함

우리는 모든 일을 내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한다고 느낀다. 그것은 비단 우리 생각만이 아니다. 교회는, 신앙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해야 할 것만 가르쳐준다. 의무만 부과한다. 그리고는 어느 것 하나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기도도 해야 하고, 성경도 읽어야 하고, 전도도 해야 하고, 교회 봉사도 해야 한다. 회사 일도 있고, 집안 일도 있고, 친구도 만나야 하고, 할 일이 무궁무진 태산 같다.

모든 일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분주하다. 마음이 분주하고, 몸은 당연히 더 분주하다. 그래서 결국 그 모든 일을 다 하지 못한다. 아이러니하다. 다 해야 해서 분주하고, 분주하니 다 하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와 달리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 ‘지혜’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사람, 솔로몬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한다. “주님, 제가 이제 왕이 되는데, 백성을 다스려야 되는데, 카리스마, 권력, 인간적 매력, 부귀영화, 재물… 이런 것 말고, 저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솔로몬은 이렇게 기도한다. 솔로몬은 아마도 원래부터 현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지혜를 간구한다는 것이야말로 궁극의 지혜로움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기도 이야기는 단순히 ‘재물과 권력 같은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한 지혜를 구했다’ 하는 미담이 아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과 연결해 보면, 솔로몬에게는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솔로몬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솔로몬은 지혜를 선택한다. 중요한 것은 ‘솔로몬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자신이 선택한 것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욕심부리지 않고 지혜를 선택하니까 얼마나 좋아, 봐 나중에 권력과 재물 이런 것까지 다 주셨잖아’ 그런 말씀이 아니다. 많은 것 중 하나를 선택하고, 자기가 선택한 것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선택했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충실하게 지혜롭게 살았다. 선택하기는 지혜를 선택해 놓고, 권력을 추구하고 재물을 탐하고 그러지 않았다. 선택한 대로의 삶을 산다.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 한계 내에서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 충실히 산다. 그것이 솔로몬이 칭찬받는 점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전부 다 할 수도 없으면서, 다 하지도 못할 거면서, 다 해야만 한다는 강박과 의무감에 시달린다. 그리고는 결국 어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 제자들도 비슷한다. 그런 제자들에게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심고, 뿌리고, 그런 건 내가 다 했어. 걱정하지 마, 이제 거두기만 하면 돼. 너희들의 몫이 그거야. 봐라. 이제 사람들이 올거야. 맡겨진 일을 한번 잘 해 봐.’

솔로몬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솔로몬은 자기가 선택했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선택해 주셨다는 것 뿐이다. 가장 좋은 것으로 선택해 주셨다는 것이다.

3. 부담스런 구원

구원을 말하면서,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십자가에서 우리도 죽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도대체 그 새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막막할 뿐이다. 뭔가 내가 바뀌어야 하고,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어떻게 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배워 알던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것들을 더욱 열심히 하는 것밖에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더 성실해야 할 것 같고, 더 착해져야 할 것 같고, 그래서 더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부활은커녕, 새사람은커녕, 신앙의 짐과 멍에가 무거워지기만 한다.

그러나 부활은 해방이고 축제이지, 결코 부담이 아니다. 짐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부족하고 못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지, 우리를 잘 가르쳐서 마침내 다 잘하게 만드는 교육이나 훈련이 아니다. 채찍과 당근 중에서 고르라면 부활은 철저하게 당근이다. 채찍 없는 무조건적인 당근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부활로 태어나는 새 사람이 부담스럽고 힘들까? 그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셨다는 믿음,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다는 믿음,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셨다는 믿음, 그 믿음이 우리에게 확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셨다. 죽은 우리를 부활시켜 주셨다’ 하는 부활신앙이 아니라, ‘내가 부활해야 하는데, 부활하려면 힘든데, 할 일이 많은데... 어떡하지’ 하는 그런 부활신앙이기 때문이다. 부활이 믿음이 아니라 숙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것처럼, 내 힘으로는 못할 것만 같아서 근심하는 것이다. 나의 부활 이야기 속에 철저하게 ‘나’만 있을 뿐이지,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빼놓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정확히 알아야 한다. 부활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숙제가 아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서 이미 이루어진 은혜의 현실이다. 은총의 현실이다. 누리면서 살아야 할 현실이다. ‘부활해야 되는데...’ 하고 걱정할 일이 아니라, ‘나 부활했다! 하나님이 나를 다시 살려주셨다!’ 하고 당당하게 선포해야 할 나의 현실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추수하기만 하면 된다. 내가 다 심어놨다. 하나님이 성령이, 씨뿌리고 잘 키워서 열매까지 맺어놨다. 너희는 거두어 들이기만 해라.”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내가 이제 새 사람이 되어야는데…’ 하고 왜 그렇게 노력만 하려고 합니까? 당신은 이미 새 사람입니다. 새 사람으로 살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죽어야 되는데.. 그래야 그리스도가 사는데...’ 하고 왜 그렇게 걱정만합니까? 옛사람? 하나님께서 다 없애셨어요. 있는 것 같다구요? 아닙니다. 껍데깁니다. 벌써 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이미 살고 계십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만 하면 됩니다.”

4. 은혜에 충실하게

부활은 은혜이고, 축복이다. 그 은혜를 받아서, 그 축복을 누리면 된다. 아직도 옛사람인 것만 같은가? 걱정하지 말고, 그냥 새사람으로 살기 시작해 보면 된다. 그러면 새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새사람으로 살기만 하면 된다. 새사람으로 사는 법을 모르는가? 그럴 리가? 주님의 말씀을 다시 보고 떠올려보자. 그렇게 살기만 하면 된다.

솔로몬이 한 가지를 선택했듯이 우리도 한 가지만 선택하면 된다. 그리고 그 한 가지에만 충실하면 된다. 부활의 현실을 선택하고, 부활의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내면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만 집중하고, 하나님이 함께해주시는 그 복에만 집중하면 된다. 솔로몬은 처음에 지혜를 선택했다가, 나중에 권력을 탐하고 재물에 눈을 돌리자 곧바로 몰락했다. 주저하며 옛사람을 바라볼 것 없다. 그럴 필요 없다. 옛사람이 내 안에 있어도, 육체의 법이 나를 지배하려고 해도, 이미 그것은 껍데기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나를 잡고 주저앉히려고 해도, ‘그러려면 그래라~’ 하고서 내 갈 길을 가면 된다. 새사람의 삶을 걸어가면 된다. 그러면 나를 옭아매는 것 같던 사슬들이 가을 낙엽처럼 힘없이 부서져 버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기가 어려울 것만 같던 그 힘든 일들은 주님께서 다 맡아 주셨다. 걱정할 것 없다. 우리에게는 추수할 일만 남았다. 추수하면서 즐거워할 일만 남았다. 거두어들인 것으로 기뻐할 일만 남았다. 그 기쁨을 위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 삶에 다 심어 놓으셨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부활의 아침, 빈 무덤을 보고, 부활의 현실을 목도한 여인들이 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렸다’고 말한다(마28:8). 부활은 이 여인들에게처럼 우리에게도 기쁘기도 하지만 무섭고 두렵고 어렵고 힘든 것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 “무서워하지 마라.” 우리는 무서움과 기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무서움을 없애신다. “무서워하지 마라. 기뻐하기만 해라. 무서운 것, 두려운 것, 어려운 것, 힘든 것, 그런 건 내가 다 짊어질게, 걱정하지 마라.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는 그저 기뻐하기만 해라. 기쁘게 살기만 해라. 부활의 현실을 누리기만 해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삶 속에 심어놓으신 구원, 거두기만 하면 되는 기쁨! 그 은혜의 현실을 택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담대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보자.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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