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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날의 창조, 여호와의 날!: 용서함으로 용서받는 감사의 날(슥 14:1-9 계 3:7-13 마 18:21-35)창조절 열둘째 주일/추수감사주일(11월20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11.18 15:15

1. 교회력과 성서일과

오늘은 창조절 열둘째주일로 창조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또한 추수감사주일이기도 한데, 창조절기를 감사로 맺을 수 있어 더욱 감사합니다. 통상축제력에 따르면, 이번 주가 성령강림절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지만,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The Sunday of the Reign of Christ)’입니다. 교회력으로 한해의 마지막이 되고, 다음주 대강절 첫째주일부터 다시 한해가 시작됩니다.

▲ <통상축제력과 삼위일체교회력>

 

우리 기장 교단이 사용하는 삼위일체교회력과 제가 만든 교회력(CCL)으로는 성부 하나님의 절기인 창조절이 지나고, 성자 예수님의 절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절기인 창조절, 성자 예수님의 절기인 대림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절기인 성령강림절이 한 해 동안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삼위일체교회력으로는 한 해의 시작은 창조절인 9월 첫째주일입니다.

이렇게 절기를 배열한 달력을 교회력(敎會歷, the Church Year, Annus Ecclesiasticus)이라고 합니다. 전례력(典禮曆, annus liturgicus), 성력(聖曆, annus sacer), 월력(月曆, 1965년 판 성공회 공동기도문)이라고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에 집중되어 있거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교회력에서 한 해의 시작은 기독교 교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동방교회는 9월, 서방교회는, 양력인 그레고리력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1월 1일과 달리, 교회력으로는 성탄 4주 전인 대림절을 한 해의 시작으로 봅니다. 아무튼 교회력은 서방교회 전통인 천주교, 성공회, 장로교, 루터교, 감리교 등이 사용하고 있으며 동방교회 전통으로는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력에 따른 관련 성서 본문 읽기를 ‘성서일과(Lectionary)’라고 합니다. ‘성서정과’, 혹은 ‘성구집’이라고도 하는데, “교회력을 기초로 절기의 예전적 사용을 위해 지정된 성경 말씀들을 발췌해 정렬해 놓은 것”입니다. 구약과 복음서, 서신서 등 세 본문이 중심이 되기도 하지만, 시편을 넣어 네 본문이 되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인 개신교 전통은 가톨릭의 교회력과 예전을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의 경우, 성찬과 세례만 수용하죠? 그러나 1940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영국 성공회의 성서정과를 사용하여 성서일과를 만들면서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대한 관심이 일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성공회 교회력에서 성자축일 등을 배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관련된 교회력으로 수정 보완하여 교회력을 만듭니다. 이후 많은 개신교회가 교회력과 성서일과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성서일과에 있어서 1969년 로마교회의 성구집(Roman Lectionary for Mass, Ordo Lectionum Missae)은 현대 성서일과의 획기적인 발전이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많은 교단이 성서일과를 고치고 개정하였는데, 특히 장로교회와 비예전적인 교회들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가령 1970년에 미국 남북 장로교회가 예식서를 공동으로 출판하였는데, 가톨릭의 성서정과를 대폭 수정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 역시 1973년에 가톨릭교회의 성서정과를 수정하여 만들었으며, 루터교회도 1973년에 성서정과를 만들었습니다. 1974년에는 제자교회(Disciples of Christ)와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가 장로교회와 비슷한 방식으로 수정하여 성서정과를 채택하였고, 1976년에는 감리교회가 성서정과를 채택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다양한 성서정과로 말미암아 교회의 혼란이 야기되자, 에큐메니칼 정신을 추구하는 교회와 교단은 1972년 ‘교회일치를 위한 협의회(COCU-Consultation on Church Union)’를 조직하여 그 산하에 ‘공동본문 위원회(CCT-Consultation on Common Texts)’로 하여금 모든 교단이 수용할 수 있는 교회력과 성서정과를 만들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따라서 1978년부터 5년간 걸친 연구 끝에 1983년 ‘공동성서정과(Common Lectionary, 이하 CL)’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9년이라는 실험을 거쳐 1992년에 완결판인 ‘개정판 공동성서정과(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이하 RCL)’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CCT의 회장으로 공동성서정과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호레이스 알렌(Dr. Horace T. Allen, Jr.)에 의하면, 현재 ‘개정판 공동성서정과(RCL)는 독일교회와 한국의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제외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 등 거의 모든 영어권 국가들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 현대 성서정과의 발전과정(RCL을 중심으로)

우리 교단이 사용하고 있는 삼위일체교회력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학자인 앨런 맥아더(Allan McArthur)가 만들었습니다. 기존의 교회력인 통상축제력이 예수님의 부활과 탄생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는데 문제 인식을 가지고, 성부의 절기인 창조절을 첨가하고, 성령과 성자의 절기, 곧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으로 교회력을 만든 것입니다. 특히 앨런 맥아더는 삼위일체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를 만들어 3년 단위의 최초의 전례독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수용되지 않았고 캐나다 연합교회가 수용했으며,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이를 받아들여 우리 상황에 맞게 보완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기장 교단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 구조를 따라 형성된 삼위일체교회력을 사용하는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1960년대), 캐나다 연합교회(1969년)를 거쳐 1979년 기장총회 새역사 25주년 기념총회에서 채택된 것입니다(총회 헌의 안건으로 채택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매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나타난 공동성서정과(1983년)와 개정공동성서정과(1992년)의 기독론 중심의 교회력보다 앞선 것이고, 그 결과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신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이것을 저는 ‘기장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시대를 앞선 예언자적인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장 교단은 기독론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교회력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창조절기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교회력의 장점에 관해 말씀목회연구원 원장 최부옥 목사는 『교회력에 따른 세 본문 설교의 이론과 실재: 삼위일체교회력에 따른』(서울: 말씀목회연구원, 2018)에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세계교회협의회의 JPIC(정의, 평화, 창조세계 보전)의 에큐메니컬 신학의 입장을 수용한 것이다. 특히 성부 하나님의 절기인 창조절기를 모든 절기의 첫 절기에 배치했다. 이것은 창세기의 창조신앙의 기본 위에서 모든 구원의 이해들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취지이다. 둘째, 사도신경의 삼위일체론적 신앙고백에 따라서, 전체 교회력의 구조를 성부의 계절, 성자의 계절, 성령의 계절로 더 확실하고 균형 있게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13-14)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 분열과 민족 분단의 아픔 속에서 극심하게 고통을 겪고 있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는 삼위일체론의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가 필요하기에 교회력 역시 삼위일체교회력을 사용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관계의 유비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적인 속성을 인간이 이어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관계적 속성이란 무엇인가요? 곧, 삼위(三位)가 하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성부, 성자, 성령) 간의 관계가 완벽한 조화 가운데 일치하는 하나님인데, 우리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관계적 속성’을 본받아 지음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이 관계성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성은 핵심은 사랑입니다. 나아가 이 관계성은 모든 피조물에도 해당이 됩니다. 지금 이 시대가 그렇지 않나요?

아무튼 교회의 회계년도도 그렇고, 통상축제력으로도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절기인 대림절로 한 해 교회력이 다시 시작됩니다. 앞서 오늘이 창조절 마지막 주일이자 추수감사주일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다시 한번 한 해 동안, 코로나의 위기, 경제 위기, 정치와 외교의 위기라는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우리를 이끄시고 동행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드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여호와의 날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새로운 날의 창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곧 마지막 날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와 새로 밝아오는 새 하늘 새 땅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 스가랴서가 그렇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 새로운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의 날은 ‘세상의 종말’, 곧 ‘세상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물론 ‘개인의 죽음’, ‘삶에서 만나는 위기의 순간’에 대한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구원과 승리의 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날을 맞아, 사도 요한은 오늘 우리들에게 빌라델비아교회 교인들처럼 비록 작은 능력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충성을 다했던 것을 본받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충성은 참된 용서에서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형제를 용서하되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마지막 날을 예비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용서함으로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슥 14:1-2)

남 유다의 멸망을 이야기하는 열왕기하 25장 말씀이 기억납니다. 따라서 스가랴는 그날을 기억하며 말씀을 선포합니다. 당시 남 유다는 바벨론의 제3차 침공으로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유다의 제 20대 왕 시드기야는 많은 백성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가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지 140여 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날은 먼저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같이 임할 것입니다. 심판으로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승리자로 예루살렘 성읍에 들어가실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하리라.”(슥 14:3-5)

남유다를 무너뜨린 이방 나라를 하나님께서 멸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킨 이방인들을 짓밟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구원을 받습니다. 또한 생수가 흐르고,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며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슥 14:6-9)

이렇게 오늘 스가랴 본문 말씀은 여호와의 날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되면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학살한 주변 강대국들이 멸망하고 참회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를 믿는 남은 자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3.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시 오시는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 요한계시록 말씀과 복음서 말씀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날에, 새로운 신앙의 비밀을 두 가지 정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작은 능력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 빌라델비아 유적과 지역 위치

“빌라델비아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 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7-8)

사도 요한이 빌라델비아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빌라델비아(필라델포스)의 이름의 뜻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필리아(우정)’라는 말이 여기에 들어가 있죠? 빌라델비아는 ‘작은 에덴’이라고 불릴 만큼 문화적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던 도시입니다.

아무튼 요한은 비록 연약하지만 충성되었던 빌라델비아교회를 칭찬합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장차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빌라델비아교회 교인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놓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빌라델비아교회 교인들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장차 온 세상에 임하는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9-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작은 능력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기는 자’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자입니다. 마지막 구절을 볼까요?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11-13)

4. ‘이기는 자’는 ‘이기적’이지 않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이렇게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자, 곧 ‘이기는 자’는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시 오시는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기 위해서 새로운 신앙의 비밀 두 번째는 용서함으로 받는 용서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베드로가 용서에 관해 질문하자,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끝없는 용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기는 자’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는 자’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으나, 여호와의 날의 기준은, 천국의 기준은 우리 인간들의 기준과는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러한 용서를 비유의 말씀으로 풀어줍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마 18:23-27)

▲ 1달란트 무게와 로마의 은화 데나리온

이스라엘의 화폐단위인 만 달란트는 얼마 정도일까요? 금 한 달란트가 34kg 정도, 우리 돈으로 20억이니 만 달란트는 빚진 자가 20만 년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입니다. 곧 ‘무한한 빚, 사망의 빚’입니다. 이것은 빚진 자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빚준 자가 빚을 탕감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주인이 탕감해 줍니다. ‘무한한 빛, 생명의 빛’입니다. 이것을 우리 기독교 신학에서, 구원은 ‘은총’으로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곧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탕감받은 종이 어떻게 하죠?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마 18:28-30)

로마의 화폐단위인 백 데나리온은 얼마일까요? 한 데나리온은 쉽게 말해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우리 돈으로 10만 원으로 치면, 백 데나리온은 1,000만 원 정도입니다. 백 데나리온도 큰돈이긴 합니다만,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정말 작은 소액입니다. 그런데 종은 간구하는 동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주인이 자신을 용서했기에 자신이 살아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원통한 일은 사람들이 봅니다. 따라서 동료들이 그 종의 주인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해 줍니다.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마 18:31-34)

주인이 종을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은혜로 용서받았으나, 은혜로 용서하지 못한 자의 최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마 18:35).” 그렇습니다. 새로운 날, 여호와의 날은 용서함으로 용서받는 감사의 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창조절기에 충성된 일꾼으로 끝까지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용서함으로 용서를 받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감사의 삶을 살아감으로 창조절을 정리하고 이제 다가올 대림절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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