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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했던 시선을 남에게 돌릴 때그리스도의 우편에 서는 사람(마태복음 25:37-40)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11.20 05:23
▲ Sconosciuto, Mosaic in Basilica di Sant'Apollinare Nuovo, Ravenna, Italy (c. 6th) ⓒWikipedia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들어가는 말

창조절 열 둘째 주일이자 창조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또 본래의 절기상으로는 추수감사주일이기도 합니다만 저희는 이미 추수감사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추수감사절로 지키지는 않습니다.

오늘 저희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은 주일학교 어린이들까지도 다 알고 있을 법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사람을 두 부류로 구분하신 후에 한 쪽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아 영생을 누리게 되지만, 다른 한 쪽은 영원한 벌에 처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찌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되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에 많은 성도님들의 신앙을 굳게 붙잡게 하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심판에 관한 선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두려워하며 받아들여야 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도 없고, 우리가 간단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온전히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었을 때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유월절을 맞이하시기 직전에 전하셨던 본문의 말씀을 다시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사회 속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며 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려고 합니다.

의인과 악인

오늘 본문은 두 집단을 대비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지금 당장 벌어질 상황을 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벌어질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순간은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32절에서 모든 민족을 구분하신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심판 대상은 유대인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구분하십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십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서 우리가 양과 염소 중에 양이 더 뛰어나다는 결론을 내릴 이유는 없습니다.

당시 양의 가격이 염소보다 비쌌을 수도 있고, 빛깔의 측면에서 흰색의 양이 염소에 비해 더 나아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간혹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목자로 표현되고 그 백성들은 양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양이 염소보다 값지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구약성경에서 양과 염소는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진 않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나타난 유월절 규정에서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양이나 염소 중에서 흠 없고 일 년 된 것을 바치라고 말합니다. 레위기 4장에서도 속죄제를 위해 염소를 바치라는 명령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성막의 휘장은 염소 털로 만들어졌습니다.

양과 염소 중에 무엇이 더 뛰어난 짐승인가는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점이 아닙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행위는 아마 당시 목자들이 밤이 되면 양은 공기가 맑은 지역으로 모으고, 염소는 따뜻한 지역으로 모았던 행동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목자들이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좌우로 구분하실 것이라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심판 때에 사람들을 두 부류로 구분하는 기준은 아주 간단합니다. 똑같은 상황 속에서 그들이 어떤 행동을 했느냐가 구분 기준이 됩니다. 이들에게 놓였던 상황은 주변에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부류로 나뉜 사람들의 태도는 상반되게 나타납니다. 오른편에 선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주변에 있던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고 대접하였으며, 문안했습니다. 반면에 왼편에 선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두 부류의 사람을 간단하게 의인과 악인으로 나눌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우리가 간혹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과거 유행했던 성화 중에 예수님께서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 그림이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며 우리가 회개하실 기다리신다는 의미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이미지와 오늘 본문의 말씀이 만나면서, 예수님께서 마치 자신을 감추고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본문의 말씀 속에 나타난 주린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는 예수님의 변장이었고, 우리가 그 순간 예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남을 위하는 방식을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설명이었을 뿐인데,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까지 남게 된 관념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의 변장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한때 많은 교회에서 이야기했던, ‘모든 이들을 예수님처럼 대하자’라는 말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변장이거나 그들도 예수님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돕는 것입니다.

약한 이를 돕는 일

본문에 나타난 말씀 자체는 상당히 간단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도왔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우편에 서서 영생을 허락받았고, 그를 외면한 사람들은 왼편에 서서 영벌에 처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앞서 오른편에 선 사람들과 왼편에 선 사람들을 의인과 악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왼편에 선 사람들을 악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심판 때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는 점과 그들이 영원한 벌을 받게 된다는 점을 본다면, 그들은 죄인이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죄인으로 규정하셨다고 해서 그들이 악한 사람들이었는가는 우리가 선뜻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내 삶을 이유로 외면해 버리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회를 살아가면서 사회적 약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약간 혼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회적 약자’라고 말하면 어떤 대상들이 떠오르기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사회 속에서 ‘누가 사회적 약자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많은 이들은 ‘글쎄요’라는 대답을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 질문에 ‘제가 사회적 약자인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할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표현 중 하나가 ‘살기 힘들다’인 것 같습니다. 물가는 계속해서 오르고 있고, 집값이 떨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젊은이들이 자기 집을 매매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금리도 올랐기 때문에 대출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집은 없는데 고금리 시대이기 때문에 월세는 계속해서 올라갑니다. 최근에 서울에서 아파트 월세가 400만원이 넘는 경우도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사회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약자라고 규정합니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 약자이기에 내가 남을 돕기보다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과 연결해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나누신 오른편과 왼편의 사람, 그 어떤 부류에도 자신을 넣지 않습니다.

두 부류 외에 본문에 나타난 또 다른 부류, 바로 제3의 부류인 ‘예수님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는 위치에 스스로를 집어넣게 됩니다. 이 부류에 속한 이들은 남을 도울 의무도, 남을 돕지 않았다고 해서 책망받을 일도 없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극히 작은 사람,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한정시켜서 생각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주리는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는 꼭 사회적 약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저 우리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잘 사는 사람이 못 사는 사람을 돕는다는 사회 복지 차원의 문제를 떠나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외면할 것인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것인지 예수님께서는 질문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외면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영생을, 외면한 이들에게는 영벌을 내리겠다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의 문제로 보입니다. 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또 안다고 해도 내가 먼저기 때문에 그들의 어려움보다는 내 어려움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어려운 이들을 돕기보단 내 삶이 더 어렵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내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조차도 외면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가 만든 진짜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며 그들을 위한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는 사람, 친한 사람에게조차 선의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는데, 알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선의의 손길을 내미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대에 의해 약자의 자리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합니다. 그들을 약자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이동권 투쟁을 위해 지하철로 나온 장애인들을 보면서, 정부 보조금도 받는 사람들이 왜 우리의 삶을 방해하냐고 따져 묻게 됩니다. 장애를 가진 당신들보다 우리가 더 약자라고 큰소리치게 됩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에 나왔던 인물인 권민우의 대사는 요즘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우영우는 우리를 매번 이기는데, 정작 우리는 우영우를 공격하면 안돼” 자폐를 가진 우영우가 사회적 강자이고 자신들은 우영우에 비해 사회적 약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창조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세계는 꼭 자연 생태에만 한정될 수 없습니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에 사람이 사는 세상 모두가 창조 세계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고 그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게끔 이끄는 일도 창조 세계를 보전하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나만을 바라보며, 내 어려움만을 생각하며, 나야말로 약한 사람이니까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돌릴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내 주변의 어려운 이들, 아픔을 가진 이들을 바라보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관련이 없지만, 지금 세상 속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 살아갈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을 바라보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선한 마음을 쏟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우편에 세우시며,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허락하시고 영생을 허락하게 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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