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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개혁, 교회의 개혁떨쳐 일어나 방향을 전환하고 고백하는 교회 (5)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2.11.25 23:15
▲ Fra Angelico, 「St Peter Preaching in the Presence of St Mark」 (1433) ⓒWikimediaCommons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의 교회를 갱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의 갱신은 올바른 예배의 갱신을 말한다. 왜냐하면 복음이 올바로 선포되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될 때, 거기에 참된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된 본질은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나타난다.

바르트는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는 하나님의 인식과 예배』라는 책에서 교회의 예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의 예배는 지상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절실한 것,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고 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이다.”(1)

이 진술은 초대교회의 생동감에 넘치는 예배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지시한다. 로호만에 의하면 오늘날 이 생동성은 동방교회의 예배와 의식에서 인상깊게 나타난다. 교회의 예배에서 맥박치는 이 생동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운명을 현실적으로 현재화하는 것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특별한 역사로 가능한 것이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 예배의 역동성을 보존했다. 교회는, ‘아우구스타나 신앙고백’이 표현하고 있듯이, 이러한 방향을 지시한 예배에 의해 정의된다.(2)

우리는 오늘날에도 교회 갱신에 대한 논의에서 이점을 거듭 생각해야 한다.

“예배에서, 예배의 행동과 사건에서, 교회의 심장은 뛴다. 교회는 예배의 본래적인 영역에서 존재하고 이 예배는 어떠한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다. 교회의 본질에 상응하는 최대의 봉사는 생동하는 예배를 위한 노력이다.”(3)

참으로 교회는 자선기관이나, 일반적으로 세계와 인간의 개조를 위해서 일하는 기관이 아니다. 교회는 공동체 생활을 훈련시키는 기관도 아니고, 정신적인 위안을 주는 기관도 아니다. 교회의 과제는 좀더 단순하다. 사람들을 부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현재하심과 통치를 상기시켜주고, 인간은 그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말씀을 듣지 않고 성례전이 없는 교회는 타락한다

현대 교회는 종종 이 점을 간과하고서는 모든 면에서 활동하고자 손을 뻗쳤기에 자기 고유의 행동을 잊어버렸거나 소홀히 하고 말았다. 그러나 교회가 행동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강렬하며 노력을 요하거나 감격적인 행동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러한 행동 가운데서 교회의 예배의 내용이 성립된다. 교회가 설교하고 세례와 성찬을 베풀고 감사하는 까닭은 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들었고 또 반복해서 듣지 않으면 안 될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교회의 지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들음으로써 서로 봉사하고 세상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된다. 교회는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건설되며, 살아가고, 자라나며, 일하게 되고 교회 가운데서와 또한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교회로 존재할 때 그 교회는 참된 교회이다.(4)

그러나 교회 안에서 단지 설교가 행해진다고 해서 완전한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례전이 없는 설교만의 예배는 불완전한 예배일뿐이다. 처음 기독교인들은 단지 사도들의 가르침과 기도와 서로 사귀는 일에만 힘을 쓴 것이 아니라 함께 떡을 떼는 일에도(행 2:42, 행 20:7, 고전 11:33) 힘을 썼다.

이것은 규칙적이고 정기적인 일이었다.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는 2세기 초의 어떤 문서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주일에 두 가지 종류의 예배, 곧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증언한다.(5) 또한 우리는 처음 기독교인들이 주일 모임에서 성만찬의 예배를 제외시켰다는 것을 증언하는 어떠한 고대 교회의 증언도 갖고 있지 않다.(6)

16세기까지 매주 거행되는 성만찬의 전통은 중요한 변화를 겪기는 했지만 계속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신자들은 일년에 한번 성만찬에 참여했을 뿐이고, 그것도 떡과 포도주의 성만찬이 아니라 단지 떡만의 성만찬이었다.(7)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이 불완전한 성만찬을 원상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설교와 함께 예배의 필수적인 구성요소가 되게 하였다.

이점은 오늘날 개혁교회의 예배와 예전 신학에 정통한 개혁교회 신학자 장 자끄 폰 알멘에 의해 적극 지지된다.(8) 그에 의하면 “성만찬 없는 예배는 마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이 없는 예수의 사역과도 같다.”(9) 이런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개혁교회의 문제는 성례전이 없는 예배가 외견상으로도 불완전한 예배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다.(10)

바르트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오늘날 개혁교회가 벌이고 있는 교회 갱신운동이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개혁교회가 일반적인 예배에서 범하고 있는 이 근거(세례와 성만찬)의 결여, 즉 성례전의 결여를 파악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지적한다.(1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교회의 본연의 행동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성례전이 거행되는 가운데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졌고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것을 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듣는 바로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의 선한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이다.(12)

이것은 종교개혁적인 예배 이해의 세 번째 강조점과 연결된다. 말씀과 성례전으로 생동하는 예배는 기독교인의 모든 삶에서 빛을 발하고, 모든 삶의 초점이 된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적인 의미에서 기독교인의 모든 삶은 넓은 의미에서 예배이다.(13)

변화를 위해 훈련 받는 교회

우리는 앞에서 개혁교회가 루터적인 두 표지에 세 번째 강조점을 추가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훈련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칼빈이 자주 사용한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의 군대”(la compagnie de Dieu)이다.(14) 교회는 훈련받은 하나님의 군대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교회는 올바른 교리와 신앙의 인식을 통하여 교회를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할뿐만 아니라, 삶의 전체성 속에서, 이웃과의 만남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전위대로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행동하고 고난을 받아야 한다. 교회는 이와 같이 도래하는 세계 변혁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전위대로서만 진정한 교회가 되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할 때만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강조는 세상에 위치한 본질적인 교회의 모습을 지시한다. 분명히 신약성서의 교회는 자신에 만족하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했던 공동체가 아니었다. 교회는 변화된 삶을 통하여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공동체로서, 세계의 민족들을 동요시키고 하나님의 나라의 혁명을 주도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었다.(15)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고전적인 교회의 표지들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를 성서적으로 이해하면, 세계의 지평에서 봉사하라는 하나님의 부름으로 들을 수 있다. 이것은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의 예언자적인 자기 이해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거룩한 백성이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의 목적은 온 세계의 구원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존재 목적이 교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온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다고 할 때, 교회의 이 현실성은 “사도적인 교회”에서 가장 실천적인 결과를 나타낸다.

사도적인 교회의 신자들은 교회 안에 남아 있지 않고 부활하신 분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세계에 당당히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전위대로서 세속의 깊은 바다에서, 그리고 세계사의 잘못된 길에서 모든 민족들에게 참된 길과 희망과 자유의 빛을 반사하는 “민족들의 빛”(lumen gentium)으로서 드러났다.(16)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예배의 갱신을 통하여 잊혀졌던 교회의 참된 본질을 되찾고, 이 세계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떨쳐 일어나 그리스도를 향해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에 대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네 표지와 종교개혁자들의 세 표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고전적인 네 표지와 종교개혁의 세 표지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 있음을 확인했다. 참된 교회(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는 복음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로 집행되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의 규정에 따라 바르게 훈련되는 교회이다.

교회 갱신의 모범적인 사례를 제시한 종교개혁자들의 이러한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우리 교회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가 성례전 없는 말씀만의 예배를 드리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완전한 예배” 가운데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운명을 현실적으로 현재화할 수 있겠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진 모든 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받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말씀으로 훈련받지 못한 군대가 세상의 온갖 유혹에 굴하지 않고 바른 교회를 위한 투쟁을 벌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교회의 갱신은 예배의 갱신으로 시작되어야 하고, 우리의 예배는 초대교회의 생동감에 넘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소리 높여 외치며 대충 모든 것이 바꾸어져야 한다고 말만 하는 사람들과 같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교회에서 그리스도가 아니라 ‘맘몬’과 ‘세속주의적 이념들’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떨쳐 일어나” 그리스도를 향해 “방향을 전환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일이다.(17)

미주

(1) K. Barth,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Reformation. Recalling The Scottish Confession of 1560, London: Hodder and Stoughton Publishers, 1960, 198. (이하 KGSG로 표기)

(2) J. M. Lochmann, 『사도신경 해설』, 오영석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4), 187.

(3) KGSG, 198.

(4) Ibid., 210.

(5) Jean-Jacques von Allmen, Célébrer Le Salut, Doctrine et Practique du Culte Chrétien, Genève: Labor et Fides, 157. 이 문서는 2세기 초 젊은 총독 플리니가 로마 황제 트라얀에게 보낸 편지인데, 플리니는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 그들의 습관에 따라 서로 헤어진 뒤에는 얼마 있다가 같이 식사를 하기 위해 새로 모이곤 합니다. 물론 그것은 정상적이고 위험성이 없는 식사입니다. …”라고 말한다.

(6) Ibid.

(7) Ibid., 159.

(8) Ibid., 162-168를 보라. 루터는 주일의 성만찬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는 헝가리 개혁교회(1562년)와 바젤의 개혁교회만이 주일마다 성만찬을 거행했을 뿐이고, 대부분의 개혁교회에서는 일년에 네 차례 성만찬을 거행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폰 알멘에 의하면 개혁교회가 매주 거행되었던 성만찬을 없애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오히려 그들이 성만찬 주일을 네 번으로 증가시켰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당한 평가라고 말한다.

(9) Ibid., 165.

(10) KGSG, 211.

(11) Ibid., 212.

(12) bid. 바르트는 종교개혁적인 예배이해가 철저하게 성례전적으로 방향을 설정한 예배였다는 것을 강조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성례전 특히 성만찬의 교훈과 질서가 옳게 확립되어 있는 곳에서만 교회의 예배가 또한 반드시 옳게 될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Ibid., 190-191.

(13) Lochmann, 『사도신경 해설』, 187.

(14) K. Barth, 『칼 바르트가 읽은 주의 기도/사도신조』, 최영 옮김 (서울: 다산글방, 2000), 208, 209.

(15) H. J. Kraus, 『조직신학』, 박재순 역(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7), 436 이하.

(16) Lochmann, 『사도신경 해설』, 188 이하.

(17) K. Barth, 『마지막 증언들』, 정미현 옮김 (서울: 한들출판사, 1997), 6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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