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숨을 쉬듯이우리가 언제?(마태25:31-46, 미가4:1-4, 계19:1-10)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11.29 00:34
▲ 「Christ the Pantokrator」, Assumption Greek Orthodox Cathedral, Denver, Colorado

1. 어린양의 혼인잔치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어보면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날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깨달은 심판의 여러 가지 국면을 하나 하나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첫째 대접을 쏟으면 무슨 일이 있고, 둘째 대접을 쏟으면 무슨 일이 있고 … 첫째 두루마리를 읽으면 무슨 일이 있고, 둘째 두루마리를 읽으면 무슨 일이 생겨나고 …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말씀을 진짜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날에 일어나는 일들이란 이런 일일 것입니다’ 하는 것이지, 순서대로 구체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된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애초에 이단 종말론자들이 계시록을 해석하는 방식 자체는 그 근본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창세기는 이런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빛을 만드셨고, 하늘도 만들고 땅도 만들고, 음 … 식물도 만들고 나무도 만들고, 동물도 만들고, 또 뭐가 있냐? 아, 태양도 만들고 달도 만들고 별도 만드셨다. 마지막으로는 우리 사람도 만드셨다.’ 창조의 순서란, 정확하게, 처음에 빛을 만들고, 다음에는 창공을 만들어서 물을 나누고, 세 번째는 식물을 만들고, 네 번째 해와 달을 만들고, 다섯 번째 짐승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들었다. 순서가 딱 이렇다는 게 아닙니다. 창조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바를, 고백할 수 있는 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계시록이 그리고 있는 최후의 심판도 그렇습니다. 순서대로 이 일이 먼저 일어나면, 그 다음에 이렇게 되고, 그 다음에 이런 일이 있고 …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깨달은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모아 놓은 것입니다. ‘이런 일도 있고, 이런 일도 있고, 이런 일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란 이런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하고 말입니다.

요한의 계시록을 보면 어린양의 혼인 잔치 이야기가 나옵니다(계19:1-10). 온 세상을 지배하던 바벨론이 마침내 멸망하고, 잔치가 벌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잔치가 그냥 잔치가 아니라 ‘어린 양의 혼인잔치’라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누구입니까? 네, 맞습니다. 어린 양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을 살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표현합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스스로 구원의 제물이 되신 분입니다. 그 어린 양이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세상 마지막 날에 보니 화려하게 혼인 잔치를 하더라는 겁니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예수란 사람을 봐라. 혼자 잘난 척하더니 죽었다. ‘사랑해라’ 하더니 혼자 사랑 많이 하고는 저렇게 죽었다. 저게 뭐야? ‘정의롭게 살아라’ 하더니 혼자 정의로운 척 다 하고는 그냥 죽었다. 저게 뭐냐? 사실은 실패한 인생 아니야? 말만 그럴 듯하지, 나는 저렇게 살기 싫어. 저건 실패한 인생이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에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고개 숙이고 살고 있었는데, 웬걸? 세상 으리으리하던 바벨론이 멸망하고 그 죽었던 어린 양이 돌아와서는 화려한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세상의 진짜 마지막 모습이라는 겁니다.

어린 양이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굽니까? 우리가 닮고 싶어하는 분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겠다고 결단하고 살아가는 우리 삶의 전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계시록이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그리고 있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을 주는 겁니다. 희망을 주는 겁니다. ‘포기하지 마. 주눅 들지 마. 예수님, 죽어 버린 거 아니야. 예수님은 죽음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그 죽음을 이겨내신 거야. 봐! 마지막에 예수님이 이기는 거야!’ 우리의 삶이 정답이었다고 확증해주는 말씀입니다.

2. 칼을 쳐서 보습으로

이런 확증은 미가서를 보면 더욱 명확합니다. “그날이 오면, 주님의 성전이 높이 솟아서 우뚝 서고, 주님께서 다스리시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께로 몰려 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면, 모든 나라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포도나무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입니다(미4:1-4).”

마침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 되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듭니다. 생명을 죽이는 인간의 삶의 방식인 칼과 창을 없애버리고, 생명을 살리는 생명을 일구는 하나님의 삶의 방식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나 다 하늘나라를 살게 됩니다.

그런 하늘나라의 삶을 ‘자기 포도나무 아래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평화롭게 앉아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대로라면,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세상, 사자가 풀을 뜯고 뱀이 흙을 먹는,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안전한, 그런 세상인 것입니다.

3.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삶이 정답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그 비전을 바라보고 살아라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어린 양이 혼인 잔치 하는 그런 날을, 우리가 어떻게 맞이할 수 있습니까?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가 할 수는 있습니까? 어린 양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따라 가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요? 마지막 때는 또 도대체 언제여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그냥 먼 미래의 환상 같이 느껴집니다.

풀기 어려운 이런 수많은 질문들과 함께, 한편으로는 그 나라를 위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아득한 의무감만이 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약속해 주셨지만, 그 약속은 너무나 멀리 있는 것 같고,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마냥 기도만 하면 될까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에 쓰여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려고 멀리 돌아 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선택받으려면, 우리 곁에 작은 사람들을 잘 섬겨야 하는구나. 약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돌봐야 하는구나.’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복 받는 비결은 사회복지고 사회사업입니까? 사회적 약자를 잘 돌보면 되는 겁니까? 그거면 됩니까? 오늘 말씀이 그런 말씀일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이 우리 인간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인간이 얼마나 착하게 사느냐? 선하게 사느냐? 그게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것 상관없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구원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은 철저하게 공로를 보신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씀을 조금 더 신중하게 봐야 하지 않을까요?

4. 우리가 언제?

오늘 우리가 붙들고 씨름해야 할 말씀의 중심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입니다. 주님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나에게 너무나 잘했다.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물을 줬고, 나그네일 때 영접했고, 병들었을 때 돌봐줬다. 참 잘했다.” 그러니까 의인들이 대답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네? 우리가 언제요?”

몰랐다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줄 몰랐다는 겁니다. 주님인 줄도 모르고 섬겼다는 겁니다.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서 그렇게 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 사람 섬기고 있는 거, 하나님께서 지금 보고 계시겠지?’ 이런 마음 품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놀라는 겁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그랬어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의로운 자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몰랐다는 겁니다. 자기가 의롭게 행하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실 때 오히려 놀랐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서 우리의 결론이 ‘그래, 작은 자에게 잘 해야지!’ 이래서는 안 됩니다. 물론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작은 자를 섬기는 게 주님을 섬기는 거래. 그래야 최후의 심판 때 구원받는데.’ 하는 것은 주님이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의도가 아닙니다.

어린 양이 혼인 잔치를 열게 되었을 때, ‘그래, 마침내 이럴 줄 알았지. 내가 이걸 기다렸지. 역시 기다린 대로 되는 구나’ 하셨을까요? 아닐 겁니다. 주님께서는 ‘아니, 나는 하나님께서 살라는 대로 살았을 뿐인데, 왜, 나한테 이런 영광을 주시지?’ 하고 어리둥절하셨을 겁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면서도, 주님은 속으로 ‘나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하고 계실 겁니다. 그게 주님의 진짜 마음일 것입니다.

의식적인 행동과 노력도 칭찬받을 일입니다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언제요?’ 하고 우리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만큼, 그렇게 우리의 자연스러운 삶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천국을 누리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와~ 역시 하늘나라 좋네, 역시 천국이야~’ 하면서 뭔가 대단한 느낌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천국에 사는 줄도 모르고 천국 생활을 하는 겁니다. 내가 하늘나라 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작은 자를 섬기며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참 잘 했다’ 칭찬하실 때마저도, ‘제가 언제요?’ 하는 그런 삶을 사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연습해야지요, 훈련해야지요. 잘 안 되는 몸과 마음을 다스려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나의 삶을 반성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내 안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 차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 마음에 순종해서 살아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 안에 ‘작은 자를 섬겨서 나도 복 받아야지’ 하는 마음마저도 사라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냥 당연한 듯,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살게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순간을 누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압니다.

우리 모두가 특별히 잘난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때로는 여러 가지 부족한 것들로 인해 하나님 앞에 한없이 부끄럽게 사는 사람들이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그런 영혼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자를 섬기며 살아가는 그런 영혼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이미 천국이요 하나님 나라이기를 기도합니다.

5. 기둥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우리 안에 든든히 자리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든든하게 자리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성령과의 교통입니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계절을 보냅니다. 결코 우리 힘으로 살아낼 수 없는 삶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우리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내 안에 태어나실 그리스도께서 내 삶을 굳건히 세워주시길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