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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좋으냐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삶의 의지와 열정(요한계시록 3:14~20)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2.11.29 22:54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의미를 새기며, 마음으로부터 반기는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그 대림절 첫 주일에 요한계시록의 본문말씀을 마주합니다. 요한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서 가운데 특별한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선과 악의 극단적 대결 구도와 고도의 상징성을 띠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껄끄럽게 느껴지고 또 한편으로는 어렵게 느껴지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시대 전후로 매우 강력하게 영향력을 끼친 묵시적 세계관, 곧 종말론적 세계관이 지니는 기본 성격을 이해하면, 그 맥락에서 크게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절박한 믿음의 세계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의 도래와 함께 열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절절한 믿음이 그 핵심입니다. 박해와 혼란 등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의 기대 또한 극단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서신이지만 특별히 계시록이라 이름이 붙은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뤄지기까지의 여정을 비밀스러운 상징적 언어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로 시작합니다. 본문말씀은 라오디게아에 보낸 편지이지만, 그 맥락과 상관없이 대개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말씀으로 잘 기억되고 있는 본문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매우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금융업과 양모업, 의료학교가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아마도 교회 공동체 성원들 역시 그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었던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보기에 그들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로움은 거꾸로 믿음의 빈곤함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상에서의 물질적 풍요로움 때문에 신앙의 자극과 긴장이 별로 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이 지극히 빈곤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권면의 첫머리에서부터 의미심장하게 시작합니다. “아멘이신 분이시오,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이렇게 장중하게 시작한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삶의 무게감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신 뜻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났음을 환기하며, 따라서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그 밑바탕에서부터 철저하게 그 뜻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을 환기합니다. 믿는 듯 마는 뜨뜻미지근한 삶이 아니라 믿음에 걸 맞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곧바로 그 의미를 역설합니다. 익숙한 구절입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이 지역이 지진 지대여서 온천물이 솟고 있으니 그 온도에 민감한 사람들에게 금방 이해될 수 있는 비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빈약한 상태로 살아가는 삶을 그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니 그 길에 합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그 길을 확실하게 삶으로 체현하지 못한 공동체의 상황입니다.

그것은 그 공동체가 매우 자족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한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자족하는 삶이 실상은 매우 빈약한 삶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우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이 말씀 또한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쉽사리 이해될 수 있는 비유적 표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금융업과 양모업, 의료학교가 발달한 지역 상황에 그대로 상응합니다. 금과 옷, 의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딱 그에 상응하는 비유입니다.

풍요를 누리며 자족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삶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한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는 것입니다.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 흰 옷을 사고, … 안약을 사는 것’은 시장의 거래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서가 말하듯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이사 55:1~2) 이 말씀의 뜻을 그대로 환기합니다.

어찌 먹고 마시는 일을 배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인간 삶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예수의 말씀(마태 4:4)과 같은 의미입니다.

▲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단순 명료한데, 그리스도로 인해 새로워진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가지라는 것이다. ⓒGetty Image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요한의 결론은 주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네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일종의 혼인잔치를 연상케 하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 머나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곧바로 이뤄져야 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일깨웁니다. 지금 문밖에 오셨으니 맞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전반적 기조에서 볼 때 임박한 종말, 곧 지금 가까이 다가온 새 하늘과 새 땅의 현실을 뜻합니다.

사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오늘 본문말씀의 요체는 매우 간단명료합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모른다.” 이 말씀 가운데 그 요체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빈약하여, 영혼이 빈곤한 상태에 처해 있는 공동체의 실상을 일깨우고 영혼이 풍요롭게 되는 길을 일러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표방하고 모였으되, 정작 자신들이 처해 있는 일상의 삶을 뒤집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이 결여된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앙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와 열정이 결여된 공동체는 살아 있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 의지와 열정을 회복할 때 그 가운데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본문말씀의 요체입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말씀은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그것은 다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지향성을 가진 열정과 헌신성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고 그것을 스스로의 삶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을 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의 의지와 열정을 가질 수 있을까요? 공동체를 구성하는 핵심으로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축제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맛보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는 축제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삶에서 미미하게 경험하는 어떤 기쁨을 재발견해 그 기쁨을 더욱 배가시키는 축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 인간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원형을 경험하는 축제입니다. 이 축제를 통해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결의를 다지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한 순간의 도피처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키고 제어할 힘을 얻는 결정적 순간입니다.

물론 기쁨을 가장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담한 심정으로 뭔가를 절박하게 호소해야만 하는 심정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오히려 그 마음이 더욱 클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으로 절박하게 호소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내면의 목소리를 진솔하게 들을 수 있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통한 심정으로 참여했다 하더라도 순수한 내면의 목소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 예배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쁨의 축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예배를 향한 모든 행위는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우리의 그 일상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향할 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밥을 함께 나누는 것, 교회당이 아니면 불가능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와 함께 나누는 공동식사는 사랑의 공동체의 원형을 구현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물질을 나누고 기부를 하는 것, 교회 밖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중 헌금을 드릴 때, 우리는 그 행위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새삼 환기합니다. 그 때 헌금은 내가 능력 있어서 내 주는 행위가 아니라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행위가 됩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발걸음, 그것은 단순히 어떤 약속장소를 향한 발걸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발걸음이요,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나를 돌아보기 위한 발걸음입니다.

이 예배 중 우리들의 말과 행위는 우리들 스스로의 말과 행위임에 분명하지만,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말과 행위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있는 우리의 말과 행위입니다. 일상에서 재현되지 않는 순전한 언어와 행위를 가다듬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순전해집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의지와 열정으로 우리는 모여 예배드리고 우리의 신앙공동체를 일구어나갑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장엄한 행진이 됩니다.

한 순간 열광했다가 그 열정이 물거품처럼 사그라지면서 냉혹한 현실을 다시 경험하는 현실이 반복된다면 우리의 일상은 지루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서, 뜻을 같이하는 자매형제들과 더불어 다진 의지와 열정이 일상을 헤쳐 나갈 용기의 원동력이 된다면 일상이 그렇게 지루할 수만은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여정, 삶의 현실을 바꿔나가는 과정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특별히 대림절을 맞이하여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고자 마음을 가다듬을 때 그 믿음의 뜨거운 의지와 열정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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