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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셋째 주일,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말씀 실천(습 1:2-6; 히 8:1-6; 막 4:1-20)대림절 셋째 주일/성서주일/인권주일(12월11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12.09 15:51

1. 기쁨과 희망의 촛불을 밝히며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목자들의 초’를 밝힙니다. 목자들이 천사들을 만납니다. 천사들은 실의에 빠진 목자들을 만나 기쁜 소식을 전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의 오심입니다. 그러나 커다란 기쁨에 휩싸인 목자들에게 천사들은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목자들처럼 초라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땅에 다시 오실 아기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로, 약한 자로, 가장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국은 목자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인권주일인데, 목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고통받고 있는 화물연대 파업 노동자들과 10・29 참사로 고통받는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함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탄생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대림절 셋째주는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또한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기쁨과 희망’의 시기가 됩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인 히브리서 말씀은 이렇게 오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새 언약의 중보자로 소개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친밀히 유지하기 위해 중보자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셨고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고, 결국 그를 따르는 이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이 성서주일이기도 한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말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복음서 말씀처럼, 말씀대로 살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 오늘 스바냐 선지자에 의하면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 곧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멸절하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결국 대림절 셋째 주일에 우리는 목자들의 초를 통해 기쁨과 희망의 촛불을 밝히지만, 그 촛불을 꺼뜨리는 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리에 소동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아니,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이 오면 이렇게 불의한 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 멸절될 것입니다. 오늘은 서신서 말씀부터 볼까요? 말씀이 어려워서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2.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위에서 말한 요점을 말하면, 우리는 하늘에서 전능하신 이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대사제(대제사장)를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 성전의 일을 맡아보시는데 그 성전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참다운 성막입니다. 대사제는 누구나 봉헌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임명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대사제도 무엇인가 바칠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다면 율법을 따라 봉헌물을 바치는 사제들이 따로 있으므로 결코 사제가 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히 8:1-4)

위에서 말한 요점은 아론계통의 제사장 직분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이 더 우월하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신 대제사장으로 주께서 세우신 하늘 성전인 참다운 성막(개역개정,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고 합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예물과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셨다면 율법에 따라 예물과 제사를 지내는 대제사장이 이 땅에 따로 있기에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그 사제들은 하늘 성전의 모조품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도 천막 성전을 지으려고 할 때에 ‘산에서 너에게 보여준 그 본을 따라 모든 것을 만들도록 하여라.’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훨씬 더 훌륭한 사제직을 맡으셨습니다. 그분은 더 좋은 약속을 바탕으로 하고 세운 더 좋은 계약의 중재자가 되셨으니 말입니다.”(히 8:5-6)

무슨 말씀인가요? 땅에 있는 제사장들이 하늘 성전의 대제사장인 예수님의 본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 때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더 좋은 대제사장직을 맡으셨습니다. 이것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제사장이자 동시에 제물이 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히 7:27). 따라서 예수님을 본받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또한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루터는 이것은 ‘만인사제직’이라고 합니다만).

사실 하나님께 드리는 참 제사는 루터의 만인사제직(만인제사장설)처럼 자기 자신이 참된 제사장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성서주일을 맞아 말씀에 대한 강조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렇게 말씀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복음서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3. 말씀을 듣고 받아 결실하는 자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 4:1-9)

▲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유명한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관해 제자들과 사람들이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묻습니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막 4:10-13)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외인(다른 사람들)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 관해 이렇게 풀어주십니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 4:11-20) 

결국 말씀을 듣고 받아 결실하는 자가 참된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받아 결실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받되 길가와 돌밭,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처럼 결실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외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외인에 관해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구약 말씀을 볼까요?

4.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는 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습 1:2-6)

오늘 본문 말씀에서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합니다. 백성들의 죄를 다스릴 심판의 날이 임박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받지 아니하고 인간의 인권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 악한 자들에 관한 심판입니다. 결국 스바냐 선지자는 불의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주위의 열방은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4절 말씀을 보면 ‘그마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왕하 23:5)’, 혹은 ‘제사장들(호 10:5)’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을 말합니다. 사실 유다가 정치적, 종교적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동안 종교개혁이 때때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시야 왕 시대에 종교개혁이 있었는데, 이것은 스바냐의 예언 때문입니다. 스바냐는 남유다 제16대 왕인 요시야(B.C.640~609년)의 통치 초기에 활동했습니다.

당시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외적인 변화는 가져왔으나, 내적인 타락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는 짐승과 새와 바다의 고기는 물론 사람들까지 진멸하시겠다고 합니다. 특히 ‘거치게 하는 것(새번역, 남을 넘어뜨리는 자들)’과 악인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합니다.

5. 2022년 ‘종교 인식조사’와 ‘성직자 호감도’ 결과

한국리서치가 지난 2022년 11월 25일부터 28일 4일간 실시한 ‘2022 종교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불교 호감도는 47.1점, 천주교는 45.2점, 개신교는 31.4점, 원불교는 27.5점이었고 이슬람교 호감도는 15.5점으로 5개 종교 중 가장 낮았다고 합니다. 호감도는 ‘감정온도’ 방식으로 측정해 아주 부정적인 감정이라면 0점, 매우 긍정적 감정이라면 100점, 긍정도 부정도 아니라면 50점으로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 2022년 한국 종교 인식조사

주목할 만한 대목은 개신교를 “매우 부정적”(0~24점)으로 평가한 응답자가 전체의 49%에 달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불교(27%)의 거의 2배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지난해 조사에서도 이렇듯 개신교에 극도의 반감을 표시한 응답자는 전체의 48%나 됐습니다.​

개신교를 “약간 긍정적”(51~75점), “매우 긍정적”(76~100점)으로 평가한 응답률은 각각 9%, 11%에 불과했습니다. 한국인 5명 중 4명은, 아니 10명 중 8명은 한국교회에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거나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고 있는 셈입니다. 특히 크리스천 스스로 평가한 개신교 호감도도 지난해에 비해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개신교 신자 스스로 매긴 개신교 호감도는 71.2점이었으나 올해는 64.5점에 불과했습니다.​

한국리서치는 예년과 달리 올해 조사에서는 각 종교 신자나 목사 승려 신부에 대한 호감도도 조사했는데, 개신교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은 이 조사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성직자 호감도 점수에서도 목사는 33.1점으로 신부(48.1점), 승려(45.9점)에 10점 이상 뒤처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종교가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과반 이상(56%)이 지금과 비슷한 수준의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했으며 종교의 영향력이 지금보다 커질 것이라는 응답이 21%, 작아질 것이라는 응답은 17%였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종교를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긍정적 효과에 관해 물어본 결과,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 안정감을 얻는데(79%), 긍정적인 감정을 갖는데(75%), 인간관계를 맺는데(74%), 소속감을 느끼는데(70%), 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데(70%) 도움이 된다는 응답이 70%를 상회하였습니다.​ 또한 올바른 가치관을 갖는데(64%), 본인의 정체성을 찾는 데(57%) 종교가 도움이 된다는 응답도 반수 이상이었습니다. 건강이나 시험, 취업 등의 목표를 이루는 데 종교를 믿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응답도 51%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목자들의 초를 밝히며 기쁨과 희망을 소망합니다.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아기 예수님을 맞으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고 따르지 않으며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는 자들과 같이 불의한 자들이 되지 말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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