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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페와 에로스, 같은 운동 다른 얼굴칼 바르트의 신학에서 아가페와 에로스 (2)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2.12.10 15:38
▲ 「Fresco of a female figure holding a chalice at an early Christian Agape feast」. Catacomb of Saints Marcellinus and Peter, Via Labicana, Rome. ⓒWikipedia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성취된 그의 헌신에서, 하나님 자신은 성부의 뜻에 순종하는 성자로서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인간을 위해 개입하셨다. 하나님의 이 행동에 인간 편에서는 일어난 사실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순종’이 상응한다(CD Ⅳ/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해 인간성을 취하신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그를 높이 올리시어 그의 계약의 상대자가 되게 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셨다.

하나님의 이 행동에 인간 편에서는 올바른 행동을 위하여 자유롭게 된 인간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행하신 바로 그것을 본받아 하나님과 이웃에 관하여 행사하는 ‘사랑의 순종’이 상응한다. 바로 이것이 화해론 제2권(CD Ⅳ/2)에서 묘사되는 ‘아가페’, 기독교의 사랑이고, 여기서부터 바르트는 아가페와 에로스를 대조시킨다.(1)

에로스, 아래로부터의 사랑의 운동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에로스는 육체적이고 쾌락적인 남녀간의 사랑이다. 그러나 원래 헬라 철학에서 말했던 에로스는 단순히 그러한 육체적, 쾌락적 사랑만을 뜻했던 것이 아니다.(2) 에로스라는 사랑은 한 피조물이 자기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자기자신의 주장, 자기만족, 자기실현 및 자기성취를 추구하는 근원적으로 강력한 욕망, 강한 충동, 추진력, 노력 같은 것들을 의미했다.

이런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사물에 다가서려고 노력하면서 그 사람 혹은 그 사물을 자기를 위해서 얻고 자기 쪽으로 가져오며 가능한 한 확실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게 된다(ET, 184). 이러한 에로스가 작용할 때, 인간은 어떤 대상을 향해서, 그것이 다른 사람이든 어떤 대상이든 간에 그것을 향해서 움직이고, 그 대상에 집착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 있다.

특히 학문의 분야에서 에로스는 중요하다. 이 학문적 에로스가 없다면, 학문적 성취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지적 노력은 학문의 대상을 향해 올라가서 이 대상과 연합하고 이 대상들을 소유한 후 향유하려는 상향운동이다. 이 에로스가 이같이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상향적 성질의 운동이기 때문에, 이 에로스는 다른 모든 선과 가치들을 넘어서 위에 계신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다(ET, 184이하).

그러나 이 에로스가 지닌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료 인간을 사랑하려는 모든 시도가 에로스적 사랑을 하는 당사자의 심오하고 은밀한 자기 이익과 자기 사랑을 위해서 이루어진다는데 있다. 가령 에로스적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의 사랑의 대상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실제로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그의 사랑의 대상을 획득하고 지키고 혹은 향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다(참고, 고전 13:3).

또한 아무리 그가 그의 사랑의 대상을 향하여 그 자신을 초월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그 대상을 획득하고 지키고 향유하기 위하여 그 대상 앞에서 보다 강력하게 자기자신을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CD Ⅳ/2, 734). 언제나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고, 그가 추구하는 것은 자기자신의 주장과 발전이다. 그것은 그 모든 형식에서 언제나 “움켜잡고, 정복하고, 소유하는 사랑, 곧 이기적인 자기사랑”이다(CD Ⅳ/2, 735).

그래서 바르트는 이 사랑의 운동이 어떤 “순환의 형식”을 띠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이든지 유한자의 초월을 통하여 무한자를 추구하지만, 결국 언제나 무한자를 경유하여 그 처음으로 귀환하는 경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CD Ⅳ/2, 734).

아가페, 위로부터의 사랑의 운동

그러나 신약성서에 의하면, 이 에로스와 정반대의 사랑이 나타난다. 신약성서에서 에로스는, 경멸적인 의미에서도,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CD Ⅳ/2, 736).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사랑, 곧 아가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를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근원에 있어서 밖으로부터 온 것이요 전적으로 새로운 것”(ET, 187)이다.

이 사랑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은사(고전 12:31)라고 말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 사랑은 어떤 사랑스러운 대상이나 그의 마음에 드는 대상을 찾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나 가치가 없는 대상조차도 사랑스럽게 만드는 사랑이다. 바르트는 그 아가페 사랑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한다:

“아가페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매력이나, 그가 무엇을 주는가, 그와 상호보완적인 관계인가, 자기가 주는 만큼 보답을 받을 수 있는가를 문제삼지 않고, 전적으로 상대방의 관심에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CD Ⅳ/2, 745).

아가페와 에로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곧 다른 대상에 대한 전적인 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에로스가 상대방을 장악하고 지배하고 그를 통하여 향유하기 위한 이기적인 사랑인 반면에 아가페는 자기자신을 위하여 상대방을 찾지 않고,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는 사랑이다. 아가페 사랑 역시 틀림없는 하나의 추구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이기주의적 추구가 아니라 전적으로 타자의 주권을 인정하는 추구이다.

바르트는 여기서 “주권적”이란 말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강조한다(ET, 188). 그러므로 아가페 사랑을 행하는 사람은 타자, 곧 그의 사랑의 대상의 통제 아래 자신을 두기 위하여 자기자신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는 자다. 그는 이것을 자유롭게 행하는데, 바로 이것이 기독교적 사랑의 자유이다(CDⅣ/2, 733).

그러나 그가 아가페적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가 그 사랑을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로부터 허락과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다(ET, 187). 이와 같이 아가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위엄과 능력에 있어서 에로스를 능가하고, 실제로 그것을 대체하는 절대적으로 에로스에 비하여 우월한 사랑이다. 에로스는 결국 소멸할 것이고, 그것과 함께 그것이 지배하는 세계는 소멸할 것이지만, 아가페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고전 13:8). 왜냐하면 아가페와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CD Ⅳ/2, 748).

미주

(1) 바르트의 화해론의 구조와 형식, 그리고 화해론 전체의 개관에 대해서는, 최영, 「칼 바르트의 화해론 연구」, 34-40을 참고.

(2) 에로스의 기원과 헬라철학에서의 발전에 대하여, CD Ⅳ/2, 738-740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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