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담, 「대동세상」(오월광주 연작판화), 1984년, 목판화, 42×55.5㎝, 개인 소장.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일련의 목판화 작품 중 하나이다. 작가는 5월 광주의 현장에서 비극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사는 가장 완벽한 대동세상을 보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민중미술[民衆美術])

약한 신학이 이야기하는 일상

약한 신학과 민중신학은 모두 지금, 여기에 주목하는데, 이것은 신학적 틀, 즉 거대담론을 가지고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성과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먼저 카푸토는 일상(Quotidianism)이 논리를 초월하는 시간이라고 본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주어진 매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맥박을 느끼며 하나님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1)

이러한 일상성의 강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과도 연결되는데, 카푸토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물리적인 장소나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고 지배하는 방식, 즉 하나님이 지배할 때 존재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왕국은 특정한 “방식(how)”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는 인간 생활이다. 그것은 저 먼 장소가 아니라 시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리듬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매일을 주는 방식이며 매일 하나님이 통치하는 방식이다.(2)

하나님 나라는 가까이에 있지,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왕국의 도래는 알려지지 않은 미래에 일어나는 사건을 예측하는 문제가 아니다. 왕국은 이미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외부에 있는 징조를 찾지 말고 우리 안에서부터 하나님의 통치를 찾아야 한다고 카푸토는 말한다.(3)

내일에 대해서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항상 ‘오늘’에만 초점을 맞춰서 오늘의 필요를 신에게 요구하면 된다. 내일이 오면 그것은 다시 ‘오늘’이 될 것이고, 그러면 오늘의 양식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카푸토가 말하는 왕국의 시간은 오늘이다. 왕국은 단 하루만 지속되지만, 그날은 매일이고 오늘 새롭게 시작된다.(4)

민중신학이 말하는 삶의 경험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도 ‘지금, 여기에’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5) 민중신학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중시하는데, 이것은 철학과 신학적‧논리적 틀을 매개로 하여 현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접적으로 맞닥뜨림으로써 이를 설명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전통 신학이 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이동하는 것이라면, 민중신학은 콘텍스트에서 텍스트로 이동하는 것이다.

전통 신학은 확고한 텍스트를 가지고 삶의 자리를 해석하는 반면, 민중신학은 삶의 자리로부터 텍스트를 도출해내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전통 신학은 삶의 현장이 아니라 성서의 텍스트를 해석의 준거로 삼기 때문에 현재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정당화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런 점에서 안병무는 서구의 전통 신학이 삶에서 나온 신학이 아니라 신학 그 자체에서 나온 신학이라고 비판한다.

반면 민중신학적 방법은 이러한 연역적 방법론에 반대하여 구체적 삶의 경험과 현실, 사건에서 귀납적으로 신학을 도출해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현실을 마주하고 이를 통해 ‘잠정적인’ 이야기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성립된 신학도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의해 성서가 재조명됨으로써 성서의 진리가 새롭게 갱신되어야 한다고 안병무는 강조한다.(6)

현장을 반영하는 이야기는 계속해서 갱신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잠정적인’ 것이다. 민중신학의 하나님은 갈등과 모순을 반영하는데, 그것은 구약시대 민중의 삶이 갈등과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7) 따라서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하나님이 아니라 갈등과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는 민중신학의 하나님 이해는 민중의 삶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로 도출되는 것이다.

안병무가 민중신학이 전태일 분신사건을 계기로 태동했다고 지적한 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민중신학은 이 땅으로부터 괴리되어 공중에 붕 떠있는 담론으로 실재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접근하는 방법론을 택한다. ‘민중’ 개념을 정의하고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한 안병무의 비판 지점도 삶의 자리를 강조하는 맥락과 연결된다.

안병무는 민중을 설명하면 개념이 되고, 개념이 일단 성립하면 그 개념은 실체와 유리된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개념은 죽은 개념이기 때문에 민중의 의미를 선험적으로 정의하고 전제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다.(8) 민중신학은 현장의 사건을 반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불의한 현실을 극복하는 것에 큰 관심을 갖는다.

안병무는 민중의 고난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수난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 예수사건이 재현된다고 주장했다.(9) 현실을 바꾸어내는 것에 대한 민중신학의 강조는 마르크스(Karl Marx)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기한 ‘포이어바흐에 대한 11번째 테제’인 “철학자들은 단지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와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카푸토의 약한 신학에서도 행위를 강조한다. 카푸토가 말하는 왕국의 진리는 기록이나 목격의 대상이 아니라 행하는(facere veritatem) 것이다. 사건의 진리는 행위이며, 그것은 부름으로 인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왕국의 진리는 우리가 부름 받고 실현시켜야 하는 것이다. 사건의 진리는 이름이 아니라 행위인 것이다.(10)

김민아 박사(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집행위원장)  minahkim@i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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