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계·교회 칼럼
“일꾼 고용과 품삯 지급 방식이 달랐다”“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복음 20:1-10)를 다시 읽다
허호익 퇴임교수(대전신학대학교) | 승인 2022.12.11 23:49
▲ 일꾼들에게 품삯을 나눠주고 있는 모습 ⓒGetty Image

이 비유가 잘못 해석되어 왔다. 

예수의 여러 천국(하나님의 나라) 비유가 가운데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마 20장)는 놀라운 비유가 있다. 포도원 주인은 한 차례가 아니라  다섯 차례에 걸쳐 품꾼을 고용한다. 그리고 아침 일찍 온 일꾼이나 저녁 늦게 온 일꾼이나 노동 시간과 상관없이 모두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일당으로 지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이 중요한 비유가 그동안 아주 잘못 해석되어 왔다.

1) 초대 교회는 다섯 차례의 고용 시간이 서로 다른 것에 초점을 두고 해석했다. 오리게네스(185-254)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은 교회를, 한 데나리온은 구원을, 품꾼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보았다. 그는 일을 시작한 시간의 차이에 착안하여 아침 일찍 고용된 일꾼은 아담부터 노아 시대의 사람들, 제3시(오전 9시)에 고용된 일꾼들은 노아 시대부터 아브라함 시대까지 부름을 받은 사람들, 제6시(12시)에 고용된 일꾼들은 예수 시대에 부름 받은 사람들, 제9시(오후 3시)에 고용된 일꾼들은 초대교회 시대에 부름 받은 사람들, 제11시(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은 종말의 때에 부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그는 또한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이레네우스와 어거스틴도 이와 비슷한 해석을 하였다. 이 책 3장 8절에서 살펴 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이 비유도 엉뚱하게도 ‘구원사의 시대 구분’이라는 교리적 알레고리로 해석한 것이다.

2) 종교개혁자들은 이 비유의 초점을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15절)에 두었다. 루터는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에게 노동시간과 상관없이 자기가 주고 싶은 만큼 품삯을 준 것을, 오직 은혜라는 칭의론적 원리로 해석하였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인의 뜻대로’ 즉,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자신이 남들보다 더 낫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비유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 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은 것은 주인의 은혜라고 할 수는 있지만, 하루 종일 일한 일꾼의 경우 정당한 일당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이 은혜라고 할 수는 없다.

3) 현대에 와서 일부 신약학자들 조차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16절)라는 마태의 편집구에 초점을 두어, 이 비유의 핵심을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종말론적 역전’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나중 온자나 먼저 온자나 모두 동일한 일당을 받았으므로, 나중 온 자가 먼저 된 것이 아니다.

4) 저명한 설교자들은 이 비유를 윤리적 신앙적 교훈으로 설교하였다. 이웃에 대한 쓸데없는 관심이나 이웃과 자신을 비교하는 잘 못된 생각이 흔히 우리를 불만과 불평속에 빠지게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보수에 만족하며 살지 남의 보수와 비교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해석한다. 품삯을 노동의 대가로만 생각하지 말며, 인간에게 노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신성한 것이며, 일과 보수는 서로 다른 차원의 것으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용된 사실에 만족했다면 하루 품삯으로 약속된 한 데나리온을 받았을 때 불평이아니라 기쁨이 컸을 것이라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해석은 매일 매일 장터에 나가 가족을 생계의 위협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일자리를 구하려는 일꾼들의 가혹한 현실을 애간장이 타는 마음으로 바라 본 예수의 심정과 새로운 대안 제시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일자리와 최저 생계비를 주라

최근의 성서학자들은 이 비유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모두 거부한다. 성경의 오독이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당시의 일용 노동자의 처지를 애타게 여긴 예수의 심정에 감정이입하여 읽혀져야 한다.

1) 이 천국 비유에 등장하는 품꾼은 예수 당시에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품꾼은 하류계층에 속하는 일용노동자를 칭한다. 소작할 땅 조차 없어 정처 없이 ‘이 땅 저 땅으로’ 떠도는 유랑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종이나 소작농은 일정한 일자리가 있었고, 최저 생계나 주인이나 고용주가 보장하였으므로, 이들 보다 더욱 비참한 자는 품꾼들이었다. 품꾼은 노예들과 달리 자유롭기는 하지만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품꾼들은 하루하루를 품팔이를 하면서 살아가야 했다. 이른 새벽 해뜨기 전에 품꾼들이 거래되는 시장터로 가서 일을 구해야 했다. 추수기에는 일자리가 많았지만, 평상시에는 특별한 수요가 없는 한 공치는 날이 많았다. 헤롯이 성전 재건 공사를 위해 약 1만 8천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성전공사가 완공된 다음에는 대량의 실직 실업자가 발생하였다. 품꾼 즉 일용 노동자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가난한 품꾼들은 성전세나 십일조를 낼 형편도 되지 못했으므로, 율법학자들은 이들을 경멸하여 ‘땅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1970년대 전후 라면이 나오기 전만 해도 하루 벌어서 쌀 한 봉지와 연탄 한두 장을 사서 연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 비유는 하루 벌어 하루를 연명하는 이 땅의 가장 가난한 자에 초점을 둔 비유로 이해해야 한다.

2) 이 비유는 일하고 싶은 모든 자에게 일자리를 주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포도원 주인은 자신이 직접 수시로 여러 차례 장터에 나가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을 데려와 일자리를 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당시의 포도원 주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포도원 주인은 대부분  청지기가 있었고, 청지기는 부재(不在) 지주를 대신하여 일꾼을 고용, 관리, 감독한다. 품꾼들의 원성과 불만도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에게 돌아가도록 한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에서는 주인은 직접 품꾼을 고용을 했고(20:2, 3, 5-7), 품꾼들의 고충과 원성도 직접 듣고 직접 응대한다(20:11-15).

포도원 주인은 하루에 한 차례가 아니라 다섯 차례에 걸쳐 품꾼을 고용한다. 새벽에 하루 종일 일할 일꾼들을 불러들여 놓으면 그들과 함께 하루 일을 마치는 것이 보통이고, 수확량이 많아 하루에 일을 끝낼 수 없을 때에는 여러 날 동안 매일 하루 종일 일한 일꾼을 쓰면 된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이 새벽에 한 번 종일 일할 일꾼들을 부른 것이 아니라, 세 시간마다 한 번씩 나가서 일자리를 못 구한 일꾼들을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다른 포도원 주인과 다르다. 일꾼 고용의 효용성 보다 오후 늦게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자들을 배려하려는 의도가 분명하였다.

따라서 이 비유는 일자리가 필요한 모든 가난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라는 가르침이다. 오후 늦게 까지 일자리를 얻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 가야할 가장(家長)과 그를 기다리는 가족을 우선 배려하고,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업자를 최소화하고 일자리 창출을 우선하라는 교훈이다.

3) 노동 시간과 관계없이 최저 생계비를 주라는 혁명적인 교훈을 포함되어 있다. 포도원 주인은 일한 시간에 상관없이 12시간, 9시간, 6시간, 3시간, 1시간 일한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임금 지급 방식이다.

구약성서에도 임금 지불에 관한 율법이 있었다. 이웃을 고용하고 그 품삯을 주지 않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렘 22:13).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가 진후까지 끌지 말라고 하였다(신 24:15). 이것은 임금 착복과 임금 체불을 금지한 가르침이며, 적게 일한 자나 많이 일한 자나 동일한 일당을 주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제일 늦게 온 사람에게 먼저 일당을 지급하여 아침 일찍 온 사람들이 불평하게 만들었다. 노동 시간과 상관없이 일정한 최저 생계비를 주는 것은, 당시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에 당연히 불평이 있을 것을 예상한 조치로 보인다.

포도원 주인의 임금 지불 방식을 전적으로 달랐다. 노동시간이 적은 이들은 굶어 죽어도 좋단 말인가?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임금의 분배’보다, 최저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최저임금제를 제시한 것이다. 노동 시간이나 조건에 관계없이 생계에 필요한 임금을 지불하라는 것은 당시의 평균적인 임금체계를 혁명적으로 뒤바꾼 통찰임에 틀림없다. 예수는 인류 역사 최초로 일자리 창출과 일일 최저 임금제 지급의 필요성을 직관적인 비유로 제시한 선구자였다.

4)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마 20장)는 말로 시작하는 이 비유는 예수의 여러 천국 비유 중에 하나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 인 줄 아는 이들이 많은데, 이 비유에서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포도원 주인의 사정’과 같다고 하였다. 일하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일 자리를 주고, 일한 시간과 상관없이 최저생계비를 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경제 질서’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하늘 나라 비유에서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마 6:25-33)하였다. 그러나 그 말씀이 실감 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나는 뭘 해서 먹고 살까”가 가장 큰 걱정인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2천 년 전에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 최저생계비와 기본 소득제 제시하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최근에는 기본 소득제에 관한 논의를 제기하고 있다. 기본 소득제가 실현되면, 더 이상 “뭘 해서 먹고 살까”라는 기본 생계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가 경제 질서가 실현되어 일하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일한 시간과 상관없이 최저생계비를 주게 되면, 더 이상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아울러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뜻으로 읽힌다 점도 지적하려고 한다. 이 비유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레네우스, 오리겐, 어거스틴 조차도 이 비유를 부름 받은 시간으로 해석했다. 루터조차도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칭의론의 교리로 해석하였다. 수많은 현대 성서학자들도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종말론적 전환’이라는 현대 신약학의 이론으로 해석했다. 저명한 설교자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불평하지 말고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라는 신앙의 덕목으로 해석했다. 이처럼 성경을 잘 못 해석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배반할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일자리 감소와 기본소득제

2000년 전 예수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통해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최저 생계비를 주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나라’의 경제 질서의 새로운 대안을 가르쳤다. 우리시대는 어떠한가? 우리 시대의 저임금, 저숙련, 임시직 노동자는 예수 시대의 일요 노동자인 품꾼과 다름없다.

이제 막 도래한 제4차 산업사회 시대는 거대한 자본과 고도의 기술이 결합되어 생산의 3대 요소 중 하나인 노동을 격감 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지능과 로봇과 소수의 고급 기술자들이 모든 생산 영역을 담당하는 필연적인 결과로 산업 전반에서 노동 인력이 격감하고 일자리 감소하고, 따라서 빈부 격차와 사회 혼란을 불가피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제레미 리프킨’은 첨단 기계가 인간 노동력을 대체할 미래 사회를 분석한 《노동의 종말》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무한 경쟁 하에서, 지난 30년 동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그나마 현재의 남아 있는 일자리마저 무수하게 사라질 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현실을 맞게 될 것이 뻔해 보인다.

지금까지 확충해 온 선별적 복지 제도 역시 복지 대상자들을 선별하고 관리하는 비용 부담이 점점 증가하는 비효율성이 제기되고 있다. 단순히 복지제도 확산으로는 빈곤 문제를 비롯한 일자리 부족으로 파생되는 결혼기피와 출생률 저조 등 여러 사회적인 문제들의 근원적인 해결이 어렵게 되었다.

그 대안으로 기본 소득제라는 것이 논의되어 왔다. 정부가 나서서 고소득층에게 중과세를 하여 재원을 확보하고 모든 국민에게 부자든 가난하든 일률적으로 기본소득을 나눠주자는 혁신적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기본 소득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수는 2000년 전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통해 일자리가 필요한 품꾼을 여러 차례 찾아 나서 일자리를 주고 노동시간과 상관없이 최초한의 하루 일당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경제 질서’라고 가르쳤다. 이 비유를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일자리 창출을 통한 실업률 최소화와 최저임금제를 주장한 선구자임을 알 수 있다.

허호익 퇴임교수(대전신학대학교)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허호익 퇴임교수(대전신학대학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